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 이어서 제가 청년시절부터 지금까지 적어왔던 목회철학과 점검을 위한 결단을 나누고 있습니다.

그 중 설교에 대한 부분을 먼저 나누고 있는데요. 오늘은 설교에 대한 나머지 부분을 여러분과 나누려 합니다.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자가 누군가에게 전하는 시간입니다. 그리고 설교는 사역자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자는 언제나 이 말씀을 듣는 대상과의 관계를 점검해야 하고, 말씀을 전하는 사람과의 관계를 살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독불장군이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설교와 교역자와의 관계

1.사역자는 결국 설교로 평가를 받게 되므로, 함께 하는 교역자들이 교회를 섬기다가 설교 준비를 소흘히 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동역자의 의무이다. 따라서 설교의 기회를 부여하는 것은 목사로서 줄 수 있는 가장 큰 사랑이고 책임이다.

-설교가 사역의 전부는 아닙니다. 하지만 사역자가 아무리 일을 잘 한다 해도 설교 준비에 소흘하다는 것은 중심을 흐트러뜨리는 것입니다. 일이 바빠서 설교의 자리에 설 기회도 얻지 못하고 흩어지는 대형교회 사역자들이 참 많습니다. 혹은 설교할 기회가 있기는 하지만, 11시 예배 설교의 기회는 몇몇에게만 주어지고 말지요.

담임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동역자들에게 설교의 자리를 공유하고 서게 하는 것입니다. 그 자리가 새벽, 수요, 금요 예배를 너머 이른바 교회 본예배 설교 자리에 서게 하는 것이 가장 큰 사랑입니다. 즉 담임목사만의 전유물이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2. 담임이 되어 함께 섬기는 교역자가 있다,면 그가 어떤 직위에 있건 어떤 설교의 자리라도 함께하라. 함께하는 공동체가 말씀의 공동체가 되기 위해 설교자의 자리가 갖는 영적인 거룩한 부담감을 함께 공유할 수 있어야 한다.

-이 말은 함께 섬기는 교역자가 이제 갓 부임한지 얼마 안 되는 전도사라 할지라도, 설교의 자리에 설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설교자의 자리가 갖는 거룩한 부담감을 함께 공유해주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3. 어떤 사람이 설교한다 해도, 설교를 기술적으로 평가하지 말라. 평가하는 자는 그대로 평가받는다.

-하나님의 방법은 심은 대로 거두는 것이지요. 그래서 평가하는 자는 그대로 평가받습니다. 본인이 날카로운 비판력과 분석력을 자랑하면서 설교를 비판한다면, 본인 역시 그렇게 평가받습니다. 무엇보다 설교는 기술적 평가 대상이 되어선 안 됩니다.

4. 어떤 교역자가 설교의 자리에 나서게 되면 최선을 다해 기도해 주어라. 같은 교회 교역자가 설교할 때 누구보다 가장 집중해서 들으라. 이미 설교의 자리를 내려온 순간, 나는 단지 말씀을 듣기 위해 무릎 꿇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사실 설교의 자리에서면 말씀을 경청해서 듣는 사람이 보입니다. 그리고 참 힘이 됩니다. 교역자에게 설교 자리만 준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그때 저는 듣는 자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누구보다 최선을 다해 그가 눈치보지 않고 설교할 수 있도록 기도하고, 내 설교시간 아니라고 대충 기둥 뒤에 숨거나 설교도 안 듣고 피해 있는 행동을 해서는 안 됩니다.

5. 함께하는 교역자가 설교할 때는 최선을 다해서 예의를 갖춰 경청하라. 그것이 설교자에게 보이는 최선의 사랑이자 예의이고, 그 예의를 다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사랑도 이뤄짐을 먼저 본을 보여라.

-같은 맥락이지만 사실 너무 많은 사역자들이 본인 설교 준비는 철저히 하면서도 다른 교역자의 설교시간은 대충 대충 합니다. 힘들어도 내가 강대상에서 내려온 순간 나는 일하는 자가 아니라 예배드리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담임이건 어떤 사람이건 최선을 다해 경청할 때, 하나님께도 설교자에게도 예의를 다하는 것입니다.

6. 설교를 마치고 내려오는 교역자에게는 예의를 다해 수고하셨다고 격려하라. 설교를 준비하기 위해 들어간 노고를 가장 잘 아는 자로서, 한 마디의 말이지만 따뜻한 위로를 아낌없이 할 수 있어야 한다.

-누구보다 설교가 힘든 시간임을 잘 알고 있다면, 내 설교 끝난 뒤 힘든 만큼 그도 힘들었음을 알고 격려하라.

