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 )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

개 돼지 같은 자 


언뜻 보면 본문은 문맥을 따질 때에 전혀 앞 뒤와 연결되지 않는 것 같다. 앞의 말씀은 남의 티를 보기 전에 자기 허물을 먼저 보아 남의 티를 빼주어라고 했다. 뒤에는 신자가 구하고 찾고 두드리면 하나님이 주신다는 약속이다.  그 중간에 갑자기 구체적인 내용과 이유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비록 비유적인 표현이긴 해도 개와 돼지에게 거룩한 것과 진주를 주지 말라고 한다. 

우리를 더 당혹하게 만드는 것은 예수님의 뜻은 항상 서로 잘못을 씻어주고 사랑을 나눠 주 안에서 함께 변화되어라는 것이다. 그런데 본문에선 아예 남에게 사랑을 베풀지 말라고 했고 심지어 베푼 사랑이 거꾸로 원수가 되어 돌아 올 수도 있다고 경고까지 했다. 

무슨 뜻인가? 좋은 의도로 상대 눈의 티를 제거하려다 오히려 상대의 자존심을 건드려 반발을 살 우려가 있으니 신자끼리는 아무리 큰 잘못이라도 모른척하라는 것인가? 사람을 골라가며 사랑을 베풀어라는 뜻인가? 개와 돼지는 당시 이스라엘에선 더럽고 추하고 죄가 많은 것의 상징이다. 그러나 본문에선 그런 뜻으로 사용되지 않았고 거룩한 것, 진주의 가치를 전혀 알지 못하는 자를 말한다. 또 가치를 모르기 때문에 엉뚱한 잘못을 저질러 남을 상하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미국은 갱이나 강도에 대비해 총기를 소지하고 정당 방위 목적에 한해 그 사용을 허용해준다. 분명히 총기 사용에 나름대로 선한 목적이 있지만 만약 바보나 미친 사람에게 쥐어주면 오발 사고가 일어나고 갱이나 테러리스트에겐  살인 무기가 되는 것과 같은 경우다. 

그렇다면 개 돼지는 누구이며 거룩한 것과 진주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예수님이 개라고 욕할 자들이 누구인가? 바리새인들 뿐이다. 진주는 무엇인지 모르겠는가? 성경 말씀이 앞 뒤 연결이 잘 안될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일일이 목사에게 물어 보거나 주석을 찾아야 하는가? 그럴 시간과 여유가 없다면 어떻게 하는가? 앞뒤 연결이 안 되니까 연결이 잘 될 때까지 묵상하며 계속해서 읽어 보는 수밖에 없다.  

마7:12절 끝에 예수님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가?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또 12절 말씀을 '그러므로'로 시작했다. 12절이 그 때까지 말씀하신 것의 결론적 요약이라는 뜻이다. 1절에서 11절까지 읽다가 윤곽이 안 잡히다가도 12절에 오면 어느 정도 감을 잡을 줄 알아야 한다. 즉 1-11절은 사람들이 율법을 오해하고 있는 부분들에 대해 예수님이 올바르게 설명해주었다는 뜻이다. 전체 문맥을 보면 진주는 율법이고 그 가치를 알아 보지 못한 바리새인들이 개 돼지인 셈이다.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목적은 신4:14에서 밝히신 대로 "너희로 건너가서 얻을 땅에서 행하게 하려"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유월절 어린 양의 피로 죄악의 땅 애굽에서 구원을 얻었고 홍해를 지남으로 세례까지 거쳤다. 건너가서 얻을 가나안 땅은 하나님의 자녀 된 자가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과 사랑 속에서 살아야 할 구원 이후의 삶의 상징이다. 율법은 세상 속에서 신자가 신자답게 서 있어야 하고 세상과 싸워 이겨야 할 기준이다. 

그래서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 들어 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신28:1,6)이며 반대로 "그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들어 와도 저주를 받고 나가도 저주를 받으리라"(신28:15,19)고 했다. 율법을 위반했다고 구원을 취소하여 가나안 땅에서 쫓아 내지 않는다. 이스라엘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토록 지키실 하나님의 인도를 제대로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이미 가나안 땅에 들어 와 있다. 

그럼에도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그것도 자기들이 만든 세세한 규정을 위반하면 구원을 얻지 못한다고 가르쳤다. 사람들에게 종교적인 무거운 멍에를 쒸웠고 천국 문을 닫았다. 마7:2에서 너희의 비판과 헤아림으로 도리어 너희가 비판과 헤아림을 받는다는 말씀에서 사용된 동사의 원어적 용법이 계속 반복되는 동작이 아니라 일회적 행위를 강조하는 부정 과거형이다. 단순히 남을 비판하면 상대의 비판을 불러 일으킨다는 뜻 이전에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위반하는 자들은 구원 받지 못한다고 정죄한 것 때문에 오히려 그들이 하나님의 일회적인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이 그 일차적인 뜻이다. 

