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가장 풍성하고 깊은 신앙의 뿌리를 가지고 수많은 선교사들을 길러냈으나 지금은 외면되고 잊혀 가고 있는 하나님의 역사의 현장인 Northfield를 회복하자는 운동이 한인 목사들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다.

대한민국 복음화의 '축복의 통로'가 되었고 무디의 세계 선교(SVM: 학생자원운동)의 열정과 비전이 아직도 생생히 살아 있는 그의 고향 Northfield로 되돌아가자는 부흥 운동인 'Back to Northfield'는 SVM의 최대 수혜자가 되었고 이곳에서 파송된 선교사들의 복음과 헌신적 사랑에 빚진 자 된 한국 교계가 120년이 지난 오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있는 미국의 가장 풍성하고 깊은 기독교 및 세계 선교의 역사 현장인 Northfield를 보존하고 세계선교의 유산을 'Again SVM'으로 승화시켜 다시 한 번 세계 복음화의 부흥을 일으키자는 운동이다.

이는 작년 10월, 무디가 태어나고 꿈을 실현하였을 뿐 아니라 그가 묻힌 Northfield campus에서 개최된 '세계선교 학생자원운동(the Student Volunteer Movement for Foreign Missions)' 120 주년을 겸한 ‘어깨동무사역원’(대표: 이승종 목사) 의 '예수학당 2006 Northfield Conference'를 통해 전개됐다.

이승종 목사(센디에고 예수마을 교회)가 우리나라에 있어 ‘축복의 통로’가 되었던 Northfield를 ‘최대의 수혜자’ 된 한국교계가 되살릴 것을 제안하며, 'Back to Northfield'라는 Northfield 부흥 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Back to Northfield'운동을 전개하는 관계자는 "무디의 Northfield와 SVM은 우리의 현실과 감각에 와 닿지 않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아니다. 한 세기 정도 밖에 되지 않아 살아 숨 쉬는 듯한 생생한 흔적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영향력이 오늘날까지 우리에게 미치고 있는 오늘의 이야기다. 바로 우리의 할아버지 할머니가 이곳 Northfield 사경회에서 배출된 선교사들을 만나서 예수를 믿게 된 이야기다"며 "Northfield의 부흥은 한국 교계의 영적 Power를 발산하는 돌파구요 선교대국 한국의 전진기지가 될 것이다. 또한 이곳에 명실상부한 세계선교 복합단지를 건설하는 세계선교 역사상 기념비적 현장에 우리가 앞장서는 것이야 말로 이 시대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거룩한 부담이요, 우리가 받은 축복을 ‘온 민족과 열방과 족속과 방언’으로 확대 재생산하는 Global Christian으로서 역사적 사명에 동참하는 것이다"고 'Back to Northfield' 운동의 적극적인 참여를 당부했다.

“Back to Northfield”는 1) 미국 최대의 선교/기독교 역사지 복원 및 보존 2)평양대부흥 100 주년을 맞이하여 SVM 부흥을 통한 한국교계의 세계선교사적 섭리적 사명에 순종 3) Moody 의 설립이념에 따른 학교의 재건 4) 세계선교 종합단지 구축 (세계선교박물관, 선교사 명예의 전당, 세계 선교수양관 및 은퇴 정착촌 건립 등) 을 목표로 하고 있다.

한편, 지난 10월 1일부터 4일까지 40명의 한국목회자, 학자, 대학원생이 참가해 무디 생가 및 학교의 Hibbard Hall에서 '제 2 회 Back to Northfield Conference'를 진행했다. 이들은 1) Northfield 와 D.L. Moody 그리고 SVM의 역사적 가치에 대한 재조명 2) 이러한 가치를 현재의 교회와 기독교인의 사명에 어떻게 접목시킬 수 있는가? 3)Northfield와 Moody 영성이 어떻게 현대 기독교인의 열정을 획득하여 설득력 있게 Back to Northfield 사역에 참여토록 할 것인가? 등의 주제로 사역의 비전을 공유하는 시간을 가졌다.

특별자문단으로는
△방지일 목사: 한국교회의 산증인, 마포삼열 선교사의 평양장로회 신학교 마지막 학생, 중국 산동성 선교사, 평양 장대현교회 전도사 시무 길선주 목사 보필. 영등포교회 담임목사 (은퇴)
△Samuel H Moffett 박사:프린스톤신학교 석좌교수. 평양대부흥의 본산지인 장대현교회와 세계 최대선교부 미국 북장로 평양선교부를 개척하였고 한국최초 신학교 및 숭실대학교 등 수많은 학교를 설립한 마포삼열(Samuel A Moffett)의 삼남으로 평양에서 태어나 Princeton, Yale에서 공부(박사) 하고 그 자신 중국 및 한국 선교사로 헌신(장로교 신학교에서 학장 역임)하고 현재 Princeton신학대학원 석좌교수(은퇴)로 세계선교관련 집필로 여생을 보내고 있다. 그는 우리나라 초대 선교사의 자녀중 유일하게 생존(향년 92세) 하고 있는 우리나라 선교의 산증인이기도 하다.
△Jack Voelkel 박사: 소안론 (W.L. Swallen) 선교사 손자, 한경직 목사와 Princeton신학교 동창으로 영락교회 협동목사/거제도 포로수용소 사역/숭실대교수 옥호열 (Harold Voelkel) 선교사 아들(평양 태생)로 한국의 선교사들인 어머니, 숙모 및 삼촌 모두가 Northfield학교에서 수학하였고 그 자신 3세대 SVM선교사로 남미 콜롬비아 선교사로 헌신하고 현재 Urbanan Inter-Varsity 본부 선교사로 재직하며 "Ask Jack" 칼럼을 기고하며 후배 선교사, 선교사 지망생들에게 조언해 주고 있다. 그의 자녀들도 4세대 선교사로 헌신
△Richard Dickinson 목사:Northfield Mt. Hermon 학교 기독교동문회장
△정주영 변호사:Frank H. Hiscock Legal Aid Society 등이 활동하고 있다.

또한 이사회 조직은 다음과 같다.
△이사장 이승종목사:센디에고 예수마을 교회/어깨동무사역원,CA
△상임이사 지용주목사:시라큐스 연합장로교회, NY
△이사 (재정) 고승희목사:아름다운교회, CA
△이사 (교육) 권오승박사:DIA 대학교 부총장, Los Angeles, CA
△이사 (기도) 박덕호목사:열방교회, Cambridge, MA
△이사 (한국) 윤은성목사:한국 어깨동무사역원
△이사 (여성) 이성자목사:Int'l Calvary Church, VA
△이사 (차세대)이성호목사:Kansas Mission Church, MO
△이사 (목회) 주성철목사:한인기독교회, Denver, CO
△사무총장 하정태선교사:The American Baptist Church of Massachusetts
KOSMA(KOrean Student Movement in America)

*드와이트 레이먼 무디(Dwight Lyman Moody:1837-1899)와 노스필드

19세기 최고의 복음 전도자 '드와이트 무디'는 미국 남북 전쟁 이전의 찰스 피니와 1950년 이후의 빌리 그레이엄에 비길 수 있는 미국의 대표적인 복음 전도자다.

그는 1837년 2월 5일 매사추세츠(Massachusetts)주 외딴 농가 노스필드(North Field)에서 석공이자 청교도였던 에드윈 무디(Edwin Moody)와 벳시 홀튼 (Betsy Holton) 사이에서 여섯 번째 자녀로 태어났다.

