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학자들에 의하면 모든 나무에는, 나이테라는 것이 있다고 합니다. 나무를 절단해 보면 그 나무가 성장하기까지의 모든 과정을 나이테 안에 자료로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나타난 나이테는 아주 가물었을때 나타난 표시이고 여기에 나타난 나이테는 번개를 맞았을때 나타난 나이테고 여기에 나타난 나이테는 아주 비가 많이 왔을때 나타난 나이테고 여기에 나타난 나이테는 병충해가 심할때 나타난 나이테고 여기에 나타난 나이테는 불아 났을때 나타난 나이테라는 것입니다.'

한 나무의 상처의 질곡들은 대부분 나무의 외형에 나타나 있지 않고 나무의 가장 깊은 심층부에 흔적으로 남게 됩니다.

우리 인생도 다르지 않습니다. 외형으로야 온갖 위선과 포장으로 가면쓴 희극배우처럼 살아가지만 살포시 가슴을 헤집어 보면 굵직한 상처와 질펀한 응어리들이 나이테 되어 나만의 자서전으로 남게 됩니다.

어떤 것은 버림받고 거절당한 나이테로
어떤 것은 억울하게 오해당한 나이테로
어떤 것은 병되도록 참아야 했던 억누른 감정의 나이테로
어떤 것은 극심한 외로움과 열등감의 나이테로
어떤 것은 무시당함과 외면당함의 나이테로
어떤 것은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한 한과 부러움의 나이테로 우리의 걸음마다 자욱마다, 피되어 흐르고 눈물되어 강을 이룹니다.

때로는 무성한 잎과 탐스런 열매로 나를 과시하고 덮으려 하지만 무성한 잎과 탐스런 열매속에 깊게 후벼패인 상처의 나이테는 가려 지지 않습니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불쑥 불쑥 출몰하는 게릴라처럼여기 저기서 우리를 어둠과 무기력의 늪으로 빠져 들게 합니다.

축제같은 예배로 하나나님의 만지심을 경험하지만, 나도 모르게 상처들이 떠오를 때면 순식간에 불랙홀과 같은 어둠에 포로되어 조종당하게 됩니다.

눈물과 춤으로 은혜에 잠겨 저 높이 비상하다가도 번개 맞았던 억울한 분노의 나이테가 움직이면 금방 받은 은혜는 간곳 없고 혼란과 무기력의 나락으로 추락하곤 합니다.

이와같이 처리되지 못하고 회복되지 못한 과거의 쓴뿌리와 상처들이 한과 억누른 분노되어 나를 타인으로 살게 합니다.

그 무엇으로 풀어 보려 할수록 갈증의 수렁에서 헤어나지 못합니다. 작은 종기 하나가 온몸을 힘들게 하듯이, 잊혀진 듯한 작은 쓴뿌리 하나가 고개들기 시작하면 삶 전체가 송두리채 부서진 파도 되어 나를 후려치곤 합니다.

상처로 하루를 열고 쓴뿌리로 하루를 엮어가고 어둠으로 하루를 접어야 함에 차마 한숨도 멎습니다.

회복된 줄 알았고 해결된 줄 알았고 처리된 줄 았았습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습니다. 잊혀진 것이었습니다. 가라앉은 것뿐이었습니다. 날이 갈수록 쓴뿌리의 잔가지는 더 무성하여 삶의 구석 구석을 결박으로 얽어 맵니다.

상처의 나이테는 어둠으로 포장되어 시도 때도 없이 우리를 하나님께로 나아가지 못하게 하며 과거속에 오늘을 살게 하며, 다가오지 않은 미래를 염려하게 만듭니다.

받은 은혜 쏟게 하는 중심에는 어둠의 늪이 있음을 압니다.평안함을 불안함으로 전환되게 하는 주범도 쓴뿌리인듯 합니다.

물은 흐르지 않으면 웅덩이가 되고,
생각은 흐르지 않으면 고민이 되고,
피는 흐르지 않으면 고름이 되듯,
상처가 흐르지 않으면 응어리가 되어, 천년을 하루같이 발목을 잡히게 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은 물댄동산 인데 회복되지 않은 상처는 웅덩이 되어 터진 샘이 되게 합니다. 작은 여우 한마리가 포도원을 짓밟듯이 작은 상처를 그대로 방치하면 그 상처는 응어리 되고 응어리를 그대로 놔두면 응어리는 한이 되어 내 삶의 포도원을 엉클어지게 합니다.

포도원을 무너뜨리는 것이 작은 여우 한 마리듯이 내 삶을 망가지게 하는 것은 외부에 있지 아니하고 심층에 있는 상처와 쓴뿌리입니다.

어쩌면 상처로 인한 어둠과 쓴뿌리는 고침 받아야 하고 고쳐 질수 있는 질병중에 하나 일지도 모릅니다. 상처는 회복되고 왼치될수 있는 영적질병의 일종입니다.

날씨가 추워지면 감기에 걸리듯이
우리의 영적 면역력이 떨어지면
내면에 잠복해 있던 쓴뿌리의 바이러스들이 고개들어
우리를 어둠속에 갇히게 하여 무력하게 만드는 것이죠.

이러므로 나를 나되지 못하게 하고, 과거속에 오늘을 살게 하고, 인격 장애와 인격 파괴를 일으키는 실체는 바로 내 안에 묶은 쓴뿌리 입니다.

