북한선교 및 통일관련 단체들이 공동 주최한 신사참배 70년 참회와 평화통일을 위한 세미나 발제는 김영재 교수(전 합동신대)가 맡았다. 김 교수는 ‘신사참배와 한국교회의 대응’이라는 주제발표를 통해 한국교회가 신사참배에 대해 어떻게 대응했고, 해방 이후에는 이를 어떻게 해석하고 처신했는지를 회고했다.

한국교회의 신사참배 역사

일제는 1910년 한일합방 이후부터 한국인의 일본 황국신민화 정책의 일환으로 일본 황실의 조상과 전몰장병을 참배하도록 하는 정책을 세웠다. 조선총독부는 이를 바탕으로 1925년 조센징구(朝鮮神宮)를 완공, 태양신 아마데라스 오미가미(天照大神)와 일본 황실의 제조상, 그리고 명치천황(明治天皇)에게 헌당하고 한국 방방곡곡에 신사(神社)를 건립하기 시작했다.

이후 일본 내에서 권력을 장악한 군벌 정부는 1930년 이후 신사참배를 본격적으로 강요하기 시작하고, 1935년부터는 학교와 교회를 대상으로 신사참배가 종교의식이 아닌 ‘국민의식’이라며 이를 강요하기 시작했다. 기독교인들은 처음에는 이를 ‘죽은 영혼들을 신으로 섬기는 신사참배는 하나님의 계명에 위배되는 것’이라며 단호히 거부한다.

그러나 이러한 목소리는 날이 갈수록 약해지고, 많은 기독교인들은 신사참배가 국민의례일 뿐이라는 감언이설에 넘어가 마음의 부담을 던 채 일제의 강요에 순응하기 시작한다.

구체적으로는 교황청이 가톨릭 신자들에게 국가의식에 참여해도 무방하다고 내린 교지를 따라 천주교가 신사참배를 시작했고, 1936년 11월에는 일본 기독교연합회가, 이후에는 한국 내 캐나다연합교회 선교회가 신사참배에 참여했다.

마지막으로 버티는 한국장로교회를 꺾기 위해 일제는 1938년 2월부터 총력을 기울였고, 노력의 결과 9월 총회가 열리기 전까지 전국 23개 노회 중 17개 노회가 굴복한다. 결국 9월 9일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제27회 총회가 개최됐다. 193명의 총대들 틈에 1백여명의 일제 경관들이 자리하는 공포분위기 가운데 짜놓은 각본대로 한 총대는 신사참배를 국민의례로 인정하자고 동의했고, 의장은 곧 재청을 받아 다음과 같이 결의한다.

“아등(我等)은 신사는 종교가 아니오 기독교의 교리에 위반하지 않는 본의를 이해하고 신사참배가 애국적 국가의식임을 자각하여 이에 신사참배를 솔선 여행(勵行)하고 추(追)히 국민정신총동원에 참가하여 비상시국 하에서 총후(銃後) 황국신민(皇國臣民)으로서 적성(赤誠)을 다하기로 기(期)함.”

전격적으로 의사를 진행한 것은 불법이라는 이의가 제기됐지만 묵살되고 만다. 회의가 끝나자 부총회장 김길창과 23명의 총대들이 평양 신사에서 참배했으나, 많은 목사들과 평신도 지도자들은 개별적 또는 공동으로 신사참배 반대에 나선다. 장로교 선교사 총대들 또한 신사참배 가결이 있은 날 곧바로 항의서를 제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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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진 논찬에서는 신사참배에 대한 다양한 시각이 논의됐다. 그 가운데 미묘한 입장차도 확인됐다. 신사참배를 적극 반대한 고려교단 출신인 김영재 교수는 “신사참배 문제가 오늘날에는 망각되고 있는 것 같다”며 “각 교단이나 교회들이 순교자들의 업적을 기리는 것을 보면서 마치 모두 신사참배를 공식적으로 회개한 것으로 착각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김영재 교수는 “상황이 아무리 어려웠다 해도 잘못한 것은 잘못한 것이라 말해야 하지 않나 생각한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또 “신사참배 반대자들의 저항과 신앙운동 역시 옳고 값진 것이었으며, 한국교회 정체성의 명맥을 이어온 고귀한 것으로 재평가하는 것이 마땅하다”며 “그런 재평가가 무시되거나 널리 동조를 얻지 못한다면 과거사 죄책에 대한 회개는 있을 수 없고, 회개 없이는 고백이 있을 수 없다”고 말했다. 해방 이후 신사참배에 굴종한 대다수 지도자들이 죄책에 대한 회개와 고백 없이 한 세대가 지나가 버린 점을 지적한 것이다. 김 교수는 “한국교회가 무분별하게 분열한 중요한 요인은 분리주의적 교회관 때문이라 생각하지만, 마땅히 했어야 할 회개를 건너뛰어 용서와 관용이 없는 교회가 되다 보니 교회가 오늘날처럼 하나를 이루지 못하게 된 것”이라며 이것이 패전 직후 참회와 고백을 했던 독일교회가 분열이 없었던 이유라고 덧붙였다.

이어진 논찬에서 김흥수 교수는 북한교회의 우상숭배를 언급하며 신사참배 문제가 아직 끝난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김 교수는 “북한의 주체사상, 특히 수령중심주의는 종교영역에서도 집권자의 생각과 요구를 절대시하는 이론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큰데, 이 경우 수령중심주의나 수령숭배는 북한의 기독교 신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첫 계명을 어기게 하는 다른 형태의 신사참배일 수도 있다”고 밝혔다. 이 사안에 대해서는 더 언급되지 못했지만, ‘교회를 지키기 위해서 어쩔 수 없었다’는 신사참배 불가피론과 크게 다르지 않은만큼 향후 신학적 재정립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해방 직후 신사참배 굴종자들이 주로 했던 변명에 대한 재해석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나왔다. 기장 출신 김승태 교수(민족문제연구소)는 “이 문제를 흑백논리에 치우쳐 단선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 않는가 돌아볼 때”라며 신사참배시 거부자와 순응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거부자들 가운데서도 거부운동을 한 사람, 교회를 떠나 숨었던 사람이 있었고, 순응자들 가운데서도 겉으로만 순응하는 척 하면서도 속으로는 일제 패망을 위해 기도하던 사람들도 있었다고 밝혔다.

그 예로 김재준 목사와 함태영 목사 등이 남산 조선신궁에 올라가서 “어서 속히 이 남산에서 일본놈의 귀신을 쫓아버리고 여기에 예배당이 서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했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이러한 태도가 올바르다는 입장과 관계없이, 해방 후 기독교 내 일제 협력자들이나 신사참배 굴종자들이 죄인이라기보다는 피해자라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태도 구분이 중요하다고 밝혔다.

또 이상규 교수는 신사참배를 포함한 과거사에 대한 진정한 반성 혹은 참회가 행위 당사자들에게 국한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교수는 “신사참배 반대자들이 공동으로 책임을 느끼고 함께 성명을 발표하는 것이 일견 아름답게 보이나, 적어도 적극적 친일파는 신사참배 반대자들과 함께 성명서를 발표하면서 그 그늘에 피해 자신의 실체를 숨길 수 있었다”고 밝히고, 오히려 진정한 회개와 자숙의 길을 방해하고 면죄부를 줄 수 있다고 우려했다. 또 “참회할 아무런 이유가 없음에도 성명에 동참했다면 그것이 대승적 차원의 덕목일 수도 있지만, 일면 자신의 의를 내세우고자 하는 약간의 위선일 수도 있다”고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