그는 4살이 되던 해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돌아가심으로 어머니와 8명의 아이들은 아주 가난하게 성장했다. 어머니 벳시의 근면과 남은 가족의 단합, 그 지방의 유니테니언 교파의 도움으로 가족들은 흩어짐을 면할 수 있었지만 가난으로 무디는 초등교육밖에 받지 못했다. 그는 어머니의 청교도 신앙 아래서 옳다 생각하는 일에 모든 일에 열심히 노력하며 바칠 수 있는 열정과 자신감 그리고 탄탄한 체구에 야심 있고 재미있는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어렵고 힘들게 자라온 농촌에 회의를 느껴 17살이 되던 해 보스턴에서 직장을 구하고자 집을 떠난다. 보스턴에서 취직은 생각만큼 빨리 되지 않았다. 구두 소매점을 경영하던 외삼촌 사무엘 홀턴(Samuel Holton)과의 만남으로 무디는 구두 세일즈를 시작하게 된다. 독실한 신자였던 삼촌의 요구조건은 매 주마다 주일학교와 교회에 나가는 것이었다. 그는 일 때문에 마지못해 주일학교에 등록했다. 교회는 다녔지만 신앙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던 그가 18세 때에 주일학교 교사 에드워드 킴볼(Edward Kimball)을 만나며, 습관적이며 형식적인 신앙생활에 젖어 있던 무디는 회개의 눈물을 흘리며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받아들였다.

시카고로 이주하여 제화점에 취직한 그는 이러한 성격과 직업의식으로 일약 백반장자가 됐으며, 그는 곧 시카고의 빈민가에 사는 거친 소년들과 소녀들을 대상으로 하는 기독교 사역에 심혈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부족한 교육에도 불구하고 그는 성경을 살아있는 말씀으로 증거하는 값진 은사를 발전시켰다. 불신영혼을 구원하려는 무디의 열망은 너무도 강했으며 무보수로 어린이들을 위한 선교와 YMCA를 운영하기 위하여 자신의 사업을 포기하기도 하였다.

그는 복음성가와 독창곡으로 인한 방대한 매출을 노스필드의 여러 학교와 선교를 위해 모두 헌금했으며, 1886년에는 시카고에 무디 성경학교를 설립하여 직업 기독교 사역자와 선교를 위한 헌신자들을 훈련시켰다.

무디는 단순히 그의 이름을 D. L. 무디라고 서명하고 결코 목사안수를 받지 않았다. 그는 단지 평범한 무디, 혹은 부흥사 무디로 불리길 원했다. 그는 또한 학생자원 단체와 해외 선교를 위한 끊임없는 독려를 통해 기독교 확장에 큰 영향을 주었다.

*무디의 Northfield Mt. Hermon학교의 설립 기반

무디가 15년간 시카고에서의 주일학교, YMCA를 통한 청소년 사역을 마치고 처음으로 영연방국가의 성공적인 부흥집회(1873-5)를 통해 유럽에서 명성을 얻고, 그의 나이 38세에 고향 Northfield로 금의환향한다. 그의 생가 바로 아래에 큰 집과 땅을 구입하여 본격적인 Northfield에서의 사역을 시작하게 된다. 또한 바로 1879년에는 이 집과 부지에서 Northfield 학교가 설립됐다.

무디는 생가 바로 밑에 구입한 집에서 24년간 사역하며 세계적인 Northfield 사경회를 통해 세계 선교의 역사가 일어나게 했다. 집은 무디가 눈을 감은 뒤 차남 Paul Moody가 거주하였고, 나중에는 학교에서 입학처(Admission Office)로 사용하였다가 지금은 폐쇄됐다.

한편 1881년에는 또 다른 무디 부흥의 회심자인 코네티컷주 뉴 헤이븐 시계회사 사장 Hiram camp가 헌금한 $25,000로 Northfield학교 앞 강 건너에 Mt. Hermon 남자학교를 설립했다. 무디가 최초 학교를 설립할 때의 목표는‘ Gap-men’ (에스겔 22:30)을 양성하여 비록 ‘직업적 목회자나 선교사가 아니지만 각자가 속한 가정과 직장과 사회에서 성경을 가르치고, YMCA 일꾼이 되고, 주일학교 선생님이 되고, 도시의 전도사들이 되어서’ 이 세상을 변화 시키는 역군이 되는 ‘신실한 기독교인'을 양성하는 것이었다. 또한 대학교가‘인생의 필수 요소’가 되므로 학교를 통해서 대학교 입학을 예비하는 교육을 시키고자 한 것이었다.

이렇게 무디가 세운 Northfield학교의 기초는 성경의 말씀을 기반한 ‘신실한 기독교인'을 양성하여 대학에 보냄으로써 장차 ‘세상의 축복’이 되는 학교가 되기를 소원하였으며, 실제로 이 학교를 통해서 수많은 인재와 목회자와 선교사들이 배출돼 그의 기도대로‘뭇 영혼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여 복음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축복의 통로’가 됐다.

이 학교를 통해 순교자들을 포함한 200여명(1930년대까지)의 선교사가 배출되어 이중 20여명이 한국에 헌신하였다. 또한 전문 사역자 훈련과 선교사 양성을 위해 1889년 Chicago에 설립된 무디성경학교를 통해 무려 7,500 여명의 선교사를 배출하는 세계 최대의‘축복의 통로’가 되었다.

*세계선교를 위한 학생자원운동(SVM, the Student Volunteer Movement for Foreign Missions)

1879년 Northfield Mt. Hermon 학교를 설립한 뒤 그의 집에서 '기도에의 부름(Convocation for Prayer)'이라는 제목으로 350여명의 영연방 및 미국 각 지역을 대표하는 기독교 지도자들이 모여서 처음으로 대규모 사경회(1880.9.1-10) 가 개최됐다.

이듬해 8월 한 달 동안 900여명이 모인 두 번째 사경회에서는 '오순절 성령 강림의 권능을 체험'하며 모든 참가자들이 큰 영적 감흥으로 충만케 됐다.

-Cambridge Seven (1882):

무디의 캠브리지 대학 부흥집회에서 명문가문 출신이며 크리켓 및 조정 선수·주장들인 대학 지도자급 학생들 7명이 성령으로 감화 받아 선교사로 자원하게 된다. 이것이 세계 초유의 대학생들에 의한 선교자원 운동의 시발점이다. 이들은 졸업 후 영국 대학을 순회하며 대학생들에게 세계 복음화의 대열에 참여할 것을 호소하고 모두 중국행 배를 타고 선교지로 향한다(1885.2.5).

이들은 모두 허드슨 테일러(J Hudson Taylor)의 중국내지선교회(OMF의 전신 CIM)의 주력군으로서 중국선교의 선봉이 되었으며 7명중 D.E. Hoste는 허드슨 테일러에 이어 '내지 선교회’를 이끌어 가는 수장이 됐다. 또 다른 한 명인 C.T. Studd는 중국 및 인도 그리고 아프리카에서 선교사로 헌신하며 WEC International이라는 세계적인 선교 기관을 설립하게 된다. Studd형이자 캠브리지 대학 크리켓주장이며 대학 내 무디 선교회를 조직한 JEK Studd(나중에 런던 시장)가 1885년 무디의 초청으로 미국으로와 Ivy대학을 순회하며 세계선교의 부름에 나설 것을 호소한다. 이때 John Mott는 코넬대를 방문한 그에게 강한 영향을 받았으며 그를 면담하고서 하나님이 주신 분명한 인생의 소명을 가지게 되었다.

