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모데전서 2:4에 분명히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 하셨는데 왜 일부 사람에게만 구원을 주시는지요? 선택적 구원과 상충되는 것이 아닌지요?
[답변]
디모데 전서 2:4
이 구절의 해석을 어렵게 파고들다 보면 신학적으로 아주 심각한 논쟁을 야기합니다. 당장 떠오르는 생각은 하나님이 다 구원 받기를 원하시는데 구원 받지 못한 사람들은 그럼 어떻게 된 것인가?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하지 않는가 아니면 전부 구원하실 능력이 없기 때문인가? 하나님의 공평성, 능력, 사랑에까지 의심이 꼬리를 물고 이어집니다. 그 동안 교회에서 배워 온 예정론과 이 구절을 연결해볼 때 상호 모순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예정론만큼 기독교인들 사이에 논쟁을 많이 일으키고 각 개인의 관심의 대상이 된 교리도 아마 없을 것입니다. 예정론을 강조하는 측에서 보면 구원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가 됩니다. 반면에 반대하는 측에서 보면 구원 만큼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탈한 불공평한 일이 없습니다. 여기서 그 전부를 논할 수는 없습니다.
완전한 비유는 아니지만 간단하게 이렇게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떤 마을에 의사가 한 명만 있었다고 칩시다. 그 의사는 어떤 마음으로 자기의 일을 수행하겠습니까? 제대로 된 의사라면 그 마을 모든 사람들 중에 단 한 사람도 병들지 않고 다 건강하게 살기를 원하고 혹시 병이 들어도 전부 자기에게 와서 고침을 받기를 원할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되어져 가는 현실은 어떠합니까? 병이 든지도 모르고 죽는 사람도 있고, 병이 들어도 의사보다 민간 요법을 찾는 자도 있고, 아무 이유 없이 의사를 싫어해 병원을 가지 않는 자도 있고, 심지어 병원 가는 것이 죽기보다 무서워 못 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의사가 고쳐 튼튼하게 만드는 사람은 일부일 수 밖에 없습니다.
의사가 시간이 없거나 능력이 모자라거나 동네 사람을 사랑하지 않아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닙니다. 나아가 의사가 가만히 있은 것도 아닙니다. 병원은 마을 한 복판에 있어 누구나 의사를 찾아 갈 수 있었습니다. 의사도 동네 사람들을 만나면 심심찮게 조금이라도 몸이 이상하면 병원으로 찾아 오라고 말해 주었는데도 그렇습니다.
이 예에 비추어 보면 본문은 의사(하나님)가 갖고 있는 근본적인 마음을 나타낸다면 실제 일어나는 현상은 예정론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이 구절 자체와 예정론과 연결시켜 해석하실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나아가 하나님의 인간 구원에 관한 본심과 예정론도 구태여 연결시켜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한 후 심히 기뻐했습니다. 인간을 지으신 목적이 하나님을 인간더러 찬양하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신 이유도 세상을 너무나 사랑했기 때문입니다.(요3:16) 그 세상이 특정한 일부 예정된 사람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의사의 입장에서도 병에 걸려 힘들어 하면서도 병원을 찾아 오지 않는 사람을 보면 더 안타깝지 않겠습니까?
예정과 복음
그럼에도 성경은 왜 예정과 선택을 강조합니까?(행4:28, 롬8:28-29, 엡1:5,11) 가장 먼저 생각할 것은 아무리 모든 사람이 구원 받기를 하나님이 원하시며 구원의 전과정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해서 모든 사람을 다 주권적으로 구원해야 한다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런 식의 생각은 결국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선악과를 만들지 말고 인간에게 자유의지도 주지 않고 로보트처럼 만들어 세상에 악이 존재하지 않고 선만 있게 했어야 한다는 말과 같아집니다. 선만 있으면 그것은 더 이상 선이 아닙니다. 악이 있어야 선이 선으로 가치를 발휘합니다. 이런 생각은 극단적으로 하나님이 차라리 인간과 이 땅을 만들지 않은 것이 더 나았다는 것으로까지 발전해버립니다.
구원 받을 자를 예정했다는 뜻이 그 반대로 하나님이 선택하지 않은 자를 적극적으로 저주하고 강제적으로 멸망으로 밀어넣는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모든 활동이 심판이 아니라 구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렘29:11) 정죄를 초래하는 것은 하나님께 순종하기를 기뻐하지 않는 인간의 본연의 죄성과 그에 따른 완악함이 원인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초점이 구원에 있다면 그에 반응하는 인간의 초점도 마땅히 심판보다 구원에다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은 구원 받은 자의 입장에서만 그 은혜를 실감할 수 있는 것이지 아직 구원 받지 않은 자나 타종교인, 불신자들로선 아예 이해조차 안 되는 내용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고 말씀하신 그대로 입니다.
예수님의 복음을 이해하려면 하나님의 무한한 긍휼과 인간의 전적 부패라는 두 가지 측면을 동시에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인간은 완전히 부패하고 타락하여 스스로 의 의로써 하나님을 만족시킬만한 수준에 도달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오직 인간의 내부를 변화시켜서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믿도록 해주시는 하나님의 적극적이고도 주관적인 사역만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구원을 받음에 있어 자신은 전적으로 무능하고 부패하여 단 한치도 자력으로는 기여할 수 없었다는 것을 철저하게 자각한 자라야 예정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본인이 100% 무능했다면 오직 그 구원은 타자로부터 그저 받은 것이지 자신이 쟁취한 것이 아닌 것입니다.
말하자면 딤전 2:4에 나타난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바탕을 둔 성령님이 자기 영혼을 변화시켜 새 사람으로 거듭나도록 역사했다고 믿는 자의 고백이 예정이라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따져 구원이 예정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라면 인간 쪽에서 구원을 받을 만큼 하나님 마음에 드는 어떤 것이 있었다는 뜻이 되어버리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그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도 능력도 아닌 인간의 공적이 되어 버립니다.
신자는 모든 초점을 오직 그리스도에 두셔야 합니다. 예정론이라는 교리를 믿으면 구원을 얻고 그렇지 않으면 얻지 못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의 초점이 하나님의 불공평성이나, 예정의 교리 자체에 두거나, 혹시 자신이나 주위 가까운 사람이 그 선택에 포함되지 않았으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앞서면 십자가는 퇴색하고 의미가 없어집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 받기를 원하시지만 구원의 가능성은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 이유는 전적으로 인간의 부패와 죄성 때문이지 하나님의 불공평성에 있지 않습니다. 모든 인간이 단 한 명의 예외 없이 전적으로 부패한 죄인이기에 그 구원의 길은 오직 십자가에 돌아가신 주님의 공로를 믿어 선물로 얻는 것 뿐입니다. 신자의 믿음이 예정되어 있었든 아니든 그리스도 때문에, 그를 믿는 믿음 안에서만 구원 받은 것입니다.
선악과와 자유의지, 인간의 타락, 십자가 상의 성자 하나님의 죽음을 통한 구원 그 모두가 인간을 지으시고 우주만물의 주인 되시는 절대자인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주권적 역사였습니다. 그 발단과 과정과 결과까지 모두를 예견(豫見)하셨지만 그 모든 것들에 영향을 받지 않으시는 그분 만이 하실 수 있는 은혜로운 구속입니다. 예정을 통한 구원도 인간들이 어떤 결정을 내릴 것인가에 상관 없이 하나님의 인간 을 향한 무한하신 사랑만이 그 배경의 유일한 근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