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르트 신조에 나타난 이중예정론(선택과 유기)에 대한 성결교회의 비판적 이해

(Photo : ) 
▲서울신학대 황덕형교수
(Photo : ) ▲서울신학대 황덕형교수

 

 

I. 도르트 신조의 탄생 

흔히 칼뱅을 이중예정의 창시자로 이해하고 그를 모든 문제의 근원으로 만들고 있지만 정작 칼뱅에게 있어서 가장 중심적인 주제는 칭의와 성화였다. 그는 또한 그 칭의와 성화가 성취되기 위해서 하나님의 은총이 절대적으로 요청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칼뱅의 신학안에서 성도의 견인의 한 부분에 대한 설명에 불과해야 할 예정을 "자신의 기뻐하시는 뜻에 따라 각 사람의 운명을 결정하신 하나님의 영원하신 작정"이라고 이해함으로써 마치 예정이 모든 것의 원인처럼 이해되면서 다른 모든 것들을 덮어버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중예정이 그리스도의 대속의 행위와 그에 따른 의의 전가 그리고 칭의의 모든 복음적 사건을 앞서는 무시무시한 결의가 되어버린 것이다.

한편 역사적 과정은 다음과 같다. 칼뱅의 유산이 네덜란드로 갔을 때 평신도 였던 쿠른헤르트(Dick Coornhert)가 칼뱅의 이중예정을 비난하며 벨직 신앙고백의 수정을 요구하자 개혁교회 지도자들은 베자의 제자이며 유능한 학자였던 알미니우스(James Arminius, 1560-1609)에게 쿠른헤르트의 논지를 반박하도록 요청한다. 그런데 정작 알미니우스가 성경의 연구를 깊이하면서 거꾸로 인간의 구원은 모든 사람들을 위해 보편적으로 주어진 것이지 특정한 예정된 자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구원은 예정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믿음(성령의 능력으로 회복된 인간의 자유에서 주어진 선택)에 의한 것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이를 예지예정으로 이해하게 되어 이러한 사상이 그의 제자들에게 널리 퍼지게 된 것이다. 

마침내 1610년 우이텐보게르가 기초한 46명의 목사들이 항변론(Articuli Arminian sive Remonstrantiae)을 제출하기에 이른다: (예지에 기초한)조건적 선택 - 보편적 대속 - (은총의 절대성)인간의 무능력 - 거절할 수 있는 은혜(선행적 은총:강요하지 않고 저항할 수 있는 선택의 자유) - 조건적 견인(타락 가능성). 한편 알미니우스의 논적이었던 고마루스(F.Gomarus,1563-1641)가 이러한 운동을 펠라기우스이단으로 정죄하자 논쟁이 격화되어 시민전쟁같은 무력사태로 진화한다. 이를 수습코자 1618년~1619년에 도르트에서 회의를 열고 5개조항을 통과시킨 것이다: TULIP,  T(total depavity) - 전적타락, U(unconditional electon) - 무조건적 선택, L(limited atonement) - 제한속죄, I (irresistable Grace) - 불가항력적 은혜 - P (perseveranc of Saints) 성도의 견인 

II. 도르트 신조의 내용.

 그 전반적인 내용은 기독교의 복음을 장로교입장에서 해석한 것으로써 복음과 대동소이하지만 하나님의 예정을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하나님의 은총을 강조하는 것 같은 효과를 바라지만 실제로는 당시 가톨릭과 다른 극단적 선택을 한 것이라고 평가된다. 이 교리가 가진 특징은 다음과 같다

 1) 하나님의 복음을 설명함에 있어 인간의 원죄적 상황을 주장하는 것은 모든 복음주의 교단이 같은 입장이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복음을 받아들이는 신앙이 꼭 필요하다는 것도 동일하다. 제1조 하나님의 선택과 유기에서 이 신앙의 사건의 원인을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에 둔 것이다. 동시에 유기를 강조한다: 제1조 15항: ⑮유기/선택받지 못한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자기의 의로움을 나타내기 위해서 그들이 스스로 잘못해서 빠진 비참한 상황속에 놔두고 그들이 구원에 이르는 믿음과 회심의 은혜를 허락하지 않는다. ⑰경건한 부모들은 자기의 자녀들이 유아기때 선택된자로 부르심을 받고 구원받았다는 것을 의심하면 안된다. ⑱선택과 유기에 대한 적절한 태도/ 롬9:20 하나님의 뜻을 함부로 되묻지 말아라(참고 렘18.7~10) 

제2조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말할 때에도 ⑤항에는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해야 함: 모든 백성들에게 구별이나 차별없이 알려지고 전도해야 하며 그들에게 복음을 주시기를 기뻐하시기 때문(8항과 불일치, 제1교리 15항과 모순)이라고 하면서도 ⑧그리스도의 죽으심과 그 효과가 예정받은 사람들에게만 피로 구속하시고 효과적으로 대속하신다 그들에게만 성령을 주신다(제한구속)는 주장은 이치에 안맞는다.