-Northfield 세계선교헌장 (Appeal to Disciples Everywhere) 제정(1885):

제3회 Northfield 사경회에서 A.T. Pierson이 설교도중 즉흥적으로 세계선교헌장 제정을 촉구한다. 이 헌장에서 “4억 명의 일반 기독교인중 10만 명 (0.025%)의 헌신된 기독교인 한 명이 조직적인 노력을 통해서 100명의 비기독교인에게 15년 동안(1885-1900) 에 걸쳐 복음을 전한다면 1900년에 이르러서 전 세계가 복음화 될 것이다” 라는 야심찬 세계 복음화 계획이었다. 이것이 바로 다음해인 1886년 이곳 사경회에서 탄생되는 SVM 의 표어인 '우리세대에 세계의 복음화를(World Evangelization in Our Generation)'의 기초가 된다. 놀라운 것은 SVM기간(1886-1940) 동안 미국 및 캐나다를 비롯한 영국, 호주 등 유럽까지 합세하여 실제로 10만의 전세계대학생들이 선교사로 헌신한 것이다.

-1886년 사경회 및 Mt. Hermon 100 탄생:

무디는 캠브리지, 옥스포드, 프린스톤, 예일, 다트 머쓰 대학 등을 순회하여 부흥집회를 하면서 미국 대학에서의 Cambridge Seven과 같은 대학생 선교운동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이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JEK Studd는 무디의 초청으로 미국 대학을 순회하면서 대학생들의 세계선교헌장에의 참여를 촉구했다.

한편 무디는 1886년 봄 조지아주 부흥집회 기간 중 그의 사역의 핵심 단체였던 YMCA의 보스턴 지역 대학 YMCA 간사 들인 Luther Wishard와 Charles Ober에게 각 대학 YMCA 및 기독교 학생단체 대표들을 초청해서 이번 Northfield 사경회는 무디가 설립한 남자학교인 Mt. Hermon학교에서 개최키로 하고 이들 학생단체에 “무디의 지도하에 한 달간 성경공부 사경회에 참여 (Northfield College Summer Bible Conference) ”할 것을 호소하는 초청장을 보내게 된다.

이에 미국 및 캐나다의 89개 대학에서 251명의 대학생 대표들이 초대되어 Mt Hermon 학교에서 7/6-8/2일까지 '대학YMCA 여름성경학교'라는 이름으로 모이게 되었다. 유명한 부흥강사 A.T. Pierson의 세계선교에 대한 강한 설교, 중국 선교지에 안식년으로 돌아온 초대 받지 않은 강사 William Ashmore는 ‘우리는 가야 한다 모든 곳으로 가야 한다(‘All should go, go to all”)'라는 유명한 설교를 통해 참가 대학생들의 피 끓는 가슴을 뒤흔들어 놓았다.

Princeton대학의 대표 Robert Wilder는 (Andover신학교 Brethren 후예로 인도에 간 선교사 Royal Wilder 아들로 인도서 태어나 아버지와 같이 'Missionary Review of the World를 창간하고 SVM Pledge의 기초가 되는 Princeton Pledge 제작)가 주도한 "Ten Nations Meeting"을 통하여 사경회 마지막 날 100명의 대학생들이 선교사가 되기로 헌신하는데 이들이 바로 SVM의 시작이 되는 Mt. Hermon 100이며 이중에 24명이 무디의 Mt. Hermon학교 출신이다.

-이어지는 Northfield 세계 대학생 사경회와 SVM의 기구화(1888)

‘Mt Hermon 100’이 탄생한 다음날 ”Northfield에서의 세계선교의 태동”을 알리기 위한 미국 및 캐나다 지역의 대학들을 순방하기 위한 자원자 대표사절단을 구성하였다. 이는 DL Moody가 영국의 Cambridge 대학에서의 1884년 부흥집회 (Campaign)로 말미암아 탄생한 Cambridge Seven이 영국 및 미국의 대학들 순방하며 대학생들의 세계 선교에 자원에 영향을 준 것을 모델로 하였다.

최초에 Robert Wilder와 Princeton대학 동료였고 막 뉴욕에 있는 Union Seminary 에서 공부를 시작한 John N. Forman과 함께 1886-1887 학기동안 162개의 미국 및 캐나다 대학을 돌아다니면서 2, 016명(여학생 500명 포함) 의 대학생들의 선교사 자원을 위한 지원서를 받아낸다. 이들이 첫해에 여행을 하면서 모집한 선교헌신자중에 아주 중요한 사람들이 있다. 나중에 회교도 선교의 선구자가 되었던Samuel Zwemmer , SVM 수석 총무, 미국장로교단 선교부 총무 등을 역임한 Robert Speer (Princeton), 초기 SVM 출신 선교사로 우리나라에 온 Samuel Moffett,William Baird, Graham Lee 등이 McCormick 신학생의 조선선교의 물꼬를 텄고, 조선선교 초기 많은 공헌을 한Canada 출신 4인방인 평양 대부흥의 불꽃 RA Hardie, 세브란스 병원 설립?O.R. Avision, 최초의 SVM 선교사 James S Gale, 한국 침례교의 선구자 Malcolm Fenwick등이 John Forman 이 Toronto 대학에 왔을 때 선교헌신 서명서에 지원하게 되고, 또한 평양서 의료 선교 기간 동안 순교한 Dr. William James Hall 도 John Foreman이 Queens 대학에 왔을 때 서명을 하는 등, 세계 선교 및 우리나라 선교의 중요한 선교사들을 첫해에 모집하는 등 첫해부터 대단한 성과를 거두게 된다.

제2회 Northfield 대학생 사경회(1887)에서는 “교회에게 호소함” (Appeal to the Churches) 이란 주제로 모였다. 전년도에 결성된 Mount Hermon 100의 학생들의 이름으로 선교 기관과 교회들에게 “첫 번째로 가장 중요한 주님의 명령: 해외 선교 사역지의 증가; 지역교회의 해외 선교에 대한 즉각적인 영향” 이라는 제목으로 편지를 보내며 세계 선교에 대한 각성과 동참을 호소하게 된다. 이때부터 미국, 캐나다 뿐 아니라 England, Ireland, Scotland를 비롯한 유럽의 대학생 대표들도 참가했다.

이 대회에 오하이오 장로교대학인 Wooster 대학의 대표 William Swallen (소안론), 캐나다 온타리오주 Queens University 의과대학 대표 William J Hall 등 앞으로 조선에 선교사로 오게 될 SVM 학생 대표들이 참여했다.

제3회 Northfield 대학생 사경회(1888)에서 John Mott, Robert Wilder, Robert Speer등 50여명의 지도자급 선교 자원자들이 모여서 조직과 선교 방향등의 계획을 세우고 정식으로 the Student Volunteer Movement for Foreign Missions(SVM FM)이라는 단체를 설립하고 구호로 "the evangelization of the world in this generation" 를 채택해 SVM을 조직적이고 효과적으로 운영하기 시작한다. 회장단 (Executive Committee) 에 대학 YMCA를 대표하는 John Mott(Cornell Univ.), 대학 YWCA 대표에 Nettie Dunn, 캐나다 대학 선교연합회 및 미국 신학교 선교협의회 대표에 Robert Wilder, Robert Speer는 대학을 순회하며 선교 자원자를 선발하는 Travel Secretary, 총 연락간사로는 W.H. Hannum(나중에 Walter J Clark), 편집장 Max W Moorhead가 선정돼 SVM본부를 50 East 70th St. New York에 두고 1889년 1월부터 정식으로 업무를 시작했다.

또한 1887년 Northfield 사경회부터 참석하기 시작한 영국의 대학생대표들은 Students’ Volunteer Missionary Union in Great Britain 이란 유럽의 SVM을 조직하였고, 1891년 첫 유럽에서의 International Convention을 유치하였으며 SVM 리더 Robert Wilder의 영국 대학 순회 방문 등으로 SVM의 열기가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핀란드 등 Scandinavian 반도 국가는 물론 영국령인 호주에까지 파급효과가 미치게 된다.

