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토지법을 가르치려는 책이 전혀 아니다
성경은 근본적으로 토지법을 가르치려는 책이 아니다. 인간과 우주의 근원을 알리고 인간의 근본적 타락과 영원한 회복의 길을 보여주는 책이다. 그런 면에서 헨리 조지의 토지법에 대해 헨리 조지가 기독교인이므로 그의 토지법도 성경적이라고 우기는 것은 대단히 단편적인 판단이다. 그나마 토지에 대한 언급을 보여주는 희년의 본질도 토지법이 아닌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완성된 영생의 소망으로서의 희년을 보여준다. 안식년과 희년을 포함하여 성경은 경제학에 도움을 줄만한 무슨 대단한 비결이 숨어있는 그런 책이 아닌 것이다. 기독교인들이 안식년과 희년뿐 아니라 유월절, 나팔절, 속죄일, 맥추절, 칠칠절, 초실절 등을 문자적으로 지키지 않는 이유는 이들 절기들이 모두 그리스도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무슨 토지법을 찾으려 하면 안 되는 이유다. 다만 성경이 가르치려는 포괄적 세상 이해와 인간 이해를 통해 성경적 토지법과 세상 경제학의 의미를 판단할 수 있을 뿐이다.
헨리 조지의 토지법
헨리 조지는 독학의 경제학자 이전에 언론인이며 정치인이요 대중연설가였다. 그의 사상이 치열한 학문적 전개보다는 주로 저널리스트 성격의 다양한 글들과 저서와 연설문의 형태로 나타난 이유다. 또한 비록 그가 신앙인이기는 하였으나 신학적 소양을 갖춘 인물도 아니었다. 이 같은 그의 사상이 가장 종합적이고 적나라하게 나타난 책은 40살이 되던 해(1879) 출간한 『진보와 빈곤』이라 할 수 있다. 정통 경제학자의 책과 달리 이 책은 독학의 경제학자요 언론인이요 사상가가 쓴 토지와 진보와 빈곤과 자본에 대한 책답게 경제학 용어뿐 아니라 정치, 사회, 문화, 역사, 철학, 시사, 종교, 문예적 관심이 녹아있다.
이 책에서 헨리 조지의 관심은 산업 혁명 이후 생산력은 증가했음에도 왜 임금은 최저 생계 수준에서 머물러있는가에 대한 정치경제학적 질문이었다. 이들 문제에 대해 '임금은 자본에서 나온다'는 임금기금설과 인구 증가로 설명하는 맬더스의 인구론에서 찾으려는 기존 경제학을 비판하며 헨리 조지는 토지사유제에서 그 해답을 찾는다. 생산에 아무런 기여도 하지 않는 지주가 토지가치를 차지하고 토지 투기까지 조장하는 토지사유제는 곧 진보와 빈곤을 유발하는 진정한 요인이므로 토지 사유를 폐기하고 토지 공유제로 급진적으로 바꿔야 한다는 것이 헨리 조지 토지법의 요지였다. 다만 토지사유가 관습화된 나라에서는 토지 사유를 허용하되 해마다 토지의 연간 임대가치인 토지대금을 정부가 환수(이른바 토지가치 세금, land value taxation)하면 된다. 그럴 경우 다른 모든 조세는 면제해도 되며, 그렇게 한다면 생산은 자연히 늘고 분배정의는 실현되고 인류는 더 고상한 문명으로 나아가게 된다는 것이 헨리 조지의 생각이었다. 마르크스가 토지와 자본의 사유화를 모두 금하고 공유화해야 한다고 본 반면 헨리 조지는 토지만 공유하자는 입장이었다. 즉 공산, 사회주의는 토지와 자본을 모두 몰수 국가 소유화하는 반면 헨리 조지의 지공(地公)주의는 자본은 사유화하고 토지만 공유한다. 헨리 조지가 마르크스주의자들과 사상, 정치경제적 논쟁을 자주 벌인 이유다.