따라서 거룩한 것과 진주를 개나 돼지에게 주지 말라는 것이 죄에 빠진 자나 도덕적, 인격적, 종교적으로 수준 낮은 자들을 상대하다가 자칫 같이 더러워질 수 있으니 상대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대신에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자의로 해석한 것으로 얼마든지 죄를 저지르고 남에게 피해 줄 수 있으니 조심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우습게 안 자 

이것은 2천년 전 바리새인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오늘 날에도 얼마든지 동일한 잘못을 범하고 있다. 교회에 분쟁이 나면 서로 하나님의 뜻이라고 우기며 성도들끼리도 성경 말씀으로 비판하고 상처를 주고 받는다. 교회 외부적으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십자가 복음을 배척하다 못해 증오한다. 

이상하게도 분명 미신적이고 이단의 요소가 충분이 있고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되는 종교는 쉽게 수용하면서 예수라면 무조건 싫어한다. 무당에게 굿을 하고 점쟁이에게 돈을 갖다 바치는 한이 있어도 당신은 죄인이며 예수님이 그 죄를 사하시려 죽으셨으니 그 분을 영접하라고 권유하면 입에 거품을 물고 덤벼든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하게 보일 뿐이다.(고전1:18) 복음의 가치를 전혀 알지 못한다. 오죽하면 요한 웨슬레가 이 구절에 근거해 이단에게는 복음을 전할 필요가 없다고 까지 해석했겠는가? 성경에는 명시적으로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딛3:10)고 했다.     

그런데 사실은 바리새인들은 인격적, 도덕적, 종교적으로 뛰어난 자들이었다. 물론 가식적인 면은 분명히 있었지만 그것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사람은 누구나 다 위선적이다. 말하자면 그들은 개 돼지 수준이 아니었다. 율법에 가장 정통했다. 나아가 여호와를 알고 믿었고 하나님의 일에 열심으로 헌신했다. 일반인들이 꼼짝 없이 그들이 시키는 대로 따랐다는 자체가 율법을 가장 잘 해석했으며 신령했다는 증거다. 

문제는 그들은 율법을 자기들 임의로 해석했다는데 있다. 신자를 살리고 복을 주려는 하나님의 사랑이 담긴 율법으로 사람을 비판하고 정죄하여 죽이는 데 사용했다. 자기 생각으로 해석했다는 것은 성령의 조명 없이 사사로이 성경을 풀었다는 말이다. 성령의 임재가 없었다. 

그들은 자기 식으로 여호와를 믿었다. 자기 욕심을 크게 하고 자기 계획대로만 행했다는 뜻이 아니다. 여호와를 공부해서 알게 되었지 직접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실체를 일대일로 만나는 체험이 없었다. 말하자면 하나님을 믿기는 믿었지만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았다. 하나님마저 자기들의 종교적, 사회적 기득권을 유지하고 확장하는 일에 사용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을 우습게 안 것이다.    
        
하나님 앞에 선 자 

"웃시야 왕의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 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스랍들은 모셔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그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그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이같이 창화하는 자의 소리로 인하여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집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그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사6:1-5) 

이사야 선지자가 성전에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실체를 대면하는 장면이다. 천사들의 찬양 중에 하나님이 성전 보좌에 임재했고 성전 가득히 그 분의 영광으로 충만해졌다. 천사들의 찬양이 너무나 웅장해 성전의 문지방 터가 요동했다. 환상 중에 하나님을 만난 것이다. 

환상이라고 해서 시각적 착시 현상이 생겨 헛것을 본 것이 아니다. 절대 선이신 하나님의 본체를 직접 대면하면 죄와 더러움 투성이인 인간은 그 자리에서 소멸하여 없어진다. 하나님이 인간이 이해하고 보고 들을 수 있는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하나님을 보긴 보되 세상의 어떤 사물로도 비유할 수 없고 어떤 언어로도 표현할 수 없다는 뜻에서 환상이라는 것이지 분명한 육신의 눈으로 보았다. 