-SVM International Convention (Urbana 선교대회의 효시)

“학생과 기독교 선교의 미래”라는 주제로 열렸던 제10회 SVM FM international Convention (Detriot, Michigan 1927.12.28-1928.1.1) Wesleyan College에 2학년으로 재학 중이던 김인덕(여)이 참여해 '한국에서의 위대한 발견'이라는 주제로 선교사들에 의한 한국 어린이와 여성에 대한 인권과 교육으로 인해 한국 여성들이 얼마나 바뀌고 있는가 그리고 본인이 독립운동으로 옥고를 치를 때 영접한 만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간증을 내용으로 연설하기도 했다.

캐나다 Toronto 대학에서 열린 마지막(13회) SVM International Convention을 끝으로 SVM은 소멸되고 말았다. 하지만 InterVarsity가 SVM의 세계선교대회를 계승하여 세계적인 선교학자 Christy Wilson (Gordn-Conwell신학원) 주도로 1946년 다시 Toronto 대학에서 151개 학교 575명의 학생들이 모인 가운데 Complete Christ's Commission.이라는 주제로 모였다. 당대의 복음주의자의 거장 Haold Ockenga목사(Fuller, Gorden-Conwell 학장, Boston Park Street Church 담임목사)가 강사가 참여했으며, 2년 뒤인 1948년에 Urbana에서 대회를 가진 뒤 매 3년마다 Urbana 세계선교대회를 통해 SVM의 전통을 잇고 있다.

*Northfield와 SVM이 대한민국 복음화에 미친 영향

-한국선교에 큰 기여를 한 맥윌리암
무디와 같은 해에 태어난 맥윌리암스(Daniel McWilliams)는 시카고 주일학교 집회에서 서로 만난 후 평생을 좋은 친구이자 후원자로 지냈다. 맨하탄 고가열차 재무담당이사이며 브루클린YMCA 설립자 겸 회장으로 선교사 언더우드의 형 John Underwood 장로와 같이 브루클린 소재 라파엣 (Lafayette Avenue) 장로교회 장로 및 PCUSA 세계선교 위원회 위원으로서 이 교회에서 언더우드 선교사를 조선에 파송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등 우리나라 선교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그는 1884년 PCUSA(미국장로교) 선교위원장 엘렌우드(F.Ellenwood)에게 조선 선교를 시작할 것을 제의하며 기금 $5,000 (오늘날 50만 불에 해당)을 기탁하여 우리나라의 최초 선교사 앨렌(Horace Allen)부부 및 초창기 선교사 입국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McWilliams 의 헌금으로 조선에 입국하는 최초 5인의 장로교 선교사
1. 1884.9.20: 의료선교사 엘렌(Horace N Allen)과 부인(Frances M Allen ) : 최초 선교사
2. 1885.4.5: 언더우드(H.G. Underwood) 선교사 : 새문안교회 및 연희전문학교 설립자
3. 1885.6.21: 조선서 최초로 순교한(1890.7.26) 선교사 헤론(John W Heron)과 부인 Hattie Gibson (남편 Heron이 순직후- 이로 인해 양화진 묘지의 최초로 묘소가 마련된- Hattie는 조선에 온 최초의 SVM 선교사 James Gale와 재혼)
4. 1886.7.4: Annie Ellers 선교사 : 정신여학교를 설립한 그녀는 선교사 D.A. Bunker 와 결혼
5. 1888.3.27: 의료 선교사 Lillias Horton: 언더우드 선교사와 결혼

-성공적인 SVM의 출발:
Northfield사경회로 'Mt Hermon 100'이 탄생한 첫해인 1886-1887 (그리고 1888-1889) 동안 프린스톤 대학의 위대한 선교사 겸 선교동원가 Robert Wilder와 John Forman 두 명의 SVM 순회 선교단이 미국 및 캐나다 대학 162개를 순방 2,106명(여학생 500명 포함)의 대학생 선교사 자원자를 확보할 때 모든 여행 경비를 지원했다. 이때 평양대부흥의 불씨 원산대부흥의 하디(RA Hardie), SVM 최초로 조선에 온 연동교회 게일(James Gale), 한국침례교의 선구자 펜윅(Malcolm Fenwick), 한국근대의학의 아버지/세브란스병원 설립자 어부신(O Avison) 한국최초 교회공동체 소래교회의 매견지(WJ McKenzie), 평양선교본부 개척시 순교한 의료선교사로 한국결핵 퇴치 선구자 셔우드 홀 선교사의 아버지이자 고대병원/이대병원의 설립공로자 로제타 홀 선교사 남편 제임스 홀(James Hall) 의료선교사 등 탁월한 캐나다 출신 선교사들이 모집 되어 조선으로 파송된다.

SVM 본부 집계에 의하면 1923년까지 한국에 총 404명의 SVM 출신 선교사들이 입국하였는데, 우리나라의 복음화·의료부문·학교교육 및 YMCA등을 통한 청소년 계도 및 농촌계몽 전반에 이들의 헌신과 노력은 교회성장 뿐만 아니라 사회전반적인 개혁과 발전이 이바지하였다.

-마포삼열 및 멕코믹신학교 출신 미국 장로교단 SVM 선교사들의 역할

마포삼열(Samuel A Moffett): SVM최초의 선교사중 한명으로 한국복음화의 선지자. 평양에 최초의 신학교 설립(1901)으로 길선주 등 7명의 초대 장로교 목사 양성. 장대현 교회 설립자(1893) 무디 후원자 미국백화점왕 와나메이커의 필라델피아 주일학교에서 착상 한국에 구역/권찰제도 도입

소안론(William Swallen): SVM대표(대학교 및 신학교)로 Northfield 사경회와 세계대회에 참석한 대표적 선교사. 안악장터의 깡패 김익두를 목사로 변화시킨 장본인, 평양선교부 개척의 공로자. 1905년 을사조약으로 희망을 잃은 우리민족에게 ‘하늘가는 밝은 길이’(찬송가 545장)을 작사하였고 성경 공과공부를 시작하였으며 보수 복음의 대부.

이길함 (Graham Lee): 평양대부흥 본산지 장대현교회 담임목사로 길선주 장로와 대부흥에 헌신. 한국최초의 교회양식인 "ㄱ"자형 건물양식을 장대현교회 도입 시공함.

배위량(William Baird): 최초의 대학 숭실대학, 개명대학 설립 및 초기 기독교지도자 양성의 탁월한 공로를 세웠으며 부산, 대구 선교부를 개척하여 처남 안의와가 대구 복음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방위량(William Blair): 소안론에게 모집되어 조선에 온 평양대부흥 당시의 장대현교회 목사로 당시의 상황을 "오순절 (Pentecost)성령 강림" 표현하였다. 한경직 목사의 미국유학을 주선하는 등 한국복음화의 많은 공헌을 하였다.

안의와(James.E. Adams): 매형 배위량이 개척한 대구선교지를 물려받아 대구 복음화의 선구자가 된 안의와는 대표적인 SVM선교사로 대학시절 Iowa, Indianan주 순회선교사로 임명되어 각 대학을 순회하며 선교사를 모집하였고 그 자신 SVM선교사로 파송되어 1894년 조선에 입국하였다. 1898년 그의 집에서 시작한 예배가 대구 제일교회의 창립으로 이어졌다.

이밖에 백정들 천민들과 더불어 승동교회 모삼열(SM Moore), 전주 복음화 개척자 최의덕(LB Tate 남장로교단), 승동교회 곽안련(C.A Clark), 기포드 (DL Gifford) 등이 대표적인 멕코믹출신 선교사들이다.

