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다양성의 시온주의



▲권혁승 교수 ⓒ권혁승 교수 블로그
권혁승 교수 ⓒ권혁승 교수 블로그

헤르츨에 의하여 시작된 정치적 시온주의는 50여년 뒤 이스라엘국가 독립이라는 기적적인 역사를 이루었다. 시온주의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보이는 무수한 난관을 극복하고 그런 특별한 역사를 창출할 수 있었던 것은 시온주의가 지닌 독특한 성격 때문이다. 시온주의는 19세기 말 갑작스럽게 생겨난 것처럼 보이지만, 그 근원은 구약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3000여년 이상 지켜온 이스라엘민족 전체의 신앙적 유산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시온주의는 19세기 말 헤르츨에 의해 시작된 것이기보다는 수천 년 동안 누적된 이스라엘 민족의 기도와 염원이 하나님에 의해 응답된 특별한 섭리역사라 할 수 있다. 그것은 회복의 가능성이 전혀 없어 보이던 에스겔의 마른 뼈가 하나님의 말씀과 생기로 살아나 큰 군대를 이룬 것이기도 하다.

시온주의가 이스라엘 온 민족의 기도와 염원에 근거를 두고 있었다는 것은 시온주의가 획일화되지 않고 서로 다른 다양한 견해들이 융합된 성격을 지니고 있음에서 확인할 수 있다. 시작 초기부터 시온주의는 팔레스타인에 유대인국가를 건설하겠다는 취지와 목표에 동의한다면, 누구라도 참여를 제한하지 않고 문호를 넓게 개방하였다. 시온주의의 그런 개방성은 현대시온주의를 시작한 헤르츨이 유대교에 정통한 인물이 아니었다는 점과도 관련이 있다. 그는 비종교적인 인물이었으며 더 나아가 유럽 사회에 깊이 동화된 진보주의자였다. 만일 그가 유대교 전통에 익숙하였다면, 시온주의의 폭은 그만큼 제한되었을 것이다. 지금도 일부 극단적인 정통파 유대인들은 인간의 노력이 아닌 하나님의 주도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이유 때문에 이스라엘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팔레스타인에 유대인국가 건설이라는 시온주의의 목표는 사상적 이념이나 종교적 신념을 뛰어넘는 것이어서 다양한 형태의 시온주의 단체들이 참여하여 힘을 결집시킬 수 있었다. 곧 시온주의의 중심축은 정치적 시온주의가 차지하고 있었지만, 사회주의적 시온주의, 문화적 시온주의, 종교적 시온주의, 수정시온주의 등이 별다른 갈등 없이 공존할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시온주의는 유대민족 전체가 참여하는 역동성을 지닌 국가회복운동으로 발전하였다.  

6. 밸푸어선언(1917년)과 유엔의 이스라엘독립 안 가결(1947년)

1차 세계대전의 종전을 얼마 남겨두지 않았던 1917년 11월 2일 당시 영국 외무장관이었던 밸푸어는 유대계 영국 은행가이면서 시온주의운동의 재정후원자였던 로스차일드 경에게 서한을 보내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민족국가 수립에 동의한다고 선언하였다. 그것은 1897년 바젤에서 제1회 시온주의자 총회가 개최된 이후 최초로 유대인 국가건설을 지지하는 공식적 선언이었다.

영국이 밸푸어선언을 발표한 것은 영국의 시온주의 지도자였던 하임 바이츠만의 끈질긴 노력에 의한 결실이기도 하였지만, 1차 세계대전 당사자국인 영국이 유대인 여론을 연합국 측으로 끌어들임과 동시에 유대인을 활용하여 유리한 중동정책을 마련하려는 것에 관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선언은 그보다 2년이나 앞선 1915년 10월 이집트 주재 영국 총독(High Commissioner) 맥마흔이 메카의 셰리프 마호메트 가문의 후세인과 10차례에 걸쳐 주고받은 서신을 통해 1차 세계대전 후 아랍인들에게 팔레스타인에 독립국가 건설을 약속한 '맥마흔 선언'과는 상반된 입장이었다.