◈설교에서 성도와의 관계

1. 설교 시간은 목회자가 강단에서 예수의 마음으로 모든 성도와 마주하는 유일한 순간이다. 사람과의 관계는 눈을 마주할 때 사랑도 감정도 메시지도 전달된다. 그러므로 모든 성도들에게 가장 공평하게 골고루 시선을 돌려라.

모인 성도들과 눈을 골고루 마주하며 설교하기 위해, 될 수 있는 한 원고를 보지 않고 교인들과 눈을 맞추며 설교하는 것은 교인에 대한 설교자의 예의이다.

-목회자는 그가 아무리 사랑이 넘쳐도, 절대로 모든 사람들을 공평하게 사랑할 수 없습니다. 육체적 한계가 있으니까요. 또 자연스레 마음이 가는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배 시간만큼은 모두를 한 번에 만날 수 있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들고 서는 그 순간, 목회자의 설교 시간을 통해 모든 성도들에게 공평하게 시선을 돌릴 수 있어야 합니다.

2. 설교는 자기를 자랑하는 순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순간이다. 따라서 성경을 읽거나 언급할 때는 암기하듯 다루지 말고 늘 모든 성도들과 함께 찾거나 본인의 입으로 천천히 읽어라.

-인용하는 성경 구절을 자랑하듯 선포한다거나 암송을 위주로 하는 설교에도 은혜가 있지만, 이 순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순간입니다.

모든 책들을 인용할 때도 우리가 그 글을 직접 따와 정확히 읽어주는 것이 본 저자에 대한 예의라면, 하나님의 말씀은 오죽하겠습니까? 한 글자도 소흘히 여기지 않고, 우리 자신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서라도 말씀을 소리내어 천천히 읽는 것이 좋습니다.

3. 설교에 자기 감정을 전하려고 하지 말라. 설교 후 예화가 기억에 남으면 안 된다. 글쓰기나 웅변을 하는 시간이 아니다. 자기 감정을 늘 절제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라.

-설교하다 보면 자기 감정이 나타날때가 있습니다. 혹은 설교에 정말 좋은 예화가 필요해서 넣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설교를 하고 나서 성도들과 이야기해 보면, 예화만 기억하고 본질이 흐려지는 경우가 참 허다합니다.

그러므로 늘 주의해야 합니다. 설교시간은 자기 감정을 호소하는 시간도 아니고, 사람들을 웃기고 만족 주기 위한 시간이 결코 아닙니다. 말씀의 이해를 돕기 위한 예화만 기억남는 설교는 안 하느니만 못합니다.

4. 설교 준비를 하느라 힘들다고 강조하지 말라. 나는 늘 설교하기에 부족한 자임을 인식해야 한다. 그런 부족한 자에게 설교의 자리를 주신 하나님께 겸손하고 감사한 마음을 날마다 갖춰라.

-저도 가끔 하는 실수 중 하나입니다만, 설교 준비를 아무리 많이 해도 자랑해서는 안 됩니다. 설교할 수 있는 시간을 주셨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 마음을 잃어버린 설교자의 특징은 '내가 얼마나 일을 많이 했는지'부터 시작합니다. 결국 자기가 드러나게 되어있습니다. 자기가 드러나면 예수는 사라집니다.

5. (만약 설교가 가능한 경우가 있고, 해당 공동체가 용인할 만큼의 그릇이 된다면) 설교의 자리에 때로는 성도를 세워라. 세상 한복판에 살아가는 성도들의 영성이 말씀으로 채워지기 시작할 때면, 그 성도의 입술과 삶을 통해 공동체에 전해지는 메시지는 목사의 것보다 위대할 때가 많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미 가톨릭에서 개혁된 개신교회는 목사 없이도 예배가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목사 중심의 교회가 아닌, 성도들이 주 안에 연합하여 하나된 교회가 건강한 교회입니다.

간혹 교회 중 담임목사님이 부재하면 혼란에 빠지거나, 목사님이 안 계시면 아무것도 안 되는 경우들이 생깁니다. 모두 목사가 주인되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누구라도 말씀을 대언할 수 있고 전할 수 있는 교회가 된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결국 성도들이 세상에 나가야 하고, 성도들이 세상에 나가 하나님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성도들 가운데에는 저 같은 목사와 달리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이심을 선포한 베드로와 같은 삶을 사는 살아있는 간증자가 많습니다. 단 공동체 내부의 성격상, 아직 이러한 것들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는 억지로 해서는 안 됩니다. 모든 기초는 주 안에 하나됨이고, 자기 주장이 아닌 자기 부인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6. 설교에 은혜받았다는 말에 취하지 말라. 왜 설교자 당신이 은혜를 받으려 하는가? (누군가 그 말을 한다면 은혜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라고 해야 한다.)

