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기독교 총연합회와 한국기독교 교회협의회가 공동으로 참여한 주기도문과 사도신경 재번역에 대하여 우선 환영한다. 예배 때마다, 특히 빠른 속도로 암송되는 우리의 주께서 가르치신 기도문을 좀 더 이해하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온 성도가 암송할 수 있다면, 이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여러 영어성경들을 기초로해서 검토해 볼 때 내용에 있어서 간과할 수 없는 이견(異見)이 있어 이를 다음에 제시한다. 주께서 직접 가르치신 이 짤막한 기도는 전후관계상 영어번역들에 있어서도 일견(一見)에 그 의미가 명확하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어휘상의 고찰(考察)
우선 어휘상의 문제에 있어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하시며”와 “나라와 권능과 영광”에 있어서 “나라”는 “왕국(王國)”으로, “권능(權能)”은 “권세(權勢)”로 바꾸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도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로 바꾸어야 할 것이다. “잘못”은 “죄”로 일관성을 유지하여야 할 것이다. 만일 그리하지 않는다면 새로운 번역은 오역의 논란에 처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한글성경이 말하는 “하늘 나라” 혹은 “천국(天國)”은 모두 “하늘 왕국(王國)”의 오역(誤譯)이다. “그게 뭐가 중요한가, 옛 왕국들이 오늘의 나라들이 아닌가?“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큰 오산이다.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나라의 개념과 왕국의 개념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나라이든 왕국이든 중요한 것은 “주권(主權)”이다. 이 주권은 바로 “권세(權勢)”라는 어휘와 연결되는 어휘이기도 하다. 권세는 왕권이 미치는 영역을 의미할 수 있다. 왕국의 주권은 왕에게 있으나 오늘날의 민주국가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엄청난 개념의 차이가 있다. 하나님의 왕국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은 “절대주권”이다. 다른 말로 말하면, 하나님의 우주와 우리 인간에 대한 통치권(sovereignty)은 “절대 통치권”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에 대한 절대 통치권, 생사여탈권(生死與奪權)을 가지고 계신다. 아래에 게재된 번역들 외에 현대어로 번역된 다른 영어성경들도 모두 “왕국(kingdom)”으로 번역했으며(New KJV, NRSV), 심지어 Good News Bible과 같이 일상어구로 풀어쓴 성경들에서 조차 “왕국(kingdom)"을 고수하고 있다.
성경이 일관성있게 말씀하는 바는 이 땅은 영적 전장(戰場)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왕권(王權)이 이 땅위에 확립되어가는 과정에 살고 있다. 다른 말로해서,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권세가 완전히 확립되어 가는 과정에 살고 있다. 이러한 성경 전반에 대한 이해에 기초하여, 아래에 보여진 바와 같이 어떤 영어 성경들은 “악에서 구원하소서”라고 번역한 부분의 “악”을 사탄을 의미하는 “악한 자(evil one)”로 번역했다. 심지어 JB는 “Evil One"으로 써서, 구체적으로 마귀를 의미했다. 주께서 가르치신 이 짧은 기도문 안에서, 우리는 하늘 왕국에 대한 소원, 하늘에 수립된 하나님의 절대 통치권, 이 땅에 이루어져가는 하나님의 절대 통치권, 그리고 마귀의 세력, 위치적으로 거룩해진(positionally sanctified) 자들의 점진적 성화(progressive sanctification)의 과정, 그리고 이 땅 위에서, 우리의 사회에서, 교회에서, 그리고 우리의 몸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두 세력간의, “권능”이 아닌, “권세”를 위한 전쟁 모두를 볼 수 있다. 영어성경들에는 정관사가 붙은 “the power"가 있고 관사 없이 쓴 power가 있다. 정관사가 붙은 power들은 모두 하나님의 능력(能力)이나 권능(權能)의 의미가 아니고, 이 전장에서의 하나님의 세력, 즉, ”권세“를 의미한다.