대학 교양 수준의 경제학 원론만 제대로 배운 사람이라면 이 같은 헨리 조지의 토지 법이 마르크스의 사상처럼 산업 혁명 이후 사회와 산업 경제의 모순 속에 나타난 시대적 산물임을 알 수 있다. 산업 혁명 이후 빈곤 문제의 해결과 경제 분배의 정의를 실천하기 위한 헨리 조지의 토지 공유제는 유물론자들의 사상처럼 경제전문가들의 많은 경제 정책 가운데 하나였다는 의미다. 오늘날 세계의 많은 정부들은 토지가치를 반영한 세금을 다양한 방법으로 거두어들이고 있다. 헨리 조지의 사상을 일부 반영하고 있는 셈이다. 물론 토지 가치를 반영한 세금은 조지의 독창적 주장도 아니다. 대부분의 경제학 이론이 일부 타당하고 경제 정책에 반영되는 것처럼 헨리 조지 경제학도 그런 부류인 것이다.
기독교나 세상 정부가 헨리 조지 사상을 문자적, 급진적으로 무조건 반영하지 않는 이유는 생명체와 유사한 경제가 헨리 조지 식 주장을 그대로 반영하기에는 너무나 복잡한 요소들이 많기 때문이다. 마치 모든 생명이 한 가지 운동법이나 약으로 건강해지거나 치유될 수 없는 것처럼 경제도 복잡한 유기체 같은 모습을 보인다.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 복잡 요소가 작용한다. 그 복잡 요소란 자연 요소와 인간 요소이다. 토지는 환경오염, 가뭄, 홍수, 지진, 화산 폭발과 같은 자연 재난을 통해 토지 가치가 급격하게 변한다. 그리고 인간은 이들 바뀌는 토지 가치를 재평가하고 세금을 매겨야 할 장본인인 동시에 스스로 토지 가치를 전쟁이나 폭력이나 쓰레기나 오염을 통해 황폐화 시킬 수도 있는 당사자이다. 인간의 탐욕과 죄악은 얼마든지 본래의 토지 가치를 단숨에 뒤집어버릴 수 있는 것이다. 변덕스럽고 탐욕적인 인간적 요소가 개입된다는 점이 토지 가치를 변동시키는 핵심적 요소인 셈이다. 전 UN사무총장 코피아난이 임명한 경제 발전 문제에 대한 세계 23인의 Adviser 중 한 사람이었던 고 박을용 박사(전 한동대 부총장)의 경제 발전론 근간인 '경제발전을 위해서는 사람이 바뀌어야 한다'는 사상도 바로 여기서 나온 것이다.
토지를 공유화한다 해도 그것을 다루고 관리하는 주체는 바로 탐욕의 인간이다. 즉 토지를 하나님이 아닌 진보든, 보수든, 자본주의든, 공산주의자든 대주주든 공산독재자든 인간은 스스로가 또 다른 사유화의 도구로 다룰 뿐이다. 오늘날 토지 공유화가 문자 그대로 가장 잘 유지되고 있다는 중국이 과연 고상하고 평등한 나라가 되었는가? 중국 최고 도시 상하이 뒷골목을 한번 찾아 가보라! 필자는 상하이 뒷골목을 보면서 화려함 뒤에 숨어 있는 1960년대 우리 사회 어두운 모습을 보는 것과 같은 큰 충격을 받았다. 중앙아시아 국가들의 풍경이 1960년대 고향의 과거로 돌아온 듯 한 포근한 착각(?)을 불러일으킨 것과는 또 다른 뉘앙스로 다가왔다. 그 어느 국가보다도 큰 빈부 격차와 불평등을 상하이 뒷골목은 그대로 노출시키고 있었다. 만일 그래도 중국 토지법을 그리워하는 미숙한 정치인이 있다면 차량으로 스쳐가듯 보지 말고 직접 도보로 다니며 중국 최대도시 뒷골목을 직접 다녀보라고 권하고 싶다! 중국이 과연 세계 최고의 토지공유제로 고상한 도덕적 국가가 되었는가? 외국 기업에 대한 불평등 조약, 특허·저작권 무시, 주변 국가에 대한 강대국으로서의 정치경제적 위협, 저임금, 비도덕적 수출 물품들 반출, 언론, 출판, 결사, 집회, 종교, 사이버 통제와 억압 등 다양한 꼼수로 잠시잠간 성공한 듯 보이는 개발독재의 모습 아닌가? 또 다른 토지 공유국가 북한 정권은 여전히 언론,출판,결사,집회,종교,거주 이전, 심지어 일부 정치, 직업 선택, 여행 자유, 결혼 자유조차 없는 억압정권이 아니던가? 