무디의 Northfield학교, 시카고 무디성경학교 및 YMCA 설립에 큰 재정적 후원자 Cyrus McCormick 이 바로 멕코믹신학교 설립과 평양의 장로교 신학교 증개축에도 많은 재정적 기여를 했다.

-한국에 온 대표적 Northfield 학교 출신 선교사
1)최초의 Northfield 선교사: Georgiana Whiting (Owen), MD 의료선교사:Amherst, MA 출신, Northfield학교졸업(1890), Rostta Hall선교사가 공부한 필라델피아 여자의과대학을 졸업하고 1895년 SVM선교사로 자원하여 조선에 입국해 광주지방 첫 순교자 C.C. Owen(한국명 오원- 의사겸 목사)선교사와 결혼했다.

Owen 선교사(유진벨 선교사와 같이 목포 및 광주 선교부 개척)는 순천지방 선교개척시 건강을 잃고 장흥지방에서 쓰러졌다. 이에 목포지역 Forsythe 의료선교사가 급히 호출을 받고, 광주로 옮겨진 Owen을 치료하러 오는 길에 말기 나병 환자를 만나, 말에서 내려 그녀를 말에 태우고 Owen이 개설한 광주진료소(현 광주기독병원)로 온다. 그러나 오원 선교사는 1907년의 평양대부흥이후 100만 구령운동이 한참이던 1909년 4월5일 순고했다.

Gorgiana선교사는 남편의 죽음을 애도할 틈도 없이 나환자인 그녀를 간호했으나 결국 그녀는 '미국 의료선교사가 말기 나환자를 말 안장에 앉혀 병원으로 실고 와서 치료해 주는지' 그 이유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았다는 것을 알고 영접하고는 2주후에 Owen의 야전침대에서 숨을 거뒀다.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 광주진료소의 WIlson 선교사와 선교부는 본격적인 나환자 치료를 위한 노력으로 한국 최초로 광주나병원(애양원 전신) 이 탄생하고 또한 이곳에서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의 순교까지 이어지는 "피 묻은 선교의 복음'이 진행된다.

Georgiana는 광주에서 낳은 3딸을 데리고 남편 사후에도 20여년을 계속해서 조선에 남아서 선교사역에 헌신했다.

2)Frank Marion Brockman: 한국 YMCA부흥운동의 선구자

1896년 Northfield Mt Hermon학교 졸업, 오하이오주립대 졸업하고 조선에 입국(1905) 했다.

1903년 황성기독교청년회 설립 준비를 위한 자문위원회를 구성할 때 세계적 YMCA 지도자인 형 Fletcher Brockman을 특별강사로 초대했다. 물론 Fletcher의 중국에서의 그의 경험 배우려고 초청하였지만, 위원회의 관심은 어느 계층의 기독교 청년을 주 대상으로 모집할 것인가 였다. 언더우드, 아펜젤러 등 선교사들은 양반 출신의 차세대 리더들을 중심으로 한국 YMCA를 창설하기로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그래서 초창기 YMCA는 이상재, 윤치호, 유성준(유길준 동생), 김정식, 신흥우 등 한성감옥서 이승만에게 전도 받은 독립협회 지도자들이 예수를 믿고 들어와서 중심세력을 구축하게 됐다.

세계적인 YMCA 선교사를 둘이나 배출한 그의 어머니(W.A. Brockman)는 서울서 아들의 사역을 도우다가 1915년 사망했다. 그도 1927년 과로로 건강을 잃어버려 Princeton으로 귀국하였으나 1929년 6월10일 Princeton, NJ에서 51세의 젊은 나이로 눈을 감았다. 양화진에 있는 그의 묘비명에는 “ 24년간의 조선에서의 선각자, 건축자, 평화의 중재자인 친구 Frank Marion Brockman” 이라고 각인되어 있다.

3)Sherwood Hall: 한국 결핵퇴치의 아버지

William과 Rosetta Hall 선교사의 조선에서 태어난 외아들 Sherwood Hall은 평양외국인 학교를 마치고 Northfield Mt Hermon학교에 입학했다. 이것은 그의 아버지가 SVM 서약서에 서명하고 선교사로 자원을 하고 난 뒤 무디의 Northfield 사경회에 참석 하였을 때 '이다음에 결혼하여 아들을 낳으면 꼭 SVM가 태동한 이 학교에 보내고 싶다’라고 했던 아버지의 소망이 이루어 진 순간이었다. Sherwood Hall은 재학 시 SVM로 활약하며 John Forman의 아들 그리고 평양주재 Baird, Swallen, Wells, (Moffett은 뒤에 합류) 원산의Hardie, 대구의 Adams, 청주의 Miller 등 초창기 SVM의 대표적 선교사들의 자녀들과 학교를 다녔다. Ohio에 있는 Mt. Union College 재학 시 Ohio 지역 대학 SVM 회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한편 Sherwood에게 가장 영적으로 영향을 준 사람은 원산부흥운동과 평양대부흥의 불씨를 제공한 RA Hardie였다. 그러나 의료 선교사로 그가 태어난 한국에 다시 오는 결정적인 계기는 그가 '이모'라고 부르던 어머니 Rosetta의 조수 김점동이 나중에 최초의 여성 의학박사가 되어서 어머니와 함께 의료사역을 하다가 결핵에 감염되어 순직한 것이다(1910). 그래서 그는 결핵전문의가 되어서 조선에 다시 돌아와서 당시 사망률 1위였던 결핵을 조선서 추방할 것을 서약했다. 대학시절 만난 아내 Marian Bottomley 역시 같은 대학에서 Student Volunteer Band로 활약하며 선교사로 자원하고 있었다.

부모인 1대 William James & Rosetta Hall, 2대인 이들 부부 Sherwood & Marian Hall, 동생 Edith Margaret, 태어나면서 유아사망 한 아들 Frank Hall과 함께 마포의 양화진 묘지에 합장 되어 나란히 누워있다.

-한국의 대표적 SVM 선교사 자녀의 Northfield Mt Hermon학교 졸업생
:조선에서 태어난 SVM 선교사 자녀들이 Northfield 에서 공부하고 다시 SVM 선교사로 돌아와 헌신했다.

1)선교부, 숭실대학교 창립자 배위량(William M Baird) 부부의 세 아들
William M Baird, Jr.(배의림): 아버지의 이름을 그대로 물려받은 그는 SVM선교사 배출학교 Princeton 대학, 신학원, McCormcik 신학교에서 공부하고 그의 부인(Ana Landis- 의료선교사로 헌신)과 함께 황해도 재령 등에서 23년간 목회자, 순회선교사, 교육가로 헌신w했으며, 평양 숭실대 안장됐다.
Richard H Baird(배위치): Princeton 신학원. 아내 (Golden Stockton)와 함께 강계지역 선교사. 강계성경학교장 PCUSA 한국선교부 대표를 지내며 1960년까지 헌신. 양화진 안장
John A Baird:2대에 걸친 Baird가족의 한국 선교 헌신기간 177년
2)대구 제일교회 창립자: 대표적SVM선교사 안의와(James E Admas)의 두 아들
매형 배위량이 개척한 대구선교지를 물려받아 대구 복음화의 선구자가 된 안의와는 대표적인 SVM선교사로 대학시절 Iowa, Indianan주 순회선교사로 임명되어 각 대학을 순회하며 선교사를 모집했고, 그 자신도 SVM선교사로 파송되어 1894년 조선에 입국했다. 1898년 그의 집에서 시작한 예배가 대구 제일교회의 창립으로 이어졌다.
Edward Adams (안두화): 부인 Susan과 함께 대구, 안동 등에서 선교사로 헌신
특히 계명대학교 설립 및 이사장, 대구의 계성중고등학교 이사장, 서울여대 설립위원회 기성회장, 미국 북장로선교부 한국대표 등을 지내며 43년간 복음과 교육에 헌신.
Benjamin Adams(안병암): 부인 Phyllis Irene과 함께 2세 SVM선교사로 안동등지에서 선교사로 헌신
George Adams(안두조): 안동, 대전에서 1989년까지 헌신하고 10년간 일본 선교 후 은퇴.
2 대에 걸친 부부, 자녀 선교사 Adams가족의 한국 선교기간 총 214년