이 영적전쟁터에서 오늘을 사는 우리와 마귀와의 관계에 있어서, 마귀는 우리 믿는자들을 ”유혹(誘惑)“한다. 우리는 마귀의 시험(試驗)과 전쟁을 벌이는 것이 아니고, 그의 ”유혹“과 영적 전쟁을 벌이며 오늘을 사는 것이다. 아래에 인용된 영어 성경들 중, 오직 Jerusalem Bible(JB)만이 "시험(test)”이라는 어휘를 사용했고 NRSV는 “시험(trial)"으로 번역했으나(인용되지 않았음), 모든 다른 영어성경들에는 “유혹(temptation)"으로 번역되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시험하시지 않는다“고 말한다. 유혹의 주체는 하나님이 아니고 마귀라는 점이 중요하다. 시험에는 실패하면, 재시험을 볼 기회가 있을지도 모르나, 유혹에 떨어지면 생명을 잃을 수도 있으며, 마귀의 자식이 될 수도 있다. 시험은 의도가 선할 수도 있으나, 유혹에는 악한 의도만이 있을 뿐이다. 시험은 시련을 동반할 수 있으나, 유혹은 보통 꿀처럼 달다. 예수께서는 광야에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신 것이 아니고, ”유혹“을 받으셨고, 이를 물리치셨다. 한글개역성경이 오역인 분명한 이유는, 주께서는 마귀의 시험을 통과하셨거나 합격하신 것이 아니고, 마귀의 유혹을 물리치셨다는데 있다. 따라서 ”유혹“으로 번역되어야 어법적으로도 맞는다. 욥의 고난은 어떠한가? 마귀는 고난으로 그를 조종하려했다(manipulate). 즉,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저주하도록 악한 의도를 가지고 고문으로 유도했다. 조종(操縱)과 유도(誘導)는 유혹(誘惑)와 일맥상통한다. 발표된 번역의 ”시험에 빠지지---”는 어법상 문제가 있다. 어법상 시험은 치루는 것이고, 유혹에는 “빠지고” 당한다(Williams Version 참고).
주기도문의 전체적 의미를 생각할 때, 중요한 개념중의 하나는 복수의 개념이다. 근년에 이르러, 패스트푸드식의 성경공부가 성행하면서, 하나님과 “나”와의 일대일의 관계가 지나치게 부각되면서, 개인주의적인 인본주의의 풍토가 교회에 침투하면서, 우리는 교회라는 근본적인 복수의 개념과 구원을 연결하는 고리를 잃어가고 있다. 점진적 성화에 대한 교회의 지속적인 강조와 지원의 부족으로, 위치적 성화(positional sanctification)만이 두드러지게 강조되고, 이는 “개인적 구원의 확신”에 대한 지나친 강조로 이어졌음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다. 많은 뜻있는 미국의 지도자들은 자기존중(self-esteem)교육이 미국의 교육과 장래를 망쳐놓았다고 한탄한다. 교회의 지나친 개인적 구원의 확신 교육은 교회에 해가 될 수 있다는 유사성을 우리는 부정하기 힘들다. 패스트푸드식의 가르침으로 초래될 수 있는 개인의 영적 비대현상은, 육체적 비대가 생명을 위협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교회의 활동력에 영향을 미치고, 또 개인의 영원한 생명에 위협을 미칠 수 있다. 우리는 이 짧은 기도문의 전반에 있는 복수의 개념을 중요시해야된다.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의 왕국, 일용할 양식, 죄의 용서, 유혹, 하나님의 권세, 하나님의 영광, 이 모든 주제들이 “우리”라는 복수의 개념위에 수립되어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정서를 이유로 들어 “당신”이라는 2인칭 대명사를 쓰지 않은 것에 대하여, 우리는 교회에서 하나님께 대해서 이 호칭을 대표기도에서도 사용하며, 우리의 어른들도 손윗 어른들에 대해서 존경의 의미로 이 호칭을 사용하는 것을 본다. 단 어떤 지방에서만, 매우 냉철하게 격하적인 2인칭 대명사로, 특히 싸울 때 사용될지 모른다. 유태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감히 입에 올리는 것 조차 불경하게 생각해서, 수 백년동안 하나님의 이름을 발음하지 않았고, 그래서 그의 이름을 우리는 어떻게 발음해야할지를 모른다. 그래서 영어성경들은 모두 하나님의 이름의 자음들의 자리를 “주(LORD)"로 쓴다. 그러나 한글 성경과 한국 교회는, 분명치 않은 추정된 하나님의 이름을 성경과 설교에서 광범위하게 사용한다. 그러한 교회에서 이 2인칭 대명사의 사용을 피하려하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
