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강석 목사 ⓒ새에덴교회
(Photo : ) ▲소강석 목사 ⓒ새에덴교회

우리 교인들이라면 잘 아시다시피 저는 유교문화가 강한 보수적인 가문에서 자랐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서 여아보다 남아선호사상이 머릿속에 자연스럽게 물들었구요, 게다가 보수신학을 공부하면서 여성 사역자들에 대한 사고가 보수적 편향성에 치우쳐 있었습니다.

 

그런데 얼마전 우리 총회의 여성 사역자 지위향상 개발위원회 위원장님이신 고영기 목사님으로부터 '여성 사역자 지위향상과 사역개발을 위한 실제적 방안'에 대해서 목회적 차원에서 연구발표를 해달라는 제안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 주제를 연구하면서 여성 사역자들에 대한 편향적 사고를 다시 한 번 깨달았고 객관적이고 중립적으로 이해를 하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총신대 신대원 출신들 가운데 출중하고 뛰어난 여성 사역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성 사역자 안수를 금하는 우리 교단의 헌법 규정 때문에 출중한 여전도사님들이 다른 교단에 가서 안수를 받고 목회를 잘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 총신에서 교육을 잘 받고 결국 다른 교단에 가서 그 교단의 살을 찌우는 것이 안타깝게 느껴졌습니다.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여성들이 더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능력이 출중함에도 불구하고, 졸업하여 목사안수를 받고 교회에서 대우와 존경을 받는 남성 사역자에 밀려 그냥 심방전도사와 교육전도사에 머무는 여성 사역자들을 보면서 굉장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할 수 있으면 여성 사역자들의 지위향상과 사역 개발에 있어서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발표를 하려고 하였습니다.

먼저 발표를 하기 전에 논문을 몇 사람에게 보내 보았습니다. 총신대 신대원 교수이시고 저희 교회 연구목사님이신 양현표 교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목사님, 여성 사역자들의 지위향상과 사역개발에 대해서 아주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제안하는 것은 좋지만 여성 사역자들의 안수 쪽으로 가는 하나의 징검다리나 그 수순의 이미지로 비춰질 수가 있습니다. 여성 안수는 신학적인 문제이기도 하지만 정치적으로 예민한 사항이기 때문에 발표 수위조절을 적절하게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아직 공청회도 하지 않았는데 "소강석목사는 여성 안수를 주장하는 쪽으로 논문을 발표했다"는 헛소문이 돌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몇몇 총회 어른들이 "발표할 때 경계선을 넘지 말라고..." 충고를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최대한 차분하면서도 객관적이고 중립적으로 발표를 하였습니다. 현장 분위기로 봐서도 여성 사역자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었고 감사와 만족의 눈빛도 느꼈습니다. 그런데 결론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오늘 발표한 발제문은 여성 사역자의 안수문제와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그런데 역사 속 교단들의 흐름을 보면 이상하게 여성 안수의 허용이 신학적 자유화로 가는 결정적 터닝 포인트가 되었다는 것이 참 아이러니합니다. 프린스턴신학교가 그랬고, 미국의 PCUSA 교단이 그랬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단은 여성 사역자의 지위향상과 사역개발을 위해서 심각하게 고민하고 적극적으로 결정하되, 이 과정이 신학적 진보와 자유화의 서곡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 교단의 신학적 자유화만큼은 반드시 막아내야 합니다." 그리고 저는 바로 다음에 국회에서 광복절 기념식 행사가 있어서 자리를 떠야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한 여성 선교사가 질의와 응답 시간에 자리에도 없는 저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 한국에서 여성 안수를 허용하는 교단들은 다 극단적 진보주의입니까" 제가 그 자리에 있었더라면 명쾌한 답변을 했을 텐데요. 사실 저는 여성 안수를 분기점으로 해서 신학적 진보와 자유화의 터닝 포인트가 되었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우리 교단만큼은 절대로 신학적 진보와 자유화를 막아야 한다고 말씀을 드렸을 뿐이지, 여성 안수를 허용한 교단이 극단적 진보주의라는 이야기를 한 적이 없거든요. 우리 교단이 신학적 본질과 가치를 잘 지켜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 것인데요. 그런데 또 어느 언론에서는 마치 제가 여성 안수가 신학적 진보로 가는 길이 되었다고 주장한 것처럼 써 놓은 것입니다. 제가 국회를 좀 늦게 가더라도 질의와 응답 시간까지 남아 있었을 걸 하는 후회를 했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오해와 소통 부재가 빚어낸 결과이지요. "아, 이렇게 소통이 중요하구나. 항상 자기 입장에서 이해하려고 하면서 불통을 낳게 되고 오해를 낳게 되는구나..." 생각지도 않는 질문과 오해를 받게 되면서 다시 한 번 소통의 중요성을 깨달게 되었습니다. 목회현장에서도 이따금 그런 오해와 불통이 있을 때가 있습니다. 요즘 양방향 소통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며, 소목사야말로 더 확실한 소통 목사가 될 것을 다짐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