3)청주 복음화의 개척자: 민노아(F.S. Miller) 부부의 세 자녀
Pittsburg YMCA 출신의 SVM선교사로 항일운동의 공로로 태극무공훈장을 받은 헐버트(Homer Hulbert) 선교사 등을 배출한 뉴욕 Union신학원을 졸업하고 1892년 조선에 입국하여 44년간 헌신. 아내와 두 자녀를 잃는 아픔을 겪었다. 마포삼열 후임으로 예수교학당(민노아 학당으로 개칭-경신고등학교의 전신)을 맡기도 하였다. 청주 제일교회를 비롯 청주지역에 6개의 학교를 세웠고, 청주성성신학원, 소민병원을 설립하는 등 청주지역 복음화, 교육, 의료의 선구자가 되었다. 청주에서 순직하여 그의 고향인 이곳에 안장되었다. 찬송 94(예수님은 누구신가), 294(친애한 이 죽으니), 307(공중에 나는 새를 보라), 379(주의 말씀듣고서), 516장(맘 가난한 사람)등은 그가 손수 지은 찬송가다

Lisette Miller: Northfield학교 재학당시 SVM 총무, 회장으로 활약. 여성 선교사의 선구자인 Mt. Holyoke대학을 졸업하고 한국 선교사로(1920-1926)헌신
Northfield학교에서 SVM으로 활동하는 William N Miller도 Wachington & Jefferson대학을 졸업하고 1922년부터 조선에서 선교사로 헌신. 동생 Ana E Miller도 Northfield에서 공부했다.

4)한국 보수신학의 대부, 평양선교부, SVM 학생대표 소안론(W L Swallen) 세 자녀
J Wilbur Swallen 및 Olivette Wallen(한국 선교사)
Gertrude Swallen은 한경직 목사와 Princeton 신학원 동기(영락교회 협동목사)이자 SVM 선교사 Harold Voelkel(옥호열- 거재도 포로수용소 선교로 유명함, 숭실대학교 교수 역임)과 결혼하여 한국에서 선교사로 헌신(여성 수감인 교도소 선교등)
이들 부부의 평양서 난 아들 Jack Voelkel (Back to Northfield 자문역) 은 30여년 남미 콜롬비아에서 선교사로 지내고 현재 Urbana terVarsity 본부 선교사로 재직하며 후배 선교사들을 지도하고 있다. 그의 자녀도 선교사로 헌신하여 4대째 SVM선교사로 헌신하는 대표적인 가문이다.

5)평양 선교부 개척자, 한국복음화의 선구자, 평양 장대현교회, 최초 신학교 설립자 마포삼열 (Samuel A Moffett)의 장남 James Moffett (Northfield Mt Hermon졸업)
한편 Northfield학교를 오지 않고 평양의 외국인학교를 졸업한 셋째아들 마삼락 (Samuel H Moffett - Back To Northfield 자문역) 박사는 한국과 중국등지에서 선교사로 헌신한 세계적 선교신학자이고, 그의 동생 마화열(Howard Moffett)박사는 대구 동산병원 원장으로 병원의 성장과 정착에 크게 기여한 의료 선교사다.

6)조선 선교개척의 선구자, 배재학당 설립자,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HG Appenzeller)의 막내 딸 Mary는 Northfield, Drexel을 졸업하고 이화대학에서 헌신.
아펜젤러 선교사는 첫 안식년에 Northfield 대학생 사경회(1893년)에 와서 조선의 현실과 선교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선교사를 모집하기도 하였다. 4자녀 모두 SVM선교사로 자원하여 둘째 딸 Ida만 일본서 선교사로 헌신하고 나머지 3명은 모두 한국서 선교사로 헌신(장남 Henry는 배재학당 학장, 장녀 Alice 는 이화대학장으로 우리나라 여성교육에 공헌. 2대 가족에 걸쳐 한국서 총 100년 헌신.
아펜젤러 선교사(2세) 부부와 자녀들. 아내 Ruth E Noble이 Northfield학교에서 공부하고 다시 선교사로 입국했다. 아펜젤러(HD Appenzeller)는 서울서 태어난 최초의 서양인인 누나 Alice가 학장으로 있는 이화대학에 선교사로 보내기 위해 동생 Mary의 Northfile 학교 입학을 원하는 편지를 Northfield에 편지를 보내었다.(1916. 7.19). 오른쪽은 Ruth E Noble과 감리교 평양선교부 Heber Jones선교사의 딸 Margaret Jones의 사진으로 Northfield 학교 입학원서에 동봉되었다.

-D.L. Moody 와 R.A. Torrey 그리고 한국 복음화
DL Moody의 후계자 R.A. Torrey, Sr (제1대)


Dr. Reuben Archer Torrey Sr.가 Northfield 와 Mt Hermon school에 이어 또 하나의 Moody 의 분신인Chicago Evangelization Society (Moody Bible Institute 의 전신- 1889.9.26 설립) 의 초대 책임자를 맡으면서부터 약 20년간의 그의 재직기간 (1889-1908)동안 학교의 놀라운 성장과 발전을 가져 왔고, Moody가 설립한 Chicago Avenue Church (Moody Memorial Church의 전신)의 담임목사로서(1894-1906), 그리고 1893년 Moody가 시작한 World's Fair Evangelism Outreach 에서의 그의 역할로 인해서 RA Torrey는 이미 유능한 부흥목사로 이름이 나있었다. 하지만 그의 스승 또는 선배인 Moody의 후계자가 된 것은 D.L. Moody가 1899년 11월 Kansas 에서의 Crusade도중 갑자기 쓰러지면서 영국 및 미국 전 지역의 부흥집회(Evangelical Crusade)를 맡게 되면서 부터다. (Moody는 한 달 후 그의 집 Northfield, MA 에서 눈을 감는다). R.A. Torrey는 이후 Moody가 못다 이룬 전 세계 Crusade의 성공적인 결과를 가져 온다.

1)Moody의 뜻을 이은 SVM 선교사 R.A. Torrey, Jr. (2대)

아버지와 함께 늘 Northfield사경회에 참석하고 Princeton대학시절에 SVM선교사로 자원한 아들 토리는 허드슨테일러의 선교단에서 중국선교를 시작했다. “하나님의 계획”(그이 아들인 토리3세-대천덕 선교사의 표현에 의하면) 으로 중국 선교지에서 한 쪽 팔을 잃은 아버지는 선교지를 한국으로 바꾸어서 대전에 있는 손발을 잃은 사람들을 위한 장애자재활원( the Amputee Rehabilitation) 에서의 선교 사역을 시작한다. Torrey Jr.는 Church World Service의 후원아래 장애자 재활원 건립계획을 추진한다. 중국의 전쟁지에서 교통사고로 한 팔을 잃은 그는 미국으로 가서 현역 선교사생활을 마감하고 은퇴하였다. 그러나 한국동란으로 인한 많은 팔, 다리를 잃은 장애자들의 재활을 돕기 위하여 다시 한국으로 선교사로 입국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가 배운 것처럼 한쪽 팔을 가지고도 생활에 지장이 없도록 살 수 있는 장애자의 재활 방법을 가르치는 사역을 한 그는 나중에 이것보다 그의 인생에 더 중요한 사역은 없었다고 술회하였다. 그가 한국에 있는 동안 한국성공회 주교인 John Daly를 만나게 되고 그가St. Michael's 신학원 (한국 성공회대학 전신 ) 을 재건립을 위해 성공회 선교사를 찾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때마침 한국으로 부모를 만나러 온 그의 아들 Torrey III(대천덕) 을 우연히 세브란스 병원에서 만난 것이다. 대천덕은 대학서 교육학을 공부하였고 중국과 한국에서 교육을 받아 동양문화에 익숙하고 신학을 공부한 성공회 목사라 이 보다 더 적당한 후보가 없었던 것이다. 이것이 3대째 Torrey가 한국으로 오게 되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다.