같은 의미의 어휘인 debts와 debtors를 하나는 “잘못”으로 다른 하나는 “죄”로 번역한 것은 온당치 않다. 왜냐하면 성경번역에 있어서 어휘의 일관성(一貫性)은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아래에 언급한 죄의 회계학적(會計學的) 개념과 영어성경에 사용된 거의 열 개에 가까운 “죄”의 유사어들을 고려할 때, 이러한 번역은 어휘에 대한 일관성 및 그 원의(原義)를 반영하지 못한 번역이고, 결국 용어색인(concordance)을 외면한 번역이 된다. 그 열 개에 가까운 죄의 유사어휘들을 한글 성경은 거의 모두 그저 “죄”라고 번역했다. 영어 성경에 쓰인 죄와 관련된 어휘들 중, “잘못”이라는 의미와 가까운 어휘는 “wrong"이나 ”err"가 있을 것이나, 주기도문에 쓰인 “debts”는 좀더 포괄적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번역되는 것이 마땅하다. 영어 성경에서 sin이 포괄적인 “죄”의 의미를 가지듯이, debts 역시 인간이 인간에게 범하는 포괄적 의미의 “죄”이다. 어휘의 일관성의 유지는 매우 중요하다. 예를들어, 영어의 "faithrul"이라는 어휘는 성경에서 매우 중요한 기둥이 되는 어휘중의 하나이다. 이는 하나님의 성품에 속하고, 또 그는 우리에게도 성실할(faithrul) 것을 요구하신다. 많은 미국교회의 성도들은 성경 용어색인(Condordance) 책을 보고 이 어휘가 사용된 구절들을 찾아 성경을 공부한다. 그런데 우리 개역성경은 이 어휘를 “성실한, 신실한, 충성된, 혹은 미쁘시다”는 무슨 말인지 모를 다양한 어휘들로 번역했다. 이 어휘의 기초적인 의미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신 언약에 대해서 성실하시다는 의미에서 출발된다. “약속 혹은 언약에 대한 성실성(誠實性)“이 기초적 의미이다. 그러나 우리는 도무지 이 중요한 어휘의 의미를 한글 성경을 통해서 전혀 깨달을 수 없도록 산만하다. 어휘의 일관성은 매우 중요하다. 만일 짧은 이 기도문에서 조차 어휘의 일관성을 유지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떻게 성경공부에 필수인 한글성경 용어색인을 만들 수 있을 것인가?
<계속>
LA 동서성서학회(회장 김영휘)
어휘상의 고찰(考察)
우선 어휘상의 문제에 있어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하시며”와 “나라와 권능과 영광”에 있어서 “나라”는 “왕국(王國)”으로, “권능(權能)”은 “권세(權勢)”로 바꾸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도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로 바꾸어야 할 것이다. “잘못”은 “죄”로 일관성을 유지하여야 할 것이다. 만일 그리하지 않는다면 새로운 번역은 오역의 논란에 처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한글성경이 말하는 “하늘 나라” 혹은 “천국(天國)”은 모두 “하늘 왕국(王國)”의 오역(誤譯)이다. “그게 뭐가 중요한가, 옛 왕국들이 오늘의 나라들이 아닌가?“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큰 오산이다.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나라의 개념과 왕국의 개념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나라이든 왕국이든 중요한 것은 “주권(主權)”이다. 이 주권은 바로 “권세(權勢)”라는 어휘와 연결되는 어휘이기도 하다. 권세는 왕권이 미치는 영역을 의미할 수 있다. 왕국의 주권은 왕에게 있으나 오늘날의 민주국가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엄청난 개념의 차이가 있다. 하나님의 왕국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은 “절대주권”이다. 다른 말로 말하면, 하나님의 우주와 우리 인간에 대한 통치권(sovereignty)은 “절대 통치권”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에 대한 절대 통치권, 생사여탈권(生死與奪權)을 가지고 계신다. 아래에 게재된 번역들 외에 현대어로 번역된 다른 영어성경들도 모두 “왕국(kingdom)”으로 번역했으며(New KJV, NRSV), 심지어 Good News Bible과 같이 일상어구로 풀어쓴 성경들에서 조차 “왕국(kingdom)"을 고수하고 있다.
