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왜 죄 없는 어린 아이가 일찍 죽도록 버려두시는가?
주위에 보면 아주 어렸을 때에 갑자기 불의의 사고나 병으로 비참하게 죽는 경우를 봅니다. 그것도 아주 신실하게 믿는 신자의 자녀가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왜 아이를 세상에 보내 놓고도 그렇게 일찍 불행을 겪도록 버려두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답변]
고난의 정의
성경에서 가장 큰 불행을 겪은 자를 한 사람만 꼽으라면 아무래도 욥을 들 수 있습니다. 경건하고 믿음이 좋으며 윤리적으로도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 그런 그가 하루아침에 아무 잘못 없이 슬하의 자식 전부와 전 재산을 잃었고 아내도 자신을 버렸으며 도저히 고통이 격심해 견딜 수 없는 중병까지 얻었습니다. 이 질문은 바로 욥이 하나님과 씨름 했던 문제와 동일한 성질의 것입니다. 욥이 이런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가 알고 믿고 있던 하나님으로는 자기에게 일어난 일들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어린 아이가 일찍 죽는 이유를 알지 못하겠다는 질문은 그 아이가 평균 수명보다 훨씬 일찍 죽었기 때문에 그에 따른 필연적인 원인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 것입니다. 그 원인이 아이 쪽에 있던, 부모에게 있던, 세상과 환경 쪽에 있던, 심지어 하나님 쪽에 있던 반드시 이유가 있기에 죽었다는 선입관에서 나오는 의문입니다. 그런데 어린 아이니까 잘못한 것 별로 없고, 부모도 사랑으로 최선을 다해 길렀고, 아직 세상은커녕 집 문 밖에도 나간 일이 없으니 결국 원인은 하나님 쪽의 어떤 불공평성 내지 알지 못할 이유가 있지 않느냐로 귀착됩니다.
논리적인 사고의 흐름은 아주 자연스럽고 정상적입니다. 그럼 무엇이 잘못입니까? 이 문제를 이해하려면 세상만사에는 필연적인 원인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면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느냐부터 먼저 확실히 해 두어야 합니다. 만약에 전자의 입장이라면 다른 곳에서 도저히 원인을 찾을 수 없으니 세상만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뜻이 있을 것이라는 결론 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거기다 신자라면 하나님은 신자의 유익을 위해서 사랑을 베푸시는 분인데 그런 큰 불행을 허락하다니 도저히 이해가 안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이란 말의 뜻부터 확실히 해둘 필요가 있습니다. 고난은 전혀 기대나 예상하지 못하고 있어서 어쩔 수 없이 겪게 되는 어려움을 말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감수 하려는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가 졸지에 당하는 고통이 고난입니다. 군대 가서 훈련 받고 대학 입시 공부하느라 고생하는 것을 아무도 고난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물론 둘다 육신적 정신적으로는 고되지만 군대 훈련의 혹독함은 이미 예상한 것이고 입시공부는 밝은 미래를 위해 자청해서 겪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왜 신자에게 고난을 주시는가라는 의문 내지 불만이 드는 것은 연약한 인간으로선 자연적인 반응이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논리적 측면에선 모순된 생각입니다. 아무 이유 없이 당하는 것이 고난인데도 그 이유를 따지면 앞 뒤 말이 안 맞다는 뜻입니다. 그럼 세상에 이유 없는 고난이란 아예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아야 된다는 말과 같아집니다.
