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섭 목사.
(Photo : ) ▲이경섭 목사.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을 오직 믿음으로 받게 하셨습니다. 믿음 외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다른 경륜을 하나님이 세우지 않으셨습니다.

사실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인다는 뜻이고, 전도자들이 "예수를 믿으라"고 외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은 죄인을 멸망에서 건지는 그리스도의 구속입니다. 죄로 멸망당할 우리를 살리시려 아들을 구속자로 보내주셨고, 우리는 그를 믿음으로 영생을 얻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사랑의 요체(要諦)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를 축약하여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 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요 3:16)"는 한 말씀으로 나타냈습니다.

사실 예수를 안 믿어 지옥 가는 것은 하나님 사랑을 안 믿어서입니다(정확하게 말하면 '믿음으로 성취되는 율법'과 '사랑' 모두를 저버린 것입니다). 사람이 지옥에 가는 것은 하나님이 강제로 보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 사랑을 거부하여 스스로 그 길을 선택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족케 하는 믿음

하나님의 사랑을 믿음으로만 받아야 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성경이 누누이 말씀하듯 죄로 타락한 인간이 베데스다 연못가의 38년 된 중풍병자처럼(요5:7) 전적 무능하기에, 하나님 사랑을 받아 낼 만큼의 공로를 세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외에 또 다른 한 이유는, 믿음만이 사랑의 시여자(施輿者) 하나님을 만족시켜 드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대가 없이 낼름 받는 것은 뻔뻔스러우며,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려면 당연히 하나님의 환심을 사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의 의도와는 거리가 멉니다. 사랑의 시여자(施輿者) 하나님은 사랑의 정의(定義) 그대로 "자기 유익을 목적으로 사랑을 베풀지 않기에(고전 13:5)", 시혜자(施惠者)가 믿음으로 사랑을 받아들일 때 만족하십니다.

오히려 대가를 지불하고 사랑을 받으려는 것은, 사랑의 본의(本意)와 시여자의 순의(順意)를 왜곡시켜 하나님을 불쾌하게 합니다. 사랑을 값없이 받게 하는 믿음은 우리를 만족시킬 뿐더러(요 6:35), 하나님도 만족시킵니다(히 11:6, 롬 4:20).

만일 하나님이 우리에게 댓가를 바라고 사랑을 베푼다면,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않고(고전 13:5)",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사 55:1)",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엡 1:6)"이라는 '사랑의 정의(The definition of love)'를 부정하는 것이 됩니다.

대가를 받고 사랑을 하는 것은 사랑이 아닌, 소위, "기브 앤 테이크(give and take)"의 상술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을 베푸셨지 잇속을 챙기는 장사를 하시지 않았습니다.

믿음이 아닌 율법의 행위에는 하나님 사랑이 영접되지 않습니다

하나님 사랑을 믿음으로 받아야 할 또 하나의 이유는, '사랑'은 오직 '믿음'과 만 조우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믿음, 소망, 사랑은 언제나 함께 있다(고전 13:13)"고 한 것은 사랑은 믿음과만 공존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영접하려고 '믿음' 대신 '행위'를 내보내면 사랑은 저 만치 달아나고, 대신 저주가 깃듭니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니라(갈 3:10-11)".

여기서 저주가 깃든다는 말은, 비로소 저주가 임하기 시작한다는 말이 아니라 기왕 임해있던 율법의 저주 아래 그냥 머물러 있게 한다는 뜻입니다. 그의 율법적 행위가 그리스도의 죽음을 헛되게 만들어(갈 2:21), 그에게 임해 있던 율법의 저주에서 그를 속량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3)". 믿음으로 하나님의 사랑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때, 그는 율법의 저주에서 해방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은 믿음으로만 수납되고 일구어집니다. 믿음 없이 하나님과의 사랑을 도모하려는 것은 죽은 자가 사랑을 하려는 것과 같고, 대상 없는 사랑 곧, 짝사랑을 하려는 것과 같습니다.

