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론(試論)을 필자가 교회 앞에 제시하게 된 동기는 지금까지 필자가 우리 설교자들에게 설교 작성에 앞서서 두 가지를 반드시 기억하자고 호소해 왔던 사실과 연관된다. 그첫째는 우리 설교자들은 모두 내가 기독교, 더 구체적으로는 개신교의 설교자임을 기억하자는 것이고, 둘째는 내 설교의 본문부터가 복음을 드러내는데 적절한가를 반드시 묻자는 것이었다. 필자는 이 주제에 관해 필자의 '성경의 해석과 설교', 상권(진리의 깃발, 1999, 제3판)(p.52, 97, 98, 124, 266, 388, 401)과 중권(진리의 깃발, 2001), p.40 등에서 수차례 언급했으며, 작년에는 '히브리서에 제시된 우리의 설교 본문 선택 지침들과, 그 이론에 근거한 설교 예문 3편'('교회와 문화', 한국성경신학회, 2002, 2, 18, p.108)을 발표했었다. 그러나 이 주제가 워낙 중요하다고 필자는 보기 때문에, 히브리서만을 대상으로 삼았던 전번의 연구에서 일보 나가서 이번에는 복음서 전체에서 예수님의 구약 인용의 사례들과, 그 인용들이 그의 교훈들에서 가지는 효과를 살펴보기로 하였다. 물론 히브리서 기자의 구약 인용과 예수님의 구약 인용 사이의 본질적 차이점도 고려되어야 했다. (지면 관게로 사도행전과 서신서들의 구약 인용 사례의 교훈을 부득불 제외하게 된 것을 유감으로 생각하며, 기회가 허락되면 이 부분도 고찰하고자 한다).
기독교 설교자가 설교 작성에 앞서서 예수님이나 사도들의 구약 인용의 시범을 따라서 먼저 적절한 설교 본문을 선택하면 이는 그 설교 작성의 일단계의 성공이며, 다음으로 그 본문과 적절하게 연관된 구약과 신약의 상관 구절들을 발견하면 이는 그 설교 작성의 이단계의 성공이요, 끝으로 구약과 신약의 관계 본문들의 구속사적이면서도 '합당하고 현실미 있는 종합'(appropriate and relevant synthesis)의 단계에까지 도달하면 이는 그 설교 작성의 최종적인 성공일 것이다.) A.Schlatter교수의 성경 이해와 주석 방법의 특색의 하나로서 그는 성경 내용들에 대한 '종합의 능력' 또는 그 종합의 '보기 드문 재능'(ability of, knack for synthesis)을 발휘했음이 회자되었다.
따라서 이 논문에서 조사된 예수의 구약 성귀들에 기초한 교훈들은 비록 그 분량(44 항목)이 예수의 전체 교훈들의 약 이십분의 일 정도의 제한적 분량이나, 첫째, 그것들은 구약을 인용하신 예수의 높으심 때문에, 둘째, 예수가 택한 그 귀절들의 높은 적절성 때문에 그대로 기독교 설교 본문들의 최상의 기준과 표본들이 될 수 있다고 본다. 그리고 거기에 필자가 첨가한 간략한 해석들은 설교자가 실제로 설교를 구상할 때 설교의 골격 구성과 대, 소지 배치에도 도움이 될 수 있기를 필자는 바라며, 앞으로 독자들의 다른 모든 설교들도 이 원리를 중심 축으로 삼아서 본문 선택과 내용 구성이 이뤄지게 되기를 필자는 충심으로 바란다.
