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 왜 직접 이 땅에 내려오셨을까? 하나님이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셔서 무슨 말씀을 전하시려 하신 것일까? 얼마나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기를 거부하였으면 그분이 직접 이 땅에 오시게 된 것일까? 하기야 예수님 시대의 바리새인들을 생각해보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도 들을 수 있는 귀와 볼 수 있는 눈을 주셨지만, 그 귀와 눈을 완전히 닫고 주님을 신뢰하지 않았던 모습들을 눈에 그려진다. 진실로 영원히 변치않는 하나님의 존재와  그의 말씀을 의심없이 받아들이기는 어려운 것인가?

'신뢰(Trust)'라는 단어와 '믿음(Faith)'라는 단어는 서로 밀접하게 관련이 되어 있는 것 같다. 우선, 신뢰가 경험을 바탕으로 선택하는 일련의 과정이라면, 믿음은 증거가 없는 것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다. 다시 말해서, 신뢰가 두려움 없는 확신 혹은 헌신이라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며, 보이지 않는 것의 증거 혹은 실체라고 말할 수 있다. 아무튼 삶 속에서 '신뢰의 문제'는 특별한 것 같다. 솔직히 인생에서 다른 사람을 신뢰할 수 있다는 것만큼 축복받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물론 그 대상이 하나님이라면 두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곧바로 신앙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변을 둘러보라. 우리는 지금 불신의 사회에서 살고 있지 않는가? 눈으로 볼 수 있거나, 만질 수 있는 것에 대한 확신만이 존재하기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믿음을 갖는다는 것이 쉽지만은 않은 시대가 되어 버렸다. 그러하기에, 자신이 처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신뢰했던 아브라함, 요셉 그리고 다윗과 같은 믿음의 일꾼들을 이제는 주변에서 찾아보기는 참으로 어려운 것 같다.  요즘의 교회들은 긍정적 확신(positive conviction), 적극적인 사고(aggressive thinking) 그리고 꿈(dream) 이라는 비성경적인 단어를 많이 사용한다.

이러한 신념은 우리의 사고와 의지를 강하게 함으로써 삶에 활력을 불어넣는 비행기의 엔진과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기초로 하지 않는 믿음 생활은 궁극적으로는 모든 신자를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게 마련이다. 사도바울의 설교가 살아있고 힘이 있는 이유를 알고 있는가? 그것인 자신이 가지고 있는 화려한 언어구사력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사람들에게 미련하게 보이는 십자가의 도, 즉 하나님의 지혜에 그의 믿음(faith)을 두었기 때문이다.  

과연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의 신앙과 십자가의 도가 우리를 매일 강하게 만들고 또한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하는가? 폭풍우가 치는 날 베드로가 바닷물 위를 걸을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처럼 자신도 물 위를 걸을 수 있다는 세상적인 개념의 확신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죄를 위해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철저하게 신뢰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 크리스천이 반드시 품어야 할 성경적 확신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향한 그 뜨거운 믿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는 잠언의 말씀을 의지하여 가족의 도움, 자신의 능력 혹은 세상적인 신념이 아닌, 영원히 변치않는 하나님의 말씀 그리고 그 분을 향한 믿음만을 의지해야 할 것이다. 세상적인 요소들은 우리의 영적인 면에 아무런 도움이 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결국 믿음(faith)이란 살아계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 파도와 비바람이 몰아치는 이 시대에 당신은 누구를 의지하고자 하는가?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내려오신 하나님 즉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되게 만나고자 하는가? 아니면, 자신만의 확고한 신념으로 그 험난한 파도 위를 걷고자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