제3조, 제4조를 사람의 타락과 회심, 그리고 그 과정에서 하나님의 초자연성을 강조하면서 ⑬이해할 수 없는 거듭남의 방법: 거절할 수 없는 은총(이것은 바로 위의9절과 반대된다)을 말하고 마지막으로 제5절. 성도의 견인 에서 ③ 하나님의 보존: 하나님께서 끝가지 보존하신다(성도의 견인) ⑨ 보존의 확신: 선택된 성도들이 견인된다는 것 ⑩ 확신의 근거: 사적인 계시가 아니라 말씀과 약속의 자녀라는 믿음에서 온다, 성령께서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요 상속자임을 증거하는데에서 온다, 경건한 마음과 깨긋한 양심과 선행의 추구 속에 온다(이것은 예정의 확신이 아니다. 성령의 내적 확신이다)

III. 도르트 신조에 대한 반성과 성서적 근거 - 웨슬리의 대답 -

예정이 아닌 보편적 구속을 근거로 인간의 보다 책임적인 자유를 지지하는 성서적 증거:

벧후 3:9/수24:14-16/렘18:7-10/마태 23:37/요7:37/딤전 2:4/ 롬2:6-10/11:22/ 요한1 2:1-2/ 딛2:11 

첫째로 이중예정은 근본적으로 성서를 잘못인용하고 있다(롬9.24 이하/10:20-21) 더욱이 도르트신조에서 유기을 주장하는 대목에서는 성서를 인용하지 않고 있다. 두 번째로 신학적으로 예정은 인간을 대상으로 무엇을 결정하는 사건이 아니다. 오히려 웨슬리가 말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구원하시기로 하신 방법을 정하신 것이라고 보는 것이 맞다. 세 번째로 예정은 하나님의 성령의 사역의 신비를 무지막지한 두렵고 떨리는 존재로 하나님을 변형시킨다. 하나님의 존재를 비 성서적 하나님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렇게 잘못된 신론을 가진 예정론은 결국 우리의 구원의 목표와 구원의 참뜻을 제대로 밝히지 못하게 된다. 

네 번째로, 예정의 주장은 주로 우리의 구원의 확실성을 목표로 이루어진 논증으로써 결국 인간의 칭의의 원인에 관심을 갖게 한다. 칭의를 이루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라 나의 구원의 기계적 원인이 하나님의 의지에 있다고 말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은 복음으로부터 우리를 벗어나게 하는 것이고 혹시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결국 칭의의 관점에서만 복음을 해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다섯 번째로 예정론자들이 말하는 것과 달리 이 예정의 지식은 결국 인간에게 도덕적 무기력을 더 강조하는 현상을 가져오게 된다. 그리하여 기독교의 본질이 우리가 하나님을 닮아가는 그 거룩의 여정에 있음을 잊게 하여서 결국 나태한 기독교인을 만드는 것이다. 여섯 번 째로 예정이 비 복음적인 이유는 이 예정론은 결국 인간의 죄를 지나치게 크게 생각하고 그것을 극복한 복음의 역동성을 잊도록 만든다. 도르트 신조에서도 매우 강하게 회개의 과정이 성령의 능력으로 일어나는 기적이라는 것을 주장하지만, 그리고 창조와 부활과 같은 초 자연적인 사건이라는 것을 말하지만 결국은 인간의 죄를 벗어날 수 없다는 한계 속으로 다시 매몰되고 만다. 그래서 겨우 그는 견인의 보존을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이에 반대로 웨슬리의 신학은 성령의 능력을 강조하고 그 죄와 불가능한 모든 한계를 인지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뛰어넘어서 새로운 창조적 사건으로서의 성결의 능력을 인정하게 만든다. 

신비라고 한다면 이 성령의 사역이 참된 성서적 신비의 사건인 것이다. 실제로 우리는 매우 비관적인 인간론과 세계상 그래서 비 성서적 세계관을 가진 이중예정의 관점을 벗어나 우리는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인한 더 적극적인 가능성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일곱 번째로 이중 예정론은 인간의 자유를 부정하지만 성령의 은총은 인간의 자유를 파괴하지 않는다. 그리고 인간의 자유가 하나님의 은총을 불필요한 것으로 만들지 않는다. 실제로 우리가 성령이 강하게 역사하는 순간을 생각해 보라! 우리가 성령의 역사를 강하게 체험할 때, 하나님이 아주 강하게 우리를 일으켜 세우실 때 우리는 가장 자유로운 존재가 된다. 

우리는 도르트 신조가 신학적, 성서적, 그리고 철학적으로 재검토해야 할 많은 문제점을 갖고 있다고 확신할 수 있다. 이 도르트 신조가 그리스도 중심의 복음에도 성령의 능력에도 맞지 않고 그 일부분 성부의 전능성을 강조하지만 실제로는 많은 부분 이데올로기가 들어있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