미국을 비롯한 프랑스, 이탈리아는 밸푸어선언의 지지를 표명했고, 또한 전후 패전국 오스만터키와의 강화조약을 확정하기 위해 1920년 4월 19일부터 26일까지 이탈리아 산레모에서 열린 국제회의에서 그것이 정식 의제로 채택되었다. 그런 정치적 흐름 속에서 1922년 7월 24일 국제연맹 총회에서 51개 회원국의 승인을 받아 결정한 영국의 팔레스타인 위임통치 법안에 밸푸어선언을 포함시켰다. 영국정부가 팔레스타인 위임통치 초대 총독으로 유대인 출신 허버트 루이스 사무엘 경(Sir Herbert Louis Samuel)을 임명한 것도 그런 배경과 관련된다. 정통파 유대인 가정 출신인 사무엘은 영국정부에서 고위관료를 지낸 첫 번째 개종하지 않은 유대인이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은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를 시작하면서 친 아랍정책으로 선회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당시 석유수요의 급증으로 영국이 중동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할 필요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그런 영국의 친 아랍적인 국가정책 기조는 이미 '맥마흔선언'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팔레스타인 위임통치가 시작된 직후인 1922년 9월 영국은 국제연맹과 함께 팔레스타인에서 요단강 동편을 제외시켰다. 영국은 팔레스타인 위임통치 지역의 3/4에 해당하는 이 지역을 별도의 위임통치왕국으로 정하고 후세인의 둘째 아들인 압둘라를 국왕으로 세웠다. 그리고 영국은 1946년 이곳을 '요르단 하심왕국'(The Hashemite Kingdom of Jordan)으로 독립시켰다.  

영국은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국가건설을 위하여 무엇보다도 시급하게 필요한 '알리야'(해외 유대인들의 고국으로의 이주)에 대해서도 제한을 두기 시작하였다. 1939년 5월 영국은 추가로 이주할 유대인의 '알리야' 수를 7만 5천명으로 제한시켰을 뿐 아니라 1944년까지 이주를 끝마쳐야 한다는 조건까지 붙였다. 아랍인을 회유하기 위한 영국의 그러한 정책에 대해 시온주의자들은 크게 반발하였고, 급기야는 유대인의 영국에 대한 유혈 테러행위까지 일어나는 상황이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도 팔레스타인에서 유대인과 아랍인 사이의 갈등은 해결되지 않은 채 더욱 심화되었다. 해결 방도를 찾지 못하고 있던 영국정부는 1949년 2월 미국의 제안을 받아들여 팔레스타인 문제를 유엔으로 넘겼고, 유엔은 조사위원회의 권고를 받아들여 1949년 11월 29일 전체 총회에서 팔레스타인에 유대인국과 아랍국을 세운다는 소위 '두 나라 안'을 통과시켰다. 그 결정을 받아들인 이스라엘은 영국위임통치가 종식되기 8시간 전인 1948년 5월 14일 오후 4시 텔아비브 예술박물관에서 역사적인 독립선언식을 거행함으로 현대이스라엘('메디나트 이스라엘')로 재탄생하였다. 반면 '두 나라 안'을 거부한 아랍진영은 주변 아랍 5개국 연합군을 결성하여 신생 이스라엘과 제1차 중동전쟁을 벌렸다. 그렇게 시작된 두 진영 간의 갈등은 70여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 진행 중이다.

V. 결론 및 제안

1. 이스라엘독립으로 결실된 현대시온주의는 역사의 빈 공간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이 가나안으로 부름을 받은 이후 4000년 동안 중단 없이 지속적으로 이어진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결과였다. 시온주의의 신학적 뿌리는 아브라함의 가나안 부름에 근거한 토지신학과 다윗의 예루살렘 성역화에 근거한 시온신학에서 찾을 수 있다.

2. 땅 관점의 성서신학은 중요한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최근까지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그동안 교회는 이스라엘의 실체를 부정하면서 영적 상징이나 모형으로 이스라엘을 해석하였다. 그에 따라 이스라엘 땅도 지금 여기서가 아닌 저 세상의 어떤 것으로 우화화 시켰다. 그러나 1948년 이스라엘의 독립으로 그런 분위기는 크게 일신되었다. 더 이상 이스라엘의 존재를 부정할 근거가 없어진 것이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토지신학이 성서신학의 중요한 주제로 부각하게 된 것은 그런 변화에 대한 학계의 수용과 적용이 있었다는 좋은 증거이다.

3. 본 발제에서 다룬 세 주제인 토지신학과 시온신학과 시온주의는 4000년이라는 긴 시간 간격으로 두고 있다. 그런 시간적 간격만 따진다면, 세 주제는 상호관련성이 전혀 없는 옴니버스 형식의 세 이야기 모음이어야한다. 그러나 이 세 주제는 마지막 결론인 이스라엘독립을 향하여 한 방향으로 흘러내려간 삼부작으로 구성된 한 주제의 역사이야기이다. 4000년이라는 시간의 공백을 뛰어넘는 역사적 흐름이 가능했던 것은 그 배후에 다음 세 가지 요인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1) 첫째는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섭리이다.