근년 세계의 개신교의 주경학계와 설교학계에서 성경적 기독교 본연(本然)의 설교를 회복하려는 관심이 고조되고 있는 현상은 매우 고무적이기는 하나, 그러나 여전히 국 내외의 많은 설교들, 특히 우리 나라 개신교의 많은 설교들이 아직도 그 복음의 적시력(摘示力)과 하나님의 은혜를 성경의 기록 그대로 깊고 넓게 개진(開陳)하는 힘이 매우 미약하다고 보여지는데, 그런 설교들은 우선 본문 선택부터가 잘못되었다는 것이 필자의 확고한 견해이다. 그러한 잘못된 설교 본문들은 성경적 기독교의 복음의 제시와 하나님의 깊은 은혜의 개진(開陳)에 목표를 둔 것이 아니라 거의 모두가 철학적 이론이나 도덕적 교훈이나 인간관계와 사회문제 해결 등 기독교 설교와는 무관한 주제들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나마 그 본문들의 해석과 적용은 이른바 ‘뜀틀판’으로만 사용되는 경우가 허다하고, 정작 설교의 내용은 본문과는 상관이 거의 없는, 수필집 같은 내용들로 채워져 있다. 이 현실을 우려하는 많은 소리들을 필자는 오래 전부터 유념해 왔었다.
따라서 이 글의 목적은 기독교 설교가 성경에 계시된 복음을 가능한 한 선명하게 전할 수 있게 되기 위하여 우선 설교자의 설교 본문의 선택부터 문자 그대로 성경적으로, 기독교적으로, 개신교적으로 변화됨으로서 먼저 우리 나라 개시교 강단과 더 나가서는 세계의 기독교 강단이 기독교 본연의 설교를 회복하도록 돕고자 함에 있다. 이 글의 제목에서부터 설교를 굳이 ‘기독교 설교’라고 밝힌 이유도 오늘의 많은 설교들이 비기독교화 하였다는 반성의 뜻을 담고 있다.
성경을 어떻게 해석하고 설교를 어떻게 하면 복음 전파가 가장 잘 되고, 교회는 부흥할까? 예수가 그의 교육의 대상을 먼저 당시의 유대 사회의 지도층으로 삼았던 것은 당연했다. 그런데 그가 당시의 유대인 지도자들에게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마22:29)라고 말씀하신 정황을 보면 기독교회는 그 초창기부터 성경 해석의 문제를 가지고 싸워 왔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중요한 질문에 대한 답이 옛날부터 기독교계에 많지만, 본 논문은 예수의 구약성경 사용에서 그 일차적 해답을 찾아보려는 것이다. 즉 예수가 구약에서 자신의 메시아 신분과 사명을 정확하게 예언했던 귀절들을 최우선적으로 적절하게 골라서 인용하시고, 그 인용하신 구약 본문을 근거 삼아 자신의 새 교훈을 베프셨던 그의 설교의 방법이 복음을 가장 잘 전하였다고 보고, 기독교의 설교자들도 어느 시대에나 예수의 이 방법을 따라서 설교 본문의 선택부터 바르게 함으로서 기독교 설교의 진수를 터득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 제 호 목 사(전 한국성경신학회 회장 1997-2000)
기독교 설교자가 설교 작성에 앞서서 예수님이나 사도들의 구약 인용의 시범을 따라서 먼저 적절한 설교 본문을 선택하면 이는 그 설교 작성의 일단계의 성공이며, 다음으로 그 본문과 적절하게 연관된 구약과 신약의 상관 구절들을 발견하면 이는 그 설교 작성의 이단계의 성공이요, 끝으로 구약과 신약의 관계 본문들의 구속사적이면서도 '합당하고 현실미 있는 종합'(appropriate and relevant synthesis)의 단계에까지 도달하면 이는 그 설교 작성의 최종적인 성공일 것이다.) A.Schlatter교수의 성경 이해와 주석 방법의 특색의 하나로서 그는 성경 내용들에 대한 '종합의 능력' 또는 그 종합의 '보기 드문 재능'(ability of, knack for synthesis)을 발휘했음이 회자되었다.