기독교 신앙은 인과율(因果律)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닙니다. 인과율이란 사람들의 지정의로 판단하는 이성의 범위 안에서는 이유 없는 결과가 없다라는 것을 믿는 사상입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도저히 원인은 알 수 없는데 결과만 있는 현상이 많습니다. 가장 간단한 예로 인간의 이성만으로는 인간이 왜 이 땅에 있게 되었는지 도저히 증명할 길이 없습니다.겉으로 드러나는 현상만으로 분석하는 인과율로는 창조와 진화 어느 쪽도 모두가 만족할만한 확실한 근거를 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성을 넘어서는 차원이 있음을 인정해야 하며 특별히 하나님과 연관되는 문제는 당연히 인과율에 앞서 먼저 그 분을 완전히 신뢰하는 믿음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또 이성으로 설명되지 못하는 그런 현상 가운데는 인간에게 유익되고 좋은 일들도 많습니다. 또 쉬운 예를 들자면 왜 인간이 이 땅에 있으면서 공기와 물과 햇빛 등등 가장 필수적이고 한 순간도 없으면 살 수 없는 것들이 무한정 공짜로 제공되고 있는지 인과율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인간이 인과율로만 모든 사물을 따지겠다고 덤비면서도 그런 은총의 원인은 전혀 따지지 않습니다. 일상사에서 원인 모를 경사가 생기면 단순하게 행운이나 재수로 치부하고 어느 누구도 문제 삼지 않습니다. 인간 스스로의 논리적 모순을 드러낸 것입니다.
인간이 정말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고 공평하게 되려면 그런 행운의 원인도 따져보아 아무 이유 없는 유익이나 축복은 절대 받지 않겠다고 주장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고난의 원인을 따지자는 주장도 공평 타당성을 지닐 수 있습니다. 논리적으로 따지자면 그렇다는 말입니다.
그런데도 인간이 고난에 대해 어떻게 이해하는가 하면 하나님이 신자의 형통을 이유 없이 훼방하거나 어떤 잘못에 대한 심판의 뜻 둘 중의 하나로 고난을 허용하는 것이라고 미리 짐작해버립니다. 인간이 스스로의 불공평성과 모순된 사상에 바탕을 두고 모든 것을 미리 판단해 놓고 질문한 것입니다. 마치 어떤 사람이 운동을 열심히 했고, 영양 섭취와 휴식도 충분히 취했고, 술 담배 등 몸에 안 좋은 것을 즐긴 적이 전혀 없고, 나아가 정신적으로도 경건한 신앙 생활을 통해 평강을 유지했는데도 중병이 걸렸습니다. 그래서 의사를 찾아가 도저히 이 병을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병이란 반드시 운동, 영양, 휴식부족, 정신이나 몸에 안 좋은 일이 있어야만 병이 생긴다고 생각하는 것이나 고난에 대해 이해하는 수준이 같습니다.
욥기의 축복
성경에 욥기가 있다는 것은 기독교 신자에게는 너무나 큰 축복입니다. 고난의 뜻과 원인을 밝혀 놓은 책으로 특별히 도저히 이해 못할 고난에 대한 해법서이기 때문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기 위해 가장 먼저 욥이 하나님에 대한 인식과 믿음의 상태가 어떠했는지 살펴봅시다.
"그 잔치 날이 지나면 욥이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케 하되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으니 이는 욥이 말하기를 혹시 내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배반하였을까 함이라 욥의 행사가 항상 이러하였더라."(욥1:5)
아들들이 잔치로 흥겹게 지낸 다음 날은 혹시 행동으로나 심지어 마음으로나마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을까 걱정하여 아들들을 아침에 불러 성결케 하고 명수대로 번제를 지냈는데 항상 그러했다고 합니다. 자식들도 항상 성결케 하고 일일이 번제를 드렸으니 욥이나 자식 모두 하나님 앞에 죄가 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욥의 자식들을 하나님은 순식간에 거친 들의 폭풍으로 전부 죽여 버렸습니다. 욥으로선 자기 자식들이 죄도 없고 그 죽음의 원인도 모르겠고 더구나 전혀 예상치도 않았던 일입니다. 이를 두고 성경은 하나님이 사단을 통해 욥의 믿음을 시험하려고 그렇게 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험은 통상적인 시험과는 달랐습니다.