기질때문이라고 변명하지 마십시요.
성격때문이라고 합리화시키려 마십시요.
어쩔수 없었다고 핑계대지 마십시요

우리안에 쓴뿌리와 상처를 그대로 방치하거나 묻어두면 쓴뿌리는 언젠가 쓴 열매 되어 나를 그늘지게 할수 있습니다.

예배후에도 그늘지고, 기도후에도 수심으로 가득하고, 말씀을 들어도 늘 지치고 곤하게 한다면 그 중심에는 어둠이 있거나 쓴뿌리가 운동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러므로 쓴뿌리를 운명으로 받아들이지 마십시요.
쓴뿌리를 유전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요.
쓴뿌리를 불치의 병으로 단정하지 마십시요.
쓴뿌리를 인정하고 자각하셔야 합니다.
환자가 자신의 병을 모르거나 숨긴다면 병을 더 키우게 되지요.

쓴뿌리와 싸움이 있을때 마다 요셉의 영성을 품으세요. 청춘을 망치게한(?) 형들에 대한 억울함과 분노를 하나님의 역사관으로, 해석함으로 형들을 끌어 앉고 대성통곡했던 요셉의 영성을 구하십시요.

쓴뿌리와 상처들이 고개들 때마다 갈보리 언덕으로 달려 가십시요. 그리고 나의 쓴뿌리와 상처들을 짊어 지시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주님께 낱낱이 토설하고 오픈하십시요. 한두번에 되지 않습니다. 백번 천번 만번 반복하셔야 합니다. 은밀한 상처까지도 그분은 아시고 들으시고 품으실 준비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가능한 부분이라면 신실한 지체들과 나누십시요.
드러내고 자각해야 치유될수 있습니다.
지금 당신의 모난 성품, 황무한 영성, 고갈된 심령,
부정적 자아, 공격적 언어, 냉소적 반응....
묵은 마음밭의 이면에는 상처난 과거의 실상과
쓴뿌리의 흔적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시는가요?

아이들은 배고프면 보챕니다. 성도가 보채는 이유도 대부분 심령의 쓴뿌리 때문임을 알수 있습니다. 손등에 가시가 박혀 있으면 무얼 소유해도, 무엇을 이루어도, 무슨 일을 만나도 짜증납니다.

그러나, 가시를 뽑아내면 못 먹어도 배부르고, 달려가도 피곤치 않습니다. 상처와 쓴뿌리도 이와 같습니다. 뽑아 내야 합니다. 제거 해야 합니다. 회복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안에 충만히 임하고, 은혜를 누리고, 생명이 자라기 위하여, 우리의 복병인 쓴뿌리와 상처를 해결해야만 합니다.

그래야 세워질 수 있습니다.자유할 수 있습니다. 사명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남 살릴 수 있습니다.

빗방울에 바위 패이고 가랑비에 옷젖는 다고 했습니다. 가랑비의 은혜를 받아야만 합니다. 빗방울의 은혜 말입니다. 상처보다 더 큰 은혜, 쓴 뿌리보다 더 많은 은혜만이 우리를 상처와 쓴뿌리에서 자유케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시급하고 중요한 것은, 더 큰 은혜가 아닙니다. 더 큰 헌신이 아닙니다. 더 큰 축복이 아닙니다.더 많은 일이 아닙니다. 쓴뿌리를 제거하는 일입니다. 상처를 아물게 하는 일입니다. 어둠을 몰아내는 일입니다.내가 온전히 세워 지는 것입니다.

상처로 일하면 오히려 상처를 입힙니다.
어둠으로 축복받으면 교만에 빠집니다.
쓴뿌리로 일하면 나중에 버림 받습니다.
선착장에 배를 묶어 두고는 항해가 불가능합니다.

마찬가지로 쓴뿌리를 그대로 두고는, 믿음의 항해가 불가능합니다. 아무리 날개짓을 해도 새가 날지 못하는 이유는, 새장에 갇혔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와 복음을 위하여 비상하지 못하는 이유는 똑똑하지 못해서가 아닙니다. 능력이 부족해서도 아닙니다. 쓴뿌리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성장을 못하는 이유도, 상처와 한에 묶여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와있는 하나님의 나라가 사사건건 어둠과 상처로 인하여 축소되고 제한된다면 이 또한 얼마나 가슴 저릴 일 입니까?

이제 상처로 인한 어두운 나이테를 은혜로 말미암은 영광의 나이테로 바꾸어 나갑시다. 은혜는 흘러야 하고 생명은 자라야만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상처를 아물게 하고 쓴뿌리를 제거해야 하는 거룩한 댓가를 치루어야 합니다.

가나안은 그냥 정복되는 것이 아닙니다.
일곱 족속과 싸워 몰아 내야 가능한 일입니다.
마찬가지로 상처는 그냥 아물거나 회복되지 않습니다.
거룩한 싸움을 하셔야 합니다.
상처의 회복과 쓴뿌리의 제거를 위하여
싸움의 흔적, 침노의 흔적을 소유해야 합니다.
그래야 상처는 영광으로 승화될수 있는 것입니다.

마르지 않는샘 그것은 밖에서 흘러 들어 오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솟아 나는 샘입니다. 상처가 아문 자리에서, 쓴뿌리가 제거된 그 현장에서 말이죠.

퍼내도 마르지 않는 물댄 동산 같이.
주님이 격려하시기를 기대합니다.
주님의 옆구리에 나신 상처 안으로 들어 오십시요.
피묻은 어깨밑으로 숨으세요. 그리고 안심하십시요.
모두 잘 될 것입니다. 아멘

이응주 선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