성경이 일관성있게 말씀하는 바는 이 땅은 영적 전장(戰場)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왕권(王權)이 이 땅위에 확립되어가는 과정에 살고 있다. 다른 말로해서,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권세가 완전히 확립되어 가는 과정에 살고 있다. 이러한 성경 전반에 대한 이해에 기초하여, 아래에 보여진 바와 같이 어떤 영어 성경들은 “악에서 구원하소서”라고 번역한 부분의 “악”을 사탄을 의미하는 “악한 자(evil one)”로 번역했다. 심지어 JB는 “Evil One"으로 써서, 구체적으로 마귀를 의미했다. 주께서 가르치신 이 짧은 기도문 안에서, 우리는 하늘 왕국에 대한 소원, 하늘에 수립된 하나님의 절대 통치권, 이 땅에 이루어져가는 하나님의 절대 통치권, 그리고 마귀의 세력, 위치적으로 거룩해진(positionally sanctified) 자들의 점진적 성화(progressive sanctification)의 과정, 그리고 이 땅 위에서, 우리의 사회에서, 교회에서, 그리고 우리의 몸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두 세력간의, “권능”이 아닌, “권세”를 위한 전쟁 모두를 볼 수 있다. 영어성경들에는 정관사가 붙은 “the power"가 있고 관사 없이 쓴 power가 있다. 정관사가 붙은 power들은 모두 하나님의 능력(能力)이나 권능(權能)의 의미가 아니고, 이 전장에서의 하나님의 세력, 즉, ”권세“를 의미한다.
이 영적전쟁터에서 오늘을 사는 우리와 마귀와의 관계에 있어서, 마귀는 우리 믿는자들을 ”유혹(誘惑)“한다. 우리는 마귀의 시험(試驗)과 전쟁을 벌이는 것이 아니고, 그의 ”유혹“과 영적 전쟁을 벌이며 오늘을 사는 것이다. 아래에 인용된 영어 성경들 중, 오직 Jerusalem Bible(JB)만이 "시험(test)”이라는 어휘를 사용했고 NRSV는 “시험(trial)"으로 번역했으나(인용되지 않았음), 모든 다른 영어성경들에는 “유혹(temptation)"으로 번역되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시험하시지 않는다“고 말한다. 유혹의 주체는 하나님이 아니고 마귀라는 점이 중요하다. 시험에는 실패하면, 재시험을 볼 기회가 있을지도 모르나, 유혹에 떨어지면 생명을 잃을 수도 있으며, 마귀의 자식이 될 수도 있다. 시험은 의도가 선할 수도 있으나, 유혹에는 악한 의도만이 있을 뿐이다. 시험은 시련을 동반할 수 있으나, 유혹은 보통 꿀처럼 달다. 예수께서는 광야에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신 것이 아니고, ”유혹“을 받으셨고, 이를 물리치셨다. 한글개역성경이 오역인 분명한 이유는, 주께서는 마귀의 시험을 통과하셨거나 합격하신 것이 아니고, 마귀의 유혹을 물리치셨다는데 있다. 따라서 ”유혹“으로 번역되어야 어법적으로도 맞는다. 욥의 고난은 어떠한가? 마귀는 고난으로 그를 조종하려했다(manipulate). 즉,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저주하도록 악한 의도를 가지고 고문으로 유도했다. 조종(操縱)과 유도(誘導)는 유혹(誘惑)와 일맥상통한다. 발표된 번역의 ”시험에 빠지지---”는 어법상 문제가 있다. 어법상 시험은 치루는 것이고, 유혹에는 “빠지고” 당한다(Williams Version 참고).