따라서 이 논문에서 조사된 예수의 구약 성귀들에 기초한 교훈들은 비록 그 분량(44 항목)이 예수의 전체 교훈들의 약 이십분의 일 정도의 제한적 분량이나, 첫째, 그것들은 구약을 인용하신 예수의 높으심 때문에, 둘째, 예수가 택한 그 귀절들의 높은 적절성 때문에 그대로 기독교 설교 본문들의 최상의 기준과 표본들이 될 수 있다고 본다. 그리고 거기에 필자가 첨가한 간략한 해석들은 설교자가 실제로 설교를 구상할 때 설교의 골격 구성과 대, 소지 배치에도 도움이 될 수 있기를 필자는 바라며, 앞으로 독자들의 다른 모든 설교들도 이 원리를 중심 축으로 삼아서 본문 선택과 내용 구성이 이뤄지게 되기를 필자는 충심으로 바란다.
근년 세계의 개신교의 주경학계와 설교학계에서 성경적 기독교 본연(本然)의 설교를 회복하려는 관심이 고조되고 있는 현상은 매우 고무적이기는 하나, 그러나 여전히 국 내외의 많은 설교들, 특히 우리 나라 개신교의 많은 설교들이 아직도 그 복음의 적시력(摘示力)과 하나님의 은혜를 성경의 기록 그대로 깊고 넓게 개진(開陳)하는 힘이 매우 미약하다고 보여지는데, 그런 설교들은 우선 본문 선택부터가 잘못되었다는 것이 필자의 확고한 견해이다. 그러한 잘못된 설교 본문들은 성경적 기독교의 복음의 제시와 하나님의 깊은 은혜의 개진(開陳)에 목표를 둔 것이 아니라 거의 모두가 철학적 이론이나 도덕적 교훈이나 인간관계와 사회문제 해결 등 기독교 설교와는 무관한 주제들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나마 그 본문들의 해석과 적용은 이른바 ‘뜀틀판’으로만 사용되는 경우가 허다하고, 정작 설교의 내용은 본문과는 상관이 거의 없는, 수필집 같은 내용들로 채워져 있다. 이 현실을 우려하는 많은 소리들을 필자는 오래 전부터 유념해 왔었다.
따라서 이 글의 목적은 기독교 설교가 성경에 계시된 복음을 가능한 한 선명하게 전할 수 있게 되기 위하여 우선 설교자의 설교 본문의 선택부터 문자 그대로 성경적으로, 기독교적으로, 개신교적으로 변화됨으로서 먼저 우리 나라 개시교 강단과 더 나가서는 세계의 기독교 강단이 기독교 본연의 설교를 회복하도록 돕고자 함에 있다. 이 글의 제목에서부터 설교를 굳이 ‘기독교 설교’라고 밝힌 이유도 오늘의 많은 설교들이 비기독교화 하였다는 반성의 뜻을 담고 있다.
성경을 어떻게 해석하고 설교를 어떻게 하면 복음 전파가 가장 잘 되고, 교회는 부흥할까? 예수가 그의 교육의 대상을 먼저 당시의 유대 사회의 지도층으로 삼았던 것은 당연했다. 그런데 그가 당시의 유대인 지도자들에게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마22:29)라고 말씀하신 정황을 보면 기독교회는 그 초창기부터 성경 해석의 문제를 가지고 싸워 왔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중요한 질문에 대한 답이 옛날부터 기독교계에 많지만, 본 논문은 예수의 구약성경 사용에서 그 일차적 해답을 찾아보려는 것이다. 즉 예수가 구약에서 자신의 메시아 신분과 사명을 정확하게 예언했던 귀절들을 최우선적으로 적절하게 골라서 인용하시고, 그 인용하신 구약 본문을 근거 삼아 자신의 새 교훈을 베프셨던 그의 설교의 방법이 복음을 가장 잘 전하였다고 보고, 기독교의 설교자들도 어느 시대에나 예수의 이 방법을 따라서 설교 본문의 선택부터 바르게 함으로서 기독교 설교의 진수를 터득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 제 호 목 사(전 한국성경신학회 회장 1997-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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