북한 경제는 부흥했나? 하나님이 주인이 아닌 토지와 자본만 공유하면 만사형통이라는 공산주의나 공산주체 귀족이 토지의 주인이 된 나라의 참상을 우리는 목격하고 있다. 자본주의 논리로 본다면 공산주체귀족은 토지를 모두 공유화하고 인류 기본 자유까지 억압하는 자본주의 재벌하고는 비교조차될 수 없는 악덕 대재벌의 모습을 보인다. 그런 대재벌에게 약품을 선물하고 인구조사 비용을 대고 의료기기를 선물한다는 것은 소위 윤락포주 어금니 아빠에게 기부하는 것보다 더 악하고 미련한 행위일 뿐이다. 그런 악덕 대재벌에게 굳이 기부하고 싶으면 반드시 개인 호주머니를 털어서 기부했으면 한다. 그들 공산주체귀족들은 당신들보다 훨씬 부자들이다. 그러니 모든 국민의 소유인 국가공적자금이 아닌 자신들의 귀한 돈을 갹출하여 될수록 많이 보내면 된다. 공산귀족들은 정말 고맙다고 조롱하며 웃을 것이다. 굳이 공적 자금이 필요한 곳을 찾는다면 공산주체귀족 악덕 대재벌이 통치하는 북한이 아닌 북한을 탈출해 떠도는 연약한 탈북자들이 대상이 되어야 할 것이다.
토지와 관련 없는 소득
토지공유화하면 된다는 사상은 경제가 생물 같다는 하나님의 '오이코노미아'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온 미숙함이라고 필자는 본다. 이제 세상과 사회가 발전하면서 새로운 공간영역이 발생하고 있다. 토지보다 훨씬 더 큰 이윤을 제공해주는 사이버 영역, 주식 상속, 금융 소득, 특허·저작권 수입에 대해 토지가치세 만능주의자들도 당황하고 있다. 일명 '흙수저' 출신이 토지 없이 게임 개발과 주식 상장으로 단숨에 시가로 재계 10위권에 대거 진입하는 시대다. 5천년 바둑 지식은 단지 36 시간 만에 '슈퍼 알파고'에게 파악되어 인류 최강 기사에게 연전연승하는 시대다. 선배 의사에게 폭력을 당하며 어렵게 배운 의학 지식이란 쏟아지는 새로운 수만편의 논문과 정보 속에 인공 지능의 정보와 발전의 1만분의 1도 따라잡기 벅찬 시대가 되었다. 인공 지능에 능한 보통 사람이 웬만한 의사못지 않은 의학적 판단력을 가진 시대가 된 것이다. 이제 의사, 변호사, 세무사의 지식이 인공지능만 훨씬 못하니 국회의원, 의사, 법전문가, 세무전문가를 모두 공유화하여 인공 지능과 컴퓨터에 능통한 단순 공무원으로 모두 대체해야 한다면 이들 전문가들이 수긍할까? 사실 이들 영역도 토지와 다를 바 없다고 보고 공유 영역으로 포함해야 유토피아가 온다고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는 괴물들이 나타날 가능성이 전혀 없지 않다. 토지사유화 금지만 하면 만사형통이라는 헨리 조지 사상은 산업 혁명 시대의 산물이었을 뿐 4차 혁명 시대에는 전혀 맞지도 않을뿐더러 성경적 사상은 더더욱 아님을 신앙과 경제학에 미숙한 일반인들도 이제 조금은 알 것이다. 기독교 사상에서는 만민이 부요함을 누릴 수 있는 만능 세상 법은 없다. 토지 공유가 좋은 차, 좋은 휴대폰, 좋은 집을 선물하지는 않는다. 기독 종말론은 인간 종말에 대해 부정적이다. 그래서 땅의 산물이 아닌 은총의 십자가가 필요한 것이다. 토지공유법은 인간 질병의 문제, 지적 호기심의 문제, 영생의 문제, 죽음의 문제, 죄의 문제, 탐욕의 문제, 심판의 문제에 아무런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인간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문제도 해결이 되지 않는다. 헨리 조지면 다 된다는 정치인이 있다면 정말 자신의 무지와 무식을 부끄러워해야 한다.