죄로 하나님에 대해 죽은 죄인은 먼저 이신칭의(justification by faith)로 살아나 하나님이 그의 영혼에 알려진 후에라야 그를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사랑에로의 진입로입니다. 믿음 없이 하나님사랑으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믿음은 사랑의 소통법입니다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사랑을 소통하도록 해 주는 것은 믿음입니다. 누가 여러분에게 "당신이 좋아서 선물을 드립니다"라고 할 때, 그 말을 믿으면 그 선물이 자기 것이 될 뿐더러 둘은 그것을 통해 서로 사랑을 일구게 됩니다. 그러나 시여자(施輿者)에게 미심쩍은 눈초리를 보내며 "당신이 왜 나한테 선물을 줘요?"라는 태도를 짓거나, 혹은 마지못해 받으면서 속으로 "무슨 꿍꿍이속이지?"라는 마음을 품으면 사랑이 도모될 수 없습니다.

오늘날 전도자가 "예수가 당신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라는 하나님의 사랑을 들려줄 때(요 3:16, 롬 5:8), 듣는 자가 "왜 예수가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어?"라며 미심쩍은 태도를 취한다면 하나님 사랑은 결실되지 못합니다.

나는 종종 생면부지의 장기기증자와 수혜자가 아무런 이해관계 없이 장기를 주고받는 것을 보면서, 무조건적으로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믿음으로 그것을 받는 인간의 관계를 연상합니다.

나아가 수혜자가 기증자로부터 일말의 의구심 없이 기증을 받아들이듯, 인간은 하나님이 베푸시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주저없이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을 합니다.

사랑이 성립되느냐의 여부는 그것을 믿음으로 받느냐가 관건입니다. 사랑은 그것이 의미하는 바대로, 아무 대가 없이 주어지는 것이기에 수납자가 믿음으로 받지 않고 따지고 든다면, 어떤 논리로도 그를 설득할 수 없습니다.

이 무조건적이고 무논리적인 사랑을 택자에게 설득하도록 보냄을 받은 분이 성령이십니다. 이상하게도 피와 성령으로 거듭난 택자는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들을 때 그것이 믿어지며, 그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하나님과의 사랑을 결실합니다.

영생 주기로 택정된 자들이 복음을 믿는 것은(행 13:48) 성령께서 그들을 설득시켜 주셨기 때문입니다(고전 12:3). 복음전도자가 오직 성령을 의지해야 할(고전 2:4)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내리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음'을 '사랑'의 상대 개념으로 설정하고, 하나님의 사랑에 믿음으로 반응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내리 사랑'이라는 사랑의 속성 때문입니다. 물론 이 '내리 사랑'이란 세상에서 통용되는 개념이며, 물이 아래로 흐르듯이 사랑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간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 통념은 하나님과 인간의 사랑에도 그대로 통용됩니다. 하나님은 사랑을 주시는 분이고 인간은 그 사랑을 받는 자 라는 뜻이며, 위의 하나님으로부터 부어지는 사랑을 인간이 받아들이므로 사랑이 구현된다 는 뜻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요일 4:10)"라는 말씀은, 사랑은 하나님에게서 시작되며 인간은 사랑의 수납자라는 뜻입니다. 인간이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일 없이, 내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겠다고 덤비는 것은 분수를 넘은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은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데서 하나님과의 사랑이 시작됩니다.

흔히 상상하듯 동질성끼리만 상호 교호(interactivity)하는, '사랑은 사랑과만 소통되고, 믿음은 믿음과만 소통된다'는 '동질성 원리(principle of homogeneity)'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엔 적용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고 우리는 인간이듯, 하나님은 사랑하시고 우리는 그 사랑의 수납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믿음으로만 구현됩니다.

물론 이것이 "마음, 뜻, 목숨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손상시키지 않습니다. 다만 순서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인 그리스도를 받아들여 중생한 후 에라야만 이 계명의 순종이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믿음으로 중생시키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신 30:6)".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byterian@hanmail.net)
저·역서: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쉽게 풀어 쓴 이신칭의(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