하나님은 절대로 인간을 무의식 상태로 만들어 헛소리 하게 하는 것으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인간의 지성, 감정, 의지적인 능력을 생생하게 살려둔 채 만나주신다. 인간은 자신의 온전한 정신으로 절대자, 지존자, 우주 만물의 주인이며 나를 지으시고 구원하시며 인도하고 보호하셔서 영원히 책임져 주실 하나님이 내 앞에 임재 해 있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한다.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이 꼭 신비한 체험을 하는 것이 아니다. 각 개인마다 그 경험은 다 다르다. 이사야처럼 환상을 보지 못할 수 있다. 아니 아무 것도 안 보이고 들리지 않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그러나 성령이 임재하면 평생에 느껴보지 못한 평강이 영혼에 흘러 넘친다. 세상과는 전혀 다른 어떤 거룩한 기운이 자기를 감싸고 있음을 느낀다. 

또 다시 이상하게 생각할 것 없다. 순간적으로 세상 모든 죄악과 모순과 고난이 제거되고 복잡하던 것들이 잠시 중지됨으로 해서 자기의 내면과 외부 전체가 완전한 고요에 빠진다. 그런 중에 어떤 분명한 제 삼자적인 실체와 일대일로 맞닥뜨리고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다. 단순히 신자 자신의 내면적 사고활동의 변화나 성숙이 절대 아니다. 소위 말하는 식으로 하나님도 인간이 생각하기 나름이며 내 마음 속에 있다는 것과는 전혀 차원이 다르다.  

그 때 신자에게는 "아! 바로 지금 이 분이 예수님이구나"라고 확신할 수 있다. 물론 그 분의 형체나 이런 만남의 과정을 구체적으로 인간의 말로 묘사하고 설명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선 여전히 일종의 환상이다. 그러나 한 가지 절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하나님 당신이신 예수님이 나를 알고 지금 찾아 와 주셔서 나의 모든 죄를 사해주시고 사랑하고 계시는구나"이다. 세상의 자녀였던 자가 이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부르는데 전혀 어색함이 없어진다.    

입술이 부정한 자


하나님을 개인적, 인격적, 체험적으로 만난다는 의미는 창조주 하나님과 그 분의 피조물인 인간이 생전 처음으로 인간의 지정의를 통해 상호 교통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때까지 일방적으로 치성과 열심을 바쳐 비나이다 비나이다 빌기만 하던 것과는 다르게 상호 대화가 된다. 그 분이 먼저 보여 주시고 알게 해 주신 것에 대해 인간은 온당한 반응을 나타낸다. 지성으로는 지금 나를 찾아 오신 분이 예수님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감정으로는 그 분의 온전하심 앞에 피조물로서 두렵고 떨림과 함께 거룩하신 영광을 직접 본 기쁨을 맛 본다. 의지로는 이전의 썩어져 가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주님의 자녀로 새 삶을 살겠다는 헌신과 결단이 따른다. 

예수님을 만난 인간의 첫 반응은 이사야가 보였던 것처럼 누구에게나 반드시 동일하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평소 때 말투가 거친 쌍소리, 욕, 거짓, 사기, 음란한 말을 많이 했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부인하고 내 마음대로 살겠다고 혼자서 자신 만만해 했다는 것이다. 

"거룩한 하나님이 무슨 필요가 어디 있어? 절대자가 있어도 우리 먹고 마시고 입을 것만 책임져 주거나 모자랄 때 도와 주는 분이면 족해. 이스라엘을 솔로몬 때처럼 주변에서 최강국으로 만들어 주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으로 모실 이유가 없어. 이 천년 전의 로마 사형수와 내 죄와 무슨 연관이 있어? 하나님이 어떻게 인간으로 오고 물 위를 걷고 죽었다 살아날 수 있어? 세상에 그런 엉터리가 어디 있어? 또 그 예수가 내 밥을 먹여 주나 옷을 사주나?" 한 마디로 인간이 최고다. 

하나님이 성전에서 이사야 선지자를 만나 주시기 전에 이런 한탄을 하셨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사1:3,4)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 바리새인들이 개나 돼지 같다고 한탄하셨듯이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이 소나 나귀보다 못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처음부터 자기들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모르고 믿지 않았던 것이 아니다. 4절 끝에 "물러 갔도다"라고 했다. 이전에는 하나님 앞에 있었다는 뜻이다. 그러다 하나님이 자기들 마음에 안 차니까 우습게 알고 안 믿기로 한 것이다.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가 인간더러 거룩하게 살아라고 하니까 귀찮고 싫어진 것이다. 대신에 인간이 하나님더러 우리를 배 불리 먹이지 않으면 내 멋대로 하겠고 그래도 내 책임이 아니라 하나님 탓이라고 한 것이다. 