-부족한 제 설교에도 간혹 은혜 받았다는 이야기를 하셨던 분들이 있습니다. 꼭 드리는 대답입니다. "은혜는 하나님이 주시는 거지요."

은혜 받았다는 이야기는 설교자를 취하게 합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내가 줬다고 착각하게 만듭니다. 착각한 설교자처럼 위험한 사람은 없습니다.

7. 만약 설교 후 설교자인 내게 잘해주는 사람이 많아진다면, 그때는 설교자 자신이 교만해질 수 있는 가장 위험한 시험임을 자각하라.

-설교가 끝나면 성도들은 그 감동으로 세상에서 섬겨야 할 대상을 찾아야 합니다. 원수를 형제처럼 여겨야 합니다.

그런데 그 설교를 한 설교자를 우대하고 그를 섬기며 그를 사랑한다면, 이것은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영원히 '예배당' 안에서 사랑이 겉돌고마는 쳇바퀴 교회가 될 것입니다.

유한승
▲유한승 목사.

◈설교자로서의 다짐

지금까지 설교에 대한 철학을 바탕으로, 스스로 이렇게 다짐하고 살려 합니다.

1. 그러므로 강단 위에서 내려올 때는 가장 낮아져라. 가장 바보가 되라. 말없이 말씀을 전한 대로 살라.

-설교 시간에 아무리 좋은 말들을 쏟아내었다고, 그것으로 성도들이 존경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내려오는 즉시 바보가 돼야 합니다.

2. 설교가 끝나면 바로 성도들과 같은 위치에 서라. 이들에게는 가르치는 자가 아니라, 힘든 세상을 함께 공감해주고 버텨줄 동행자가 필요하다.

-설교 자리에 서서 말씀 전할 때는 눈치보면 안 됩니다. 그러나 내려오는 순간, 저는 똑같이 세상을 살아가야할 사람일 뿐입니다. 이들에게는 말만 살아있는 바리새인이 아니라, 행동으로 먼저 살아가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3. 설교는 교회의 역할 가운데 하나를 한 것이고, 목회자는 예배의 순간을 맡았던 것임을 잊지 말고 겸손해져야 한다.

-설교가 마치 모든 예배의 최고인 것처럼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설교 순서를 맡았던 것임을 잊지 않을 때, 예배의 모든 순서가 살아 운동력이 있어 호흡하듯 흘러가게 됩니다. 설교자가 다른 순서를 중요하게 생각할 때, 다른 예배 순서자들도 겸손한 예배자가 될 수 있습니다.

4. 그러나 설교자로서 설교를 전하는 순간, 듣는 자보다 말한 자에게 설교한 대로 살아야 할 책임이 있음을 잊지 말아라.

-듣는 자는 들은 대로 살아야 할 책임이 있다고 말합니다. 왜 들어놓고 그렇게 안 사느냐고 설교자들이 말합니다. 그러나 가르치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율법사들이 된다는 것은, '제자가 아닌, 무리가 되는' 길이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5 .모든 성도들은 먼저 말한 '내가 먼저 살아줄 것'을 애타게 바라보고 응원하고 있음을 잊지 말고, 가르치는 자, 지도자의 위치가 아닌 삶의 '다이렉터'가 되어 한 걸음 먼저 바른 방향으로 걸어가라.

-청년부를 섬길 때 담임목사님께서 'director'를 맡기셨습니다. 청년부 평신도 지도자를 하라는 것이었지요. 하지만 이미 지난주부터 소개한 제 목회철학 가운데 '지도자라 칭함받지 말라, 너희의 지도자는 한 분이시니 곧 그리스도시니라(마 23:10)'를 목회철학과 자기 점검사항으로 두고 있던 저는 그 이야기를 받아듣자마자 청년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교회에서 주신 이 디렉터라는 직책을 내가 거절 못하고 순종은 할거야. 그런데 우리 이 단어를 해석만 달리 하자. 'director', 똑같은 단어지만 'i' 발음만 달리 하면 '다이렉터'거든. 난 너희들의 지도자가 아니야. 주님이 지도자 되지 말라고 하셨거든.

나는 너희들과 함께 걸어가고 동행하지만, 주인되신 주님 말만 먼저 듣고 걸어가 주는 다이렉터가 될게. 좀 거칠고 힘든 길이어도 포기하지 않고 같이 걷는 그런 다이렉터가 될게."

그래서 저는 지금 담임이지만 여전히 지도자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못하게 합니다. 여전히 저는 담임이기 전에 '다이렉터'임을 잊지 않고 삽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철저히 낮아지고 주인 되신 분의 음성을 똑바로 따라가는 듣는 귀가 열리기를 축복하며, 다음 주일에 뵙겠습니다. 샬롬.

유한승 목사(생명샘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