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민수 교수(미드웨스턴침례신학대학원)
심민수 교수(미드웨스턴침례신학대학원)

지금 세계는 코로나로 인한 미증유의 사태에 직면해 있다. 이번 팬데믹 사태는 서구인의 세계관과 사회구조를 전환시키게 될 것으로 예견하는 이들이 많다. 원래 서구는 스스로 세계의 중심이며 자신들의 선진 문명은 세계를 선도하는 대체 불가한 것으로 여겨왔다. 그런데 이제 자신들이 만들어온 기존의 세계관과 가치구조가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20세기를 돌아보면, 현재의 서구인들의 사고체계에 강력한 영향을 주었던 어두운 인물이 있었다. 바로 히틀러다. 그의 위험천만한 사상과 선동적 정치는 독일인을 중심으로 집단주의, 전체주의, 권위주의로 나타났고 그런 집단의식에서 비롯된 세계대전은 유럽인들로 하여금 집단적 트라우마를 앓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그 반동으로 20세기 중반 이후 서구인들의 정신세계가 극단적 개인주의로 빠져들게 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런 반발 의식의 집단 발현은 60년대 신좌파를 중심으로 일어난 페미니즘, 성 해방, 소수자 인권 등의 운동으로 나타나면서 68 파리 학생 혁명을 계기로 폭발하였다. 68 학생 혁명이  실패로 좌절되면서 70-80년대에 포스트모더니즘 선두 사상가들에 의해 이데올로기 형태로 확산되어 나갔다. 신좌파 운동은 단순히 노동운동, 정치 해방을 꾀하던 좌파와는 달리, 모든 국면의 해방을 부르짖으면서 자본주의적 대중문화와 조우했다.

그 결과로 포스트모더니즘에 기인한 대중문화 현상은 인간의 원초적 본능을 자극하면서 극도로 선정적인 형태로 개인주의화 되었다. 이런 개인주의화는 오늘날 극단적 형태로 치달아 어떤 집단이나 민족이나 국가보다도 개인 주체를 강조하면서 아울러 내밀한 개인 욕망의 해방을 부르짖음으로써 서구인의 정신세계를 개인지상주의 형태로 치닫는 데 가속도를 붙여 왔다. 이제 서구인들에게 있어서 자유란 인간 욕망의 해방과 동일어가 되었다.

오늘날 서구인들의 정신 속에 개인 주체는 거의 우상 수준이다. 프라이버시라는 이름 아래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인간 최대의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시대가 된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욕망의 해방은 인간 최고의 가치며 존재의 의미가 되어 있다. 이제 서구인들은 인간 욕망의 자유가 어디까지 가능할지를 실험이라도 하려는 듯 차마 입에 담거나 글로도 표현하기 어려운 극단적 자유방임주의에 빠져 들었다. 과연 인간의 자유란 무엇이며 개인의 표현의 자유란 무엇인지를 법제화해야 할 지경에 이른 것이다.

그러데 이번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유럽인들은 단지 육체적 고통에 휩싸인 정도가 아니다. 정신세계 자체가 흔들리고 있다. 한 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미래에 대한 불안이 서구인의 집단 무의식 속에 뜻밖의 변화를 주고 있는 것이다. 무정부적 사고체계나 개인지상주의적 생활 행태로는 팬데믹 같은 공포를 이겨낼 수 없다는 사실을 자각하기 시작했다. 개인의 자유만으로는 결코 해결할 수 없는 이런 엄청난 사태에 직면하여 '국가'의 중요성에 다시 눈뜨게 되었고 개인 간의 연대를 넘어 국가 간의 연대를 요청하기에 이른 것이다.

코로나 사태의 여파는 정신적 충격에만 그친 것이 아니다. 세계의 정치 경제적 지형까지 흔들어 놓고 있다. 중국은 불신의 대상이 되었고 부동의 월드 리더였던 미국은 그 위신이 크게 손상되었으며 선진문화의 전형으로 여겨졌던 유럽 여러 나라들은 속빈 강정처럼 부서지는 형국이 되었다. 반면 대한민국이 K-방역으로 세계의 주목을 받으면서 새로운 국가적 리더십을 발휘할 절호의 기회라는 말을 하는 이들이 많아졌다. 

이처럼 K-방역이 결정적인 성과를 거두게 된 데에는 여러 요소들이 함께 시너지를 만들어 낸 것으로 보인다. 정부 관계자들, 의료계와 보건 종사자들, 그리고 협조해 준 국민 등 모든 관련 구성원들의 마음과 정성이 한 데 어우러져 성과를 가져왔다는 데에 누구도 부인할 사람이 없다. 이는 한 마디로 우리 민족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들이 각자 자신들에게 맡겨진 역할과 기능을 제 때에 적실하게 발휘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우리 공동체의 공동체성이 매우 유능하게 작동하였다는 것이다. 공동체성의 중요성이 자명 하게 드러난 셈이다.

원래 공동체성은 소규모 공동체들이 살아 있어야 대단위 국가 공동체가 유지될 수 있다. 소규모 공동체가 상정되지 않고 대규모 공동체를 말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소규모 공동체가 부재한 대규모 공동체란 것은 실제로는 존재할 수 없다. 그런 경우가 있다면 그것은 단순히 '대규모 집단'에 불과하며 공동체성이 아니라 집단성이 작용하는 사례라 할 것이다. '빅브라더'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집단성과 공동체성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공동체와 집단은 그 성격상 분명히 구분된다. 그 차이는 간단하다. 전자는 각 구성원의 존재감과 역할이 살아있는 반면에, 후자는 그런 존재감 따위는 부재한다. 오로지 집단의 목표와 권력만이 존재한다. 이런 집단은 종종 파시즘의 결과물들이다.

한국인은 공동체가 살아있는 민족이다. 혈연이니 지연이니 학연이니 하는 것들이 지나친 면식문화를 만들었다고는 하지만 이는 한국인의 공동체의식을 확보하는 데 큰 장점으로 작용하기도 하였다. 이런 한국의 공동체의식이 지닌 장점과 단점은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어떻게 적용하느냐에 따라서는 위기와 고난을 극복하는데 매우 유용한 요소로도 작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한 민족, 한 지역, 한 마을 출신이란 것이 이렇듯 '우리의식'을 발현시키는 데 중요한 배경을 이루었다는 말이다.

코로나 사태는 다양성만이 부각되는 파편화된 시대에 공동체성의 중요성이 재조명되는 계기를 가져오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한국인의 공동체성이야말로 유럽인들의 파시즘에 대한 트라우마에서 벗어나면서도 코로나 팬데믹 같은 사태를 극복할 수 있는 결정적인 정신 토양이 될 것이다.

심민수 교수 (미드웨스턴 침례신학대학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