예수를 만난 자

하나님을 만난 자, 성령으로 거듭난 자, 예수를 구세주로 영접한 자는 자기 존재가 얼마나 철두철미하게 부패된 자임을 안다. 세상의 어느 누구와 견주어도 하나 나을 것이 없는 죄인 중의 괴수임을 절로 고백하게 된다. 완전히 죽을 수 밖에 없는 행악한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라고 자신과 대면하고 있는 주님 앞에 실토하게 된다. 

나아가 이사야 선지자처럼 자기가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모든 백성들도 입술이 자기처럼 부정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예수님의 사랑을 접해보지 못한 자들의 비참한 영육간의 상태를 볼 수 있게 된다. 아무리 세상적으로 잘 먹고 잘 입고 잘 살아도 그 영혼이 얼마나 공허하고 갈급하며 참혹한 위치에 처해 있고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자기와 하나 다를 바 없는 참으로 불쌍한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바리새인들은 분명히 종교적 지식이 많았고 도덕적으로 고상했고 인격적으로 존경을 받았다. 그들은 남들보다 착하게 살아 사람들의 칭찬 받는 것만을 삶의 목표로 삼았고 실제로 그렇게 살았으며 그래서 사람들로부터 착하다는 칭송을 받았다. 그들의 인생관, 인간이 인간답게 살며 복을 받는 길은 율법을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가르쳤다. 여기까지는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런데 율법을 못 지키는 자들을 자기들 수준으로 끌어 올리는 것을 자기들이 여호와 앞에 해야 할 사명이라고 생각했다. 단 한 번도 스스로 "화로다 내 입술이 부정한 자로다"는 고백을 해 본 적이 없어서 그렇다. 거룩하고 온전하신 하나님의 실체를 대면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진정한 모습을 참 진리이자 절대적 선이신 하나님에게 비춰볼 기회가 없었다. 비교 분석할 대상이 전부 세상 사람들 뿐이었다. 세상에선 자기들이 가장 착하니까 자기가 망하게 되었고 다른 사람들 또한 불쌍한 존재라고는 꿈에도 생각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남들로 하여금 율법대로 살게 만들려고만 했지 그 율법 속에 담긴 하나님의 사랑을 전해 줄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그 사랑을 찾을 생각도 안 했다. 하나님의 참 사랑 없이도 자기들은 이미 세상에서 최고요 사람들로부터 가장 많은 사랑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의 가장 두드러진 공통점은 눈물이 많아진다는 것이다. 제 경험에 비추어 봐도 교회 출석한 후 처음 몇 달 동안은 설교 듣는 중에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목사님이 매주 특별히 슬픈 이야기를 하시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성경을 한 구절만 읽어도, 찬송가를 부를 때 그 가사만 생각해도, 기도를 하려고 엎드리기만 해도 그저 눈물이 앞을 가렸다. 천하의 죄인인 나 같은 자도 주님이 먼저 찾아 와 만나 주시고 용서해 주셔서 사랑하고 계시다는 그 사실 하나만 생각해도 감사의 눈물이 절로 나왔다. 

또 예수를 믿지 않는 자들만 보면 너무 불쌍하고 안타까웠다. 예수 믿기 전에는 예수 믿는 사람들만 보면 병신, 쪼다(?), 위선자로 멸시했는데 예수를 믿고 나니까 예수 믿지 않는 자만큼 초라하고 가난한  자가 없었다.      

십자가 복음 앞에 선 자

예수를 믿으시요라고 십자가 복음을 전하면 왜 사람들이 입에 거품을 물고 대드는가? 물론 소위 우리 예수쟁이들이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못해서다. 방정맞게 입만 앞서 문자 그대로 입술이 부정한 자들이라는 것이 이유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그러나 더 중요한 까닭은 세상 사람들이 거룩하고 온전한 하나님 앞에 단 한 번도 무릎을 꿇어 본 적이 없어서 그렇다. 

하나님을 만난 자는 인생을 보는 태도가 180도 달라진다. 절대로 누가 더 착하고 더 나쁜가의 관점으로 상대를 판단하고 정죄하지 않는다. 그것은 전과가 수십 개씩 달린 사람들이 감방 안에서도 누가 높은 자리 차지할 것인가 다투는 것과 같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더러 착하게 살아라, 율법을 지켜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제발 단 한 번이라도 하나님을 일대일로  만나라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앞에 벌거벗고 나오라고 권한다. 성령님께서 흑암으로 가려진 저 영혼의 깊숙한 곳에 거룩과 의와 생명의 빛을 비추어 달라고 그 영혼을 끌어 안고 눈물로 하나님께 간구한다. 