(2) 둘째는 아브라함과 다윗으로 대표되는 하나님의 선택된 인물들이 이스라엘의 기본신앙과 신학을 튼튼하게 형성한 것이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이주한 가나안은 단순히 그와 그의 후손들의 생활수단을 위한 세속적 관점의 땅이 아니다. 그것은 최초의 인간을 위해 하나님께서 직접 창설하신 에덴의 모형으로서 하나님께서 주실 온전한 회복을 미리 경험한다는 신학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역사무대로 등장시킨 다윗 역시 그곳을 정치적 중심지이면서 또한 신앙의 구심점으로 정착시켰다.

(3) 셋째는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을 철저하게 순종하며 그것을 관습으로 지킨 이스라엘백성들이다. 아무리 훌륭한 신학이라도 실제로 실천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이론에 불과한 탁상공론이다. 그러나 이스라엘백성들은 성경에 근거한 토지신학과 시온신학을 구체적인 생활관습으로 삼아 수천 년을 지켜왔다. 그렇게 대대로 이어진 시온지향성 신앙은 하나님의 카이로스 때가 되어 시온주의로 표출되었고, 그 결과 이스라엘 독립이라는 20세기 가장 위대한 사건으로 결실되었다.

4. 이스라엘독립은 일반역사로 취급될 수 없는 특별한 영역이다. 그것은 성경에서 반복적으로 제시된 예언의 성취이다. 많은 성경의 예언들 중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가르쳐주신 세 때와 관련된 내용이 특별히 중요하다(눅 21:20-28). 예수께서는 말씀하신 두 번째 것은 '이방인의 때'이다. 그것은 70년 로마에 의해 예루살렘이 멸망당했던 '징벌의 날'부터 시작되는 것으로서 "예루살렘은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밟히리라"(눅 21:24)고 예언되어있다. 예루살렘은 70년 멸망 이후 1900여 년 동안 일곱 강대국들에 의해 통치되었다(로마. 비잔틴, 아랍, 십자군, 마물룩, 오스만, 영국). 그런 예루살렘의 통치권이 1948년 이스라엘독립과 1967년 육일전쟁에 의해 이스라엘에게 회복된 것은 정치적으로 이방인의 때가 종식되었음을 의미한다. 바울은 이방인의 때를 복음전파와 관련시켜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롬 11:25)이라고 하였다. 바울은 특히 이방인의 때가 끝나는 증거로 이스라엘의 영적회복을 언급하였다. 그런 점에서 이스라엘독립 이후 특히 육일전쟁 이후 유대인들에게 복음이 급속히 전파되면서 메시아닉 유대인교회가 급성장하고 있는 것은 영적인 관점에서 이방인의 때가 끝났음을 알려주는 가시적 증거이다.

5. 제2의 종교개혁의 방향성은 이스라엘독립으로 형성된 새로운 변화를 민감하게 수용하여 미래의 새로운 비전과 도전으로 삼아야한다. 500년 전 종교개혁을 일으켰던 루터는 오늘 누구나 상식적인 것으로 알고 있는 이스라엘독립을 전혀 예견하지 못했다. 그가 말년에 과격한 반유대주의적 성향으로 돌아선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벌써 종교개혁 500주년을 보낸 우리들에게 새롭게 다가온 도전은 무엇보다도 이스라엘독립으로 생겨난 변화를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이다. 500년 전의 종교개혁이 이스라엘의 존재를 제외시킨 것이었다면, 새로운 제2의 종교개혁은 이스라엘의 신학적 가치를 전제로 시작해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들에게 부여하신 시대적 과제이다.

6. 금년 2018년은 이스라엘독립 70주년이 되는 해이다. 성경은 사람이 살아가는 한 생애를 70년으로 규정하고 있다(시 90:10). 또한 70년은 한 왕의 연대인 한 시대를 의미하기도 한다(사 23:15). 예레미야는 70년을 이스라엘이 바벨론에서 포로로 채워야할 기간으로 제시하고 있다(렘 29:10). 그런 관점에서 이스라엘독립 70주년은 이방인의 때가 종식되기 시작한 새로운 역사의 한 단계가 정리되면서 다음 단계로의 진입을 의미할 수 있겠다.   

7. 한국교회는 그 동안 '땅 끝'의 두 방향 가운데 원심의 이방지역 '땅 끝'에만 주력해 왔다. 새로운 평화통일시대를 맞으면서 한국교회는 '땅 끝'의 또 다른 방향인 이스라엘의 영적 회복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한국교회가 그런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영적 잠재력과 함께 필요한 여건을 미리 마련해 주셨다. 한국교회가 이스라엘선교에 더욱 관심을 가져야 할 이유는 역사적으로 반유대주의 경험이 없었다는 점이다. 그것은 최근 들어 유대인 메시아닉교회를 비롯하여 여러 유대인단체들이 한국교회에 큰 관심을 갖는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한국교회는 가장 효율적으로 이스라엘의 영적 회복에 기여할 수 있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