굳이 땅에서 하나님의 법을 찾으려 한다면
토지에 대한 만사형통의 성경적 법은 없다. 다만 땅을 다루는 성경의 일반적인 원리를 통해 보다 나은 땅의 법에 대한 성경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뿐이다. 그것은 먼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땅의 법의 정신이 무엇인지를 알아보는 것이 중요하다.
어떤 이들은 과거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내리신 땅에 대한 법을 오늘날에도 문자적으로 그대로 적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같은 희년의 법은 하나님의 법에 대한 오해임을 이미 살펴보았다. 이스라엘 민족이 결혼의 법을 받았다고 오늘날도 성경대로 형수를 죽은 형 대신 취해야 된다는 말인가? 그럴 수는 없다. 성경을 문자적으로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입을 만한 옷감은 별로 없을 듯하다. 땅에 대해서도 땅 자체가 아니라 땅에 대한 하나님의 의도와 요구와 정신이 무엇인가를 찾는 것이 중요하다. 희년 자체가 아니라 희년의 정신을 아는 것이 필요하다.
먼저, 땅은 하나님의 것이라는 관점이다
토지는 하나님의 것이지 사람의 것이 아니다. 땅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관점에서 출발할 때 땅에 대한 욕심을 막을 수 있게 된다. 토지는 내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면 토지 자체의 이익보다 토지의 이용가치 증대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즉 정부가 토지 자체의 이익보다는 토지 이용 가치 증대에 혜택을 주는 쪽으로 정책을 유도한다면 자연스럽게 불로소득의 방지와 성경적인 모습의 토지 정책이 성립되는 것이다.
홍콩의 중국 반환을 앞두고 한동안 홍콩의 주민들에게 땅은 자기 것이 아니라는 의식이 팽배한 적이 있었다. '언젠가 우리의 땅은 중국 정부에 귀속될 것이다. 그러므로 땅 자체에 투자하는 것은 정말 어리석인 일이다'는 것이 모든 이들의 일치된 생각이었다. 놀랍게도 홍콩은 1997년 중국에 반환되는 그날까지 여전히 경제적으로 부흥하는 이상한 흐름이 지속되었다. 땅에 대한 자유와 욕심의 포기가 오히려 그 땅을 성경적 원리로 자연스럽게 유도하여 그 땅을 풍요롭게 만들어버린 역설을 가능케 했던 것이다. 그런데 요즘 또 다시 홍콩이 이상하다. 좁은 땅 홍콩 사람들의 삶이 만만치 않다. 토지 소유자와 건물 소유자들에게는 땅의 천국이요 부동산이 없는 일반인들에게는 땅의 지옥이 되어 버렸다. 홍콩인들에게 다시 땅의 탐욕이 작동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물론 넓은 땅을 가진 미국인들이라고 탐욕이 없지 않다. 땅이 아닌 인간 마음이 문제인 것이다.
그동안 우리 정부의 토지 정책은 땅에 대한 과도한 욕심을 포기하기는커녕 유도하는 면이 없지 않았다. 아마 정치인들 스스로 땅에 대한 욕심이 과도함으로 자신들의 이권이 걸린 문제에 쉽사리 성경적 입법을 할 리가 없었다. 땅에 대한 사회 구성원 전반의 과도한 욕심은 그대로 서민들의 고통과 심지어 교회 개척의 어려움으로 연장된다. 따라서 땅은 우리의 것이 아닌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을 우리 그리스도인은 먼저 알고 실천해야 한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아닌 정부가 땅의 주인(?)이 되는 토지공개념 실천? 그 결과는 탐욕의 공산주의라는 괴물을 통해 우리는 참사를 목격하고 있지 않은가! 땅을 통한 과도한 욕심은 어떤 식으로든 땅에 대한 하나님의 원리를 멀리 벗어난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먼저 그리스도인들부터 과도한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의 땅의 법을 지켜도 부동산 시장이 안정되고 이 사회가 혼탁스럽게 되지는 않을 거라고 확신한다. 그리고 바른 신앙으로 양육된 신실한 실력 있는 그리스도인 정치경제학자들이 정계와 재계와 공직에 적극 나서야 한다.