사단과 하나님이 욥을 가운데 두고 그의 믿음에 관한 내기를 한 것입니다. 사단은 욥이 하나님을 경배하고 믿음이 좋은 이유는 현실적으로 복을 많이 받았기 때문이므로 그 축복을 전부 없애 버리면 하나님을 원망할 것이라는 데 걸었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은 내 종 욥은 그런 현실의 형통과는 상관 없이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서 없느니라"에 걸었습니다. 첫 내기에 사단이 졌습니다.
그래서 사단은 현실의 축복은 없어져도 생명이 살아 있으므로 하나님을 경배하지만 "뼈와 살을 치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할" 것이라고 재차 도전했습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욥을 믿었고 사단이 욥의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악창이 나도록 허락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욥은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 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치" 않았습니다. 사단은 두 번째 내기에서도 졌습니다. 그럼 여기서 욥기는 끝이 나야 맞습니다. 더 이상 기록할 내용이 없어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내기 마지막 부분에 "욥이 입술로 범죄치 아니하니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단과 하나님의 내기는 분명히 끝이 났지만 하나님은 사실은 사단과 내기한 것이 아니라 욥과 내기를 한 것입니다. 욥은 입술로는 범죄치 않았지만 그 마음 속의 의심과 불신은 완전히 없어지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사단이 기대했던 것처럼 입술로 하나님을 대면하여 욕을 하지 않았던 이유는 아마도 그러면 더 큰 벌이 오리라는 것을 믿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성경에 명시적 기록은 없지만 그 이후에 전개되는 욥과 세 친구들과의 논쟁을 살펴 보면 욥이 하나님을 완전히 이해하고 의심이 제거 된 것이 아니었고 그 반대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욥이 경건하여 사단의 내기 정도는 욥의 평소 행위와 믿음을 봐서도 혼자 힘만으로도 얼마든지 이겨내리라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단 하나라도 죄가 되는 행위는 하지 않았고 심지어 자기 아들들이 마음으로라도 하나님을 배반했을까 걱정하고 번제를 드릴 정도였으니 하나님에 대한 순종, 경외, 헌신, 충성으로는 성경 역사상 최고의 인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욥이 가진 그런 정도의 믿음으로는 흡족해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단이 걸어 오는 내기를 통해 오히려 욥의 믿음을 한 단계 높여 주실 생각을 한 것입니다. 사단과의 내기는 욥의 평소 믿음을 믿었기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욥은 절대자 하나님의 전지전능성에 대한 신뢰는 놓치지 않았습니다. 물론 간혹 이해되지 않고 어쩌면 마음 속으로 의심과 불평이 생겨도 하나님을 자기 스스로는 절대 버리지 않았습니다. 자기 믿음이 그것을 허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오늘 날 대부분의 신자도 욥과 동일한 수준의 믿음은 갖고 있습니다. 속에 가득찬 의심과 불평은 해결되지 않아도 하나님을 배반 하지는 않습니다. 그런 욥을 하나님은 그보다 더 깊고도 새로운 관계를 맺기 원하셨는데 그것을 이루기 위해 욥의 자식을 죽이는 방법을 택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욥과 새로운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자 유일한 길이었습니다.
하나님 사랑의 근거
하나님이 이 시험에 가졌던 목적은 욥이 믿음으로 그런 격심한 고난을 이겨내게 만드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욥의 고난에 대한 인식과 이해를 바꾸는 데 있었습니다. 욥의 생각은 자기가 무죄해서, 항상 번제를 드려서 심지어 자식의 죄까지 씻었기 때문에 벌을 받을 이유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의 친구들이 갖고 있는 단순하게 죄 안 짓고 잘 믿으면 그것에 비례해서 복을 주신다는 기복 신앙과는 조금 차원이 달랐습니다. 욥은 하나님이 인간이 바친 정성에 비례하여 상벌을 주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 상벌에 대해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타당한 이유만은 하나님 쪽에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욥의 이런 믿음에 대해 하나님은 다른 생각을 가졌습니다. 하나님이 욥처럼 잘 믿는 자를 복을 안 주시겠다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욥의 생각대로라면 현실적으로 고난을 겪는 사람은 불경건, 불신앙, 열심과 정성의 부족, 인격과 믿음의 미성숙, 그 무엇이 되었든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반드시 충분히 만족하지 못한 어떤 이유 때문이라는 논리가 됩니다. 또 그 논리라면 하나님은 인간쪽에 조금이라도 불만족할만한 원인이 있으면 그 인간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결론에도 이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그런 하나님이라면 인간을 그것도 죄인을 무조건 사랑하고 복 줄 수 있는 분이 될 수 없습니다.