주기도문의 전체적 의미를 생각할 때, 중요한 개념중의 하나는 복수의 개념이다. 근년에 이르러, 패스트푸드식의 성경공부가 성행하면서, 하나님과 “나”와의 일대일의 관계가 지나치게 부각되면서, 개인주의적인 인본주의의 풍토가 교회에 침투하면서, 우리는 교회라는 근본적인 복수의 개념과 구원을 연결하는 고리를 잃어가고 있다. 점진적 성화에 대한 교회의 지속적인 강조와 지원의 부족으로, 위치적 성화(positional sanctification)만이 두드러지게 강조되고, 이는 “개인적 구원의 확신”에 대한 지나친 강조로 이어졌음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다. 많은 뜻있는 미국의 지도자들은 자기존중(self-esteem)교육이 미국의 교육과 장래를 망쳐놓았다고 한탄한다. 교회의 지나친 개인적 구원의 확신 교육은 교회에 해가 될 수 있다는 유사성을 우리는 부정하기 힘들다. 패스트푸드식의 가르침으로 초래될 수 있는 개인의 영적 비대현상은, 육체적 비대가 생명을 위협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교회의 활동력에 영향을 미치고, 또 개인의 영원한 생명에 위협을 미칠 수 있다. 우리는 이 짧은 기도문의 전반에 있는 복수의 개념을 중요시해야된다.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의 왕국, 일용할 양식, 죄의 용서, 유혹, 하나님의 권세, 하나님의 영광, 이 모든 주제들이 “우리”라는 복수의 개념위에 수립되어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정서를 이유로 들어 “당신”이라는 2인칭 대명사를 쓰지 않은 것에 대하여, 우리는 교회에서 하나님께 대해서 이 호칭을 대표기도에서도 사용하며, 우리의 어른들도 손윗 어른들에 대해서 존경의 의미로 이 호칭을 사용하는 것을 본다. 단 어떤 지방에서만, 매우 냉철하게 격하적인 2인칭 대명사로, 특히 싸울 때 사용될지 모른다. 유태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감히 입에 올리는 것 조차 불경하게 생각해서, 수 백년동안 하나님의 이름을 발음하지 않았고, 그래서 그의 이름을 우리는 어떻게 발음해야할지를 모른다. 그래서 영어성경들은 모두 하나님의 이름의 자음들의 자리를 “주(LORD)"로 쓴다. 그러나 한글 성경과 한국 교회는, 분명치 않은 추정된 하나님의 이름을 성경과 설교에서 광범위하게 사용한다. 그러한 교회에서 이 2인칭 대명사의 사용을 피하려하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
같은 의미의 어휘인 debts와 debtors를 하나는 “잘못”으로 다른 하나는 “죄”로 번역한 것은 온당치 않다. 왜냐하면 성경번역에 있어서 어휘의 일관성(一貫性)은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아래에 언급한 죄의 회계학적(會計學的) 개념과 영어성경에 사용된 거의 열 개에 가까운 “죄”의 유사어들을 고려할 때, 이러한 번역은 어휘에 대한 일관성 및 그 원의(原義)를 반영하지 못한 번역이고, 결국 용어색인(concordance)을 외면한 번역이 된다. 그 열 개에 가까운 죄의 유사어휘들을 한글 성경은 거의 모두 그저 “죄”라고 번역했다. 영어 성경에 쓰인 죄와 관련된 어휘들 중, “잘못”이라는 의미와 가까운 어휘는 “wrong"이나 ”err"가 있을 것이나, 주기도문에 쓰인 “debts”는 좀더 포괄적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번역되는 것이 마땅하다. 영어 성경에서 sin이 포괄적인 “죄”의 의미를 가지듯이, debts 역시 인간이 인간에게 범하는 포괄적 의미의 “죄”이다. 어휘의 일관성의 유지는 매우 중요하다. 예를들어, 영어의 "faithrul"이라는 어휘는 성경에서 매우 중요한 기둥이 되는 어휘중의 하나이다. 이는 하나님의 성품에 속하고, 또 그는 우리에게도 성실할(faithrul) 것을 요구하신다. 많은 미국교회의 성도들은 성경 용어색인(Condordance) 책을 보고 이 어휘가 사용된 구절들을 찾아 성경을 공부한다. 그런데 우리 개역성경은 이 어휘를 “성실한, 신실한, 충성된, 혹은 미쁘시다”는 무슨 말인지 모를 다양한 어휘들로 번역했다. 이 어휘의 기초적인 의미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신 언약에 대해서 성실하시다는 의미에서 출발된다. “약속 혹은 언약에 대한 성실성(誠實性)“이 기초적 의미이다. 그러나 우리는 도무지 이 중요한 어휘의 의미를 한글 성경을 통해서 전혀 깨달을 수 없도록 산만하다. 어휘의 일관성은 매우 중요하다. 만일 짧은 이 기도문에서 조차 어휘의 일관성을 유지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떻게 성경공부에 필수인 한글성경 용어색인을 만들 수 있을 것인가?
<계속>
LA 동서성서학회(회장 김영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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