둘째, 땅에 대한 하나님의 법에는 늘 약자와 가난한 자에 대한 배려의 정신이 담겨 있다.
희년의 규정에는 약자를 보호하려는 하나님의 의도가 담겨 있다. 50년째 되는 해의 속죄일에 선포되는 희년에는 종살이 하는 사람들이 해방되고 자기 소유지를 찾아 자기 지파로 돌아갈 수가 있었다(레 25:8~17). 하나님은 늘 약자의 편이었다. 어느 구약 학자는 하나님은 노골적으로 약자의 편이라 했다. 약자에 대한 배려 없는 땅의 법은 결코 선한 법이라 할 수 없다. 땅이 없는 자들이 쇠락하고 땅을 가진 자들이 배를 불리는 정책은 결코 선할 수가 없다. 땅을 움켜쥐었다는 면에서는 악덕 부동산 재벌이나 독재자가 다를 바가 없다.
하지만 공산독재자의 경우 자유와 경제까지 통제한다는 면에서 자본주의 관점에서 보면 아주 사악한 악덕 독점재벌이 되는 셈이다. 과도한 토지의 개인 독점을 막지 못한 필리핀이 재벌들을 영원한 재벌이요 약자들은 영원한 약자로 만들어버린 것을 역사를 통해 알 수 있다. 60여 년 전 만해도 우리보다 국민 소득이 10여배가 많았던 필리핀이 지금은 경제적 소국이 되어버렸음은 많은 교훈을 던진다.
셋째, 땅에 대한 제도를 복잡하게 만들지 말아야 한다.
땅에 대한 법이나 땅의 세금을 단순화해야 한다. 복잡한 세법과 토지법은 많은 법률 서비스와 세무 서비스를 필요로 하게 된다. 여기에 불필요한 물질과 시간의 낭비와 부정의 요소가 개입되는 원인이 된다. 땅에 대한 법이 복잡다단할수록 전문가들의 영역은 넓어진다. 서민들은 전문가를 의지할 수밖에 없다. 서비스 비용은 증가하는 것이다.
땅에 대한 제도를 단순화한다면 법으로 밥 먹고 사는 사람과 정치인들과 국세청 세무 인력을 절반의 절반 이하로 줄일 수 있다. 아니 그보다 더 줄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나님의 토지를 복잡한 세금 방식으로 묶는 것은 하나님의 질서에 맞지 않는다.
복잡하고 변덕 많은 우리의 입시제도가 금수저들에게 유리한 불공평한 최악의 입시제도로 바뀐 것과 유사하다. 선발 인원이 정해져 있는 입시에 왜 그리 입시제도를 복잡다단하게 만드는 지 이해할 수 없다. 복잡한 입시제도란 당연히 들어갈 사람을 탈락시키고 엉뚱한 사람을 뽑을 확률이 증가하였다는 것 이상의 아무런 의미도 없다. 복잡한 세금 방식이란 복잡한 입시제도와 그 원리에 있어 전혀 다를 바 없다. 오로지 부정의 개입과 억울한 피해자만 양산할 뿐이다.
약자와 무식자들도 수긍할 만한 단순한 토지법으로 바꾸어야 한다. 그래서 약자들도 살 수 있는 땅을 만들어야 한다. 이 단순하고 용이한 땅의 원리를 바탕으로 하나님의 땅의 법이 보다 구체적으로 적용되도록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고 믿는다. 물론 그것을 보다 구체적으로 적용하는 일은 목회자들의 몫이 아닌 크리스천 경제학자들과 정책 담당자들이 할 일이다. 이러한 운동의 기운이 꿈틀댈 때 이 땅을 떠날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듯하다. 그 때 하나님도 이 땅을 버리지 않을 것이다. 필자는 우리 겨레의 땅이 그리 살기 어려운 땅이라고 여겨지지는 않는다. 하나님이 주신 아주 살 만한 땅이다. 하나님의 땅의 법에 관심을 갖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조덕영 박사(창조신학연구소 소장, 조직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