인간이 볼 때에 하나님이 주시는 이유 없는 고난을 이해할 수 없어 불신앙과 불경건으로 흐른다면, 그 반대로 하나님이 주시는 이유 없는 축복도 이해할 수 없어 나태와 교만으로 흐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즉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을 가지고 신자가 괴로워 한다면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무한한 은혜와 사랑에 대해서도 인간이 이해할 수 없을 뿐 아니라 하나님 쪽에선 그런 은혜와 사랑을 베푸실 근거도 없어집니다. 왜냐하면 천치 바보에게 아무리 다이아몬드를 선물해도 한갓 쓰레기에 불과해집니다. 또 정상적인 사람이라도 큰 선물을 받았는데 도저히 받을 이유를 모르겠다면 그 선물은 선물로서 가치가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욥이 당신의 상벌이 바친 정성에 비례하지는 않지만 필연적인 이유가 있어야 한다고 믿는 바로 그 생각을 고쳐 주길 원했습니다. 욥에게서 갑자기 특별한 이유 없이 자식과 재물과 건강을 빼앗아감으로써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고통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역으로 하나님이 인간에게 복을 베푸시는 것 또한 반드시 인간 쪽의 어떤 근거가 있기 때문에 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당신만의 은총으로 베푸신다는 것을 이해시킬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 가장 원하시는 것 아니 유일하게 원하시는 것은 아무런 전제, 조건, 이유, 근거 없이 서로 사랑하고 신뢰할 수 있는 온전하고 참된 관계입니다. 하나님은 신자 누구에게나 상호 이해 관계나 일방의 독선과 욕심이 개입되지 않는 완전히 인격적인 일대일의 개인적 관계를 맺기를 원하십니다. 신자가 하나님을 찾되 아무런 조건을 걸지 않고 어떤 보상을 바라지도 않고 하나님 당신이 진정으로 좋아서 찾아 주길 원합니다.
또 그 역으로 하나님 당신도 인간의 어떤 공로나 근거 없이 은혜를 베푸시고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 당신을 세상의 어떤 귀한 것 보다 더 사랑 하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신자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어떤 것보다 하나님 당신을 더 우위에, 아니 더 우위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을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 당신의 말씀 그대로 질투하시는 하나님입니다. "너희는 나 외에 다른 신들을 너희에게 두지 말찌니라." 다른 어떤 계명은 몰라도 이 계명만은 절대 어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도 어쩌면 자신 보다 더 소중하게 여겼을 백세에 난 외아들 이삭을 바치라고 요구하셨습니다. 예수님도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마10:38,39)고 하셨습니다. 마찬 가지로 욥에게도 자신이 가장 소중히 여겼던 자식들을 데리고 갔습니다. 욥에게 고난을 이겨내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생각을 바꾸게 하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욥은 자식을 끔찍이도 사랑해 잔치 후 죄를 지었을까 자신이 대신해서 하나님께 번제를 드려 줄 정도였습니다.