2)대천덕(R.A. Torrey, III) 신부와 예수원 그리고 North Korea Project

한국에 오기 전 Northfield 바로 인근에 있는 Athol, MA이란 곳에서 St. John Episcopal Church(1949∼1957) 에서 사역하였다. 이 기간 중에 그의 아들이자 4대째 한국을 섬기는 Reuben Torrey (4세) 가 태어났던 것이다. 대천덕은 1957년에 한국에 선교사로 와서 성공회대학의 전신인 St. Michael 성공회 신학원을 재건립하고 7년간 신학원장으로 섬기다가, 아내 Jane Grey와 함께1965년 강원도 태백에 기독교 수양 시설인 예수원(Jesus Abbey)을 설립하고 신앙공동체 생활을 시작하다가 2002년 선배 선교사들이 설립한 세브란스 병원에서 눈을 감았지만 Torrey가족의 한국 사역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4대 Reuben Torrey가 20년간의 일반직장 생활을 접고 아버지가 세운 예수원 운영은 물론 북한 복음화관련 사역인 Fourth River Project를 시작함으로써 토리가족의 4세대에 걸친 한국복음화 사역은 하나님의 섭리하심 없이는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

*오늘날의 Northfield Mt. Hermon 학교

세계선교 SVM의 상징인 Northfield Auditorium에서의 성경 및 세계선교를 위한 사경회가 1930년대부터 일반 사경회(General Conference)로 변질되기 시작했다. 이는 무디 서거 및 초창기 학교 지도자들의 은퇴 후 새로운 이사회 및 교직원이 유입되는 1930년대를 기점으로 '성경말씀에 근거한 창립자의 학교운영 방침’이 급격히 세속화되기 시작하였고 1950년대 후반부터는 서서히 필수 과목인 성경이 선택과목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1972년에는 남녀 두 학교가 공식적으로 하나의 학교로 통합되었고 1975년부터는 당연 참가의 학교예배(Chapel)가 선택으로 바꾸기 시작했으며, 같은 해 SVM이 태동했던 건물인 Mt. Hermon campus에 있는 the Recitation Hall이 화재로 불타 없어져 버렸다. 그러나 학교는 이러한 위대한 세계선교의 태동이 되었던 이 자리에 SVM기념탑을 세우는 대신 그 동안 이 건물에서 봉직했던 교직원 이름을 기념동판을 세웠고 다시 이 자리에는 $29백만을 투입하여 2008년 완공예정으로 예술관을 건설 중에 있다.

1989년 처음으로 한국기독교학생 모임이 자발적으로 생겨 찬양과 성경공부를 시작하였고, 2001년부터는 Korea Chapel이 Northfield에 있는 Sage Chapel에서 매주 주일 오후 예배를 드리게 됐다. 2002년에는 교회건물이 폐쇄되어 현재는 Mt Hermon campus에 있는 무디 기념교회에서 예배가 계속 드려지고 있다.

한편 Korea Chapel이 설립되던 2001년 당시, 10-20명 남짓 참여하는 학교 교목 주재하의 주일예배는 불교·회교·기타 종교 들이 모두 모여서 하는 다원종교(interfaith) 예배로 가면서도, 복음주의 기독교 예배인 학교의 Korea Chapel은 예배순서를 자주 배정 받지 못하는 등 어려움을 겪어왔다. 그러나 Korea Chapel과 소수 기독교 교직원들의 노력으로 제법 활발한 각종 기독교 행사가 벌어지고 있으며, 새로 부임한 교목의 적극적 도움으로 Korea Chapel도 정상대로 운영되고 있다.

2004년 학교의 이사회에서는 두개의 캠퍼스와 1,100여명의 학생이 학교의 장기발전에 차질이 된다고 판단해 창립자 무디와 그의 사역, 그리고 SVM의 모든 역사를 뒤로 남기고 Northfield 캠퍼스를 폐쇄하기로 결정했다.

2005년부터 Northfield 캠퍼스를 전면 폐쇄하고 학교를 Mt Hermon 한 개의 캠퍼스로 이전하면서 학생수를 600여명으로 축소하고 대규모 감원과 축소를 통하여 ‘창립자’ 무디의 그늘과 기독교를 벗어나 ‘다양한 문화, 가치관, 종교, 인종에게 최고의 학문적 환경을 제공하여 세계적인 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최고의 대학예비학교'라는 학교의 장기 발전계획을 수립하고 있다.

*Northfield학교와 한국 복음화의 역사적 관계

2001년부터 시작된 Northfield Mt Hermon School의 Korea chapel 예배는 현재 Mt Hermon Campus에 있는 Moody Memorial Chapel에서 매주 주일 오후 2시에 Korea Chapel (Campus Pastor 하정태) 예배를 드린다.

학교가 Mt Hermon 한 개의 campus로 통합되고 난후에 약 50여명의 한국학생들이 이곳에서 공부하고 있으며 15-25여명이 학생들이 토요일 Korean Christian Fellowship(학생자치기구)과 주일 Korea Chapel 예배에 참가하고 있다.

1898년 독립투사 박희병이 처음 이곳에서 "조국의 기독교 지도자"가 되기 위해 공부한 이래 이승만, 김규식, 의친왕(이강)과 같은 민족의 지도자들이 SVM의 산실 이곳 Northfield 사경회에 한국을 대표한 기독교인으로 참석했고 개화기 말기부터는 김윤정, 민홍기, 김상언, 이진구, 김영진 등 워싱톤주재 조선공사 관련 학생들이 조선 최초 선교사 Horace Allen을 비롯한 워싱톤DC의 유력자들의 추천과 도움으로 이곳에서 공부했다.

한일합방 전후로는 한국에 있는 SVM선교사들이 많은 유망한 기독교 청년을 이곳으로 보내어 공부하게 했다. 1914년, 이 학교 출신으로 조선YMCA선교사 Frank Brockman과 당시 하와이에서 망명전부를 수립하여 항일투쟁을 하던 이승만 박사는 유능한 기독교 청소년인 임병직(외무부장관, UN대사), 이춘호(서울대총장, 연희전문교수), 윤영선(농림부장관) 등을 이곳으로 추천하여 보내고 학비를 지원하는가 하면 원한경(HH Underwood) 연희전문학장은 제자들을 이곳에 보내어 대학 유학직전 이곳에서 영어를 공부하도록 배려하는 등 해방 전후의 많은 기독교 지도자로 양성하는 대표적인 학교였다.