먹고 마시는 것이 부족해 헉헉거리는 자라도 예수만 안다면 절대 불쌍하지 않다. 예수는 모른 채 이 땅에서 그저 먹고 마시고 입을 것에만 매어 달리는 자들이 훨씬 더 불쌍하다. 육신의 헐벗은 것이 벗은 것이 아니요 그 영혼에 십자가 사랑이 자리잡지 못한 것이 정말 가난한 자다.    

요한 웨슬레가 복음을 전하고 돌아 오는 제자들에게 항상 묻는 질문이 있었다. "예수를 영접하고 회심하더냐? 아니면 화를 내더냐?" 그 두 가지 반응 중에 하나가 아니면 복음을 잘못 전한 것이라고 제자들을 야단쳤다. 

사람들이 십자가 진리에 보일 수 있는 반응은 둘뿐이다. 그 진리 앞에 완전히 항복하든지, 아니면 진리가 싫어서 도망가는 것이다. 진리가 싫은 것이 아니라 사실은 흑암이 좋아서다. 그러면서도 자기들이 추구하고 있는 세상이  얼마나 죄악과 거짓과 죽음이 많으며 진리가 아님을 저들도 알고 있다. 전도자에게 도리어 괜히 큰 소리로 화를 내는 것은 죄와 쾌락을 쫓아 가는 자기가 스스로 쑥스러워 핑계 대고 변호하는 것에 불과하다.   

솔직히 우리가 예수를 믿었을 때를 생각해 보라. 예수 믿기 전에 예수를 꼭 믿어야지, 안 믿으면 큰 일 난다고 생각한 적이 있는가? 그 분만이 유일한 진리요, 절대적 구원의 길이요, 예수 십자가 외는 인생이 살고 죽는 길이 없다는 말에 동의한 적이 있는가? 아니다. 그저 착하게 살면 복 받고 천당 가겠지 정도였다. 모든 종교의 하나님은 똑 같은데 꼭 기독교와 예수여야만 한다는 것에 일체 수긍하지 않았지 않는가? 

그러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성령으로 거듭난 후에는 언제 그런 생각들을 했는가 조차 잊어 버렸지 않는가? 아니 내가 그런 어리석은 생각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이 신기하지 않는가? 과연 그럴 때도 있었던가 싶지 않는가? 예수를 안 믿었더라면 어떡할 뻔 했지, 정말 큰일 날 뻔 했다는 안도감이 생기지 않았는가? 또 불신자들을 보면 어떻게 이 간단하고 영원한 진리를 못 알아 먹는지 답답하지 않는가? 그럴수록 더 예수를 전해주고 싶지 않는가?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을 개와 돼지로 표현한 것은 정확했다. 그들을 수준이 낮고 추한 자로 본 것은 아니다. 개 돼지는 평생을 가도 자기 힘으로는 절대 진주의 가치를 모른다. 바리새인들 뿐만 아니다. 모든 자연인들이 다 그렇다. 하나님 만이 개 돼지를 사람으로 변화시켜 줄 수 있다. 그래서 더욱 기독교는 다른 종교처럼 착하게 사시오 라고 하지 않고 제발 예수님을 만나시오 라고 전해야 한다. 복음만이 인간의 살 길임을 전하고 또 전해야 한다. 물론 이단에게도 복음을 전해야 한다. 밤중에 찾아 온 바리새인 니고데모에게 십자가 진리의 핵심을 전해준 예수님처럼 말이다.   

지금 이 시간 여러분에게 가장 소중하고 귀한 진주는 무엇인가? 예수님인가 아닌가? 예수님이 아니었더라면 내 인생이 정말 큰 일 날 뻔 했다는 확신이 있는가? 아니면 혹시 예수님보다 세상의 형통이 더 소중한가? 또는 예수님이 세상의 형통을 보증해 주리라 기대하는가? 만약 후자의 두 경우라면 당신은 아직 예수를 제대로 믿는 것이 아니다. 예수를 일대일로 만나 내 입술이 부정한 자라는 고백을 해 본  적이 없다는 증거다.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진심으로 주님 앞에 무릎 꿇고 이 죄인을 긍휼히 여기셔서 저를 만나 달라고 간절히 소원해 보라. 주님은 찾아 오시며 만나 주시며 참 사랑을 알게 해 주신다. 그 때 비로소 당신은 신자가 되며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하게도  참 인간이 된다. 인간이 정말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길로 생전 처음으로 들어서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