신자에게 가끔 정말 하나 뿐인 아이를 그것도 한 창 재롱 부릴 때에 아무 이유없이 하나님이 데려 가실 때가 있습니다.정말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슬픔을 겪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고 심지어 반발과 미움이 생기다 못해 믿음을 포기하고 싶은 생각까지 듭니다. 그러나 잠시 한 간만 물러서 생각해 보면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듯한 슬픔과 실망과 고통을 겪었지만 하늘과 땅은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영원히 있는 그 모습 그대로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바로 그것입니다. 하늘과 땅이 무너지지 않았듯이 내가 너를 향해 갖고 있는 사랑과 은혜도 절대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잊지 말아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신자에게 고난을 허락하는 것이 단지 믿음으로 그 고난을 이겨내라는 정도가 아닙니다. 우리가 고난에 대한 생각을 바꾸고 나아가 하나님과 온전한 참 사랑의 관계를 맺기를 원하십니다. 그 만큼 그 분이 우리를 더 사랑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런 뜻에서 정말 하나님은 때때로 직접 간섭하셔서 그 아이를 의도적으로 죽이십니다. 그만큼 남아 있는 부모나 형제들과의 관계를 바르고 온전하게 갖기를 더 소원하셔서 특별하게 간섭하신 것입니다. 우리 이성으로는 선뜻 이해가 되지 않지만 오직 순전한 믿음으로 수용할 때에 당신만의 영광으로 반드시 드러날 하나님의 진정한 사랑과 열심이 거기에 담겨 있습니다.
그럼 마지막으로 아무리 남은 가족과 새로운 관계를 맺기를 원한다 해도 "죽은 아이만 억울하지 않은가? 하나님은 그 아이를 사랑도 하지 않은 것 아닌가?"라는 의심이 들 수 있습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의인이 죽을지라도 마음에 두는 자가 없고 자비한 자들이 취하여 감을 입을지라도 그 의인은 화액 전에 취하여 감을 입은 것인 줄로 깨닫는 자가 없도다. 그는 평안에 들어갔나니 무릇 정로로 행하는 자는 자기들의 침상에서 편히 쉬느니라."(사57:1,2)
하나님이 그 의인을 몰라라 하거나 싫어서 죽인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대신에 이 세상의 화액 전에 평안을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취하여 감을 입었다"라고 인간 쪽에서 보았을 때에 하나님의 사랑으로 간섭하셨다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그 아이는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잇게 하리라"(요14:2,3)는 말씀대로 예수님이 그 아이를 위해 미리 예비 해 놓으신 천국의 처소에 영접하여 간 것 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 만을 가장 소중하게 여겨지길 원하십니다. 그래서 가끔은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 특별히 하나 뿐인 아들 같은 것을 내 놓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이니까 그렇게 요구하실 수 있습니다. 절대자라서 그런 무리한 요구까지 무조건 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만 슬픔과 고통을 당하라는 일방적인 요구도 아닙니다. 하나님 당신도 독생자를 우리를 위해 기꺼이 죽음에 내 놓으셨기 때문에 그런 요구를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먼저 본을 보이셨습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을 제대로 알아 하나님께 온전한 반응을 하여 당신의 사랑을 완전하게 알고 그 안에 거하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일방적인 구애(求愛)입니다. 이 보다 더 하나님의 사랑을 표시할 수 있는 방법은 따로 없습니다.
그러나 꼭 기억할 것은 인간들의 죄악으로 모든 피조세계가 부패되어 아직도 원인 모를 병으로 죽거나 여러 복합적 원인으로 죽기 때문에 사실은 하나님이 일부러 데려가는 때보다 인간의 과학 수준으로 아직 그 원인을 모를 때가 훨씬 더 많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간섭과 책임은 전혀 개입되지 않고 정말 그야말로 원인 모르는 병으로 말입니다. 그래서 말 그대로 고난이며 부패된 이 땅이 새하늘과 새땅으로 바뀌기 전까지는 그런 고난은 항상 있게 마련입니다. 일찍 죽은 그 아이가 오히려 더 행복한 곳에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며 어서 빨리 오라고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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