또한 한국에 온 대표적인 SVM선교사들인 마포삼열(S. Moffett), 배위량(W. Baird), 소안론(W. Swallen), 홀(WJ + Rosetta Hall), 하리영(RA Hardie-평양대부흥의 불꽃), 어부선(OR Avison-세브란스병원설립), 민노아(F Miller-청주개척자), 안의와(J Adams-대구개척자), 아펜젤러(Appenzeller- 배재학당설립), C Ross, A Sharrocks, W Noble 선교사 등 수많은 훌륭한 선교사들의 한국서 태어난 자녀들이 SVM 산실인 이곳에서 공부하고 대를 이어 2세 SVM 선교사로 한국서 다시 헌신함으로 Northfield는 한국 복음화의 축복의 통로가 되었던 것이다.

이곳 학교에서 SVM선교사 약 200여명, 시카고에 무디가 설립한(도시 및 해외 선교사를 양성하기 위한) 무디성경학교(Moody Bible Institute)에서는 단일기관으로는 세계최대인 7,500여명의 선교사를 세계 각국에 파송하게 되는 등 그의 세계 복음화에 대한 열정을 초등학교 5년의 학력이 전부인 무디가 세운 학교에서 시작되었고, 그의 사역의 절정인 Northfield사경회를 통해서 탄생 되었던 SVM이란 거대한 세계선교의 물결을 통해서 실현하게 된다.

마포삼열의 아들 마삼락 교수도 "SVM 의 최대 수혜자는 대한민국과 한국교회(Biggest Beneficiary from the SVM is Korea and Its Churches) "라고 언급한바 있다.

*Back To Northfield의 비전

1)To Rebuild Biblical Foundation School (Amos 9:11)
(Moody의 설립이념에 입각한 성경적 학교 재건)

첫째로, Northfield에 무디가 꿈꾸었던 학교를 재건하자는 것이다.
무디는 1880년 학교 봉헌식에서 " 오 주님 성령께서 가르침을 받지 못한 어떠한 선생님도 학교벽도 건너오지 못하게 하시고……. 오 주님, 저희들은 주님의 것입니다......... 이 건물을 주님께 바칩니다. 주님의 권능으로 받아 주시고 축복하여 주시옵소어" 라고 기도 하였다.(1894년 Northfield Campus)

D.L. Moody가 설립할 때의 취지와 하나님 말씀에 입각한 학사운영 방법을 그대로 적용한 세계적인 사립 고등학교 (International Christian Preparatory Boarding School) 재건을 통해 세상을 변화 시키는 신실하고 영향력 있는 차세대 국제적 기독교인 지도자(Global Christian Leadership)를 양성한다(학교 명칭: Moody Academy)

△ 재능 있는 기독교 학생의 양성을 통한 영향력 있는 차세대 국제적 기독교 지도자 양성 (무디의Gap Men - 에스겔22:30)
△ 10/40 Window등 Unreached Area 의 유망한 청소년 발굴 및 양성으로 차세대 자국기독교인 지도자(Indigenous Christian Leadership) 배양
△ 선교사/목회자 자녀(MKs, PKs) 에게 일정한 입학 Quota제공
△ 성경 중심적 학교 및 학사 운영
△ 신실한 믿음, 학문적 재능, 헌신적이고 선교사적 마인드를 가진 교직원 채용
△ Headmaster (학교장) : 국제적인 지도력과 덕망을 갖춘 Christian 학자

2)To Revive SVM for World Missions (Isaiah 57:15)
(세계선교를 위한 학생 자원운동의 부활)

둘째로, Again SVM, 이번에는 미국의 국제 유학생들을 통하여!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제3세계권의 수많은 외국 지도자들이 미국에서 유학을 한 경험이 있다. 이러한 차기 지도자들이 “복음화된 땅”미국에 노출되어 있으나 우리는 많은 기회를 놓치고 있다. "미국의 중국유학생의 단지 8%만이 선교/복음기관에 의해서 접촉되고 있다"
- Ambassadors for Christ.
전체 유학생 및 가족 700,000 의 3%인 21,000 명을 자국으로 파송한다면 SVM이 약 40년간 20,400명을 해외에 파송한 것에 해당하는 엄청난 추수할 들판이 바로 여기에 있다.
-세계선교의 새로운 패러다임 (Paradigm)*: Them to Them
이미 복음화 된 축복의 땅 (미국)으로 유입하는 매력적인 복음화 대상인 유학생들의 세계 선교 자원화 운동(International Student Volunteer Movement:ISVM)

△ 700,000이 넘는 외국 유학생(대학, 대학원, 학자) 및 가족들의 전략적 복음화
△ 기존의 외국인 학생 선교기관과 유기적 협조 및 각 대학별 유학생 선교를 위한 전략개발
△ Northfield Bible Conference 의 부활을 통하여 여름 방학 등 기간을 활용하여 이들 학생들에게 집중적인 성경 및 선교 Program 제공
△ Northfield Conference 출신 International Student Volunteers의 선교사 파송

- 여전한 우리의 의무: 밖으로 뻗어가는 선교자원
“천하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 하기 위해 선교지로 나가는 것은 여전히 우리의 사명: 변화된 환경에 적응하는 새로운 선교전략의 필요

복음의 땅으로 찾아오는 사람만 선교해서 보내는 것으로 모든 민족과 족속에게 전할 수는 없을 것이다. 지구상에는 너무 많은 사회적, 문화적, 언어적, 지리적 장벽이 산재하고 있어 이곳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전하는 이가 이 장벽들을 직접 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최근의 많은 장단기 선교가 영혼을 구원하려는 복음전파(Truth Oriented)보다는 동정/자비심에서 우러나는(Grace Oriented) 빈민지역의 구호(교육, 개발, 의료사업등)에 치중을 두는 경우가 발견된다. 특히 Mission이라는 이름으로 후자에만 전념하는 자선단체기관이나 NGO등과 유지적인 협조체제를 구축하여 하나님이 주신 많은 인적, 물적 자원을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전략이 요구된다.(Win Win Game)

-기존의 미국 선교/대학 전도 단체와의 협조/지원체제 구축
-미국인 및 외국인 학생 선교자원의 상호교류 증진 프로그램을 통한 Partnership형성.
-자선단체나 NGO같은 기관과의 전략적 유기 협조 체제 구축

3)To Restore the deep righteous roots (Isa.49:8, Jos.4:4-9)
(부흥과 세계선교 역사의 보존과 개발로 영적 유산과 교육의 장 제공)

-D.L. Moody Learning Center
현재 생가 내에 있는 박물관을 확대하여 평신도 사역자로서의 그의 하나님에 순종한 삶과 세계 선교역사에 미친 막대한 영향을 재조명하고 그의 삶을 체험하고 배울 수 있는 교육의 장 설립

-지역 내 깊고 풍성한 의의현장 복원 및 개발하여 기독교 역사 관광지 조성
1차 영적 대각성의 현장부터 세계 선교의 운동(SVM) 에 이르기 까지 이곳 Pioneer Valley(서부 Massachusetts 지역) 에서 있었던 기독교 역사의 현장을 보존 및 개발하여 기독교 역사 관광지 로 개발하여 세계선교박물관/선교사 명예의 전당과 함께 후손들에게 자랑스러운 선조 기독교인들의 역사를 보여주는 살아 있는 세계적인 기독교/선교 역사 교육장 개발

4) World Mission Complex (Rev. 7:9)
(세계선교 종합단지 건립)

-미국 지역의 Missions & Christianity Center로서의 역할
-World Christian Conference and Convention 유치
-각종 선교단체의 입주 유치 및 유기적 협조관계 구축
-Home of the World Missions (세계 선교의 요람)

<출처:축복의 통로를 찾아서>

홈페이지:http://www.backtonorthfield.org
문의:하정태 선교사 사무총장
Phone: 413 549 4131, 413 687 5951
Fax: 508 721 6312
chungha@comcast.net
주소:27 Fearing St. Amherst, MA 01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