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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가 이스라엘의 가축과 애굽의 가축을 구별하리니 이스라엘 자손에게 속한 것은 하나도 죽지 아니하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고."(출9:4)

유대인에게 부족했던 딱 하나

하나님은 사람의 외적조건을 심사하여 심판하는 차별하는 분이 아니다. 내적 정체성을 기준으로 구원해주시는 구별하는 하나님이다. 바꿔 말해 신자는 불신자 때의 내적 정체성과 완전히 다를 뿐 아니라 더 중요하게는 정반대가 된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구원을 거듭난다, 새로운 피조물로 재창조되었다고 설명하는 것이다.

예수를 믿음으로써 몇 가지 잘못이나 허물을 고쳐져 이전에 비해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된 것이 아니다. 완전히 뒤집어져서 아예 다른 사람이 된 것이다. 그렇다면 본인은 우선 그 사실을 알 수밖에 없다. 둘째로 이전과 다른 사람이 되었기에 당연히 삶의 변화가 따라야 한다. 무엇보다도 새롭게 변화된 삶이 너무 좋아서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생기지 않아야 한다.

그렇게 변화된 삶의 첫째이자 가장 중요한 열매는 무엇인가? 간단히 알 수 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단 유대인들과 정반대의 모습이 나에게 드러나는지 점검해보면 된다. 그들은 하나님을 알았고 믿었고 따랐다. 율법을 준행했고 십일조 구제 봉사 전도 기도에 열심을 내었다. 이방족속들은 물론 동료 유대인들 사이에 경건하다고 인정과 칭찬을 받았다. 그들 스스로도 하나님 앞에 내세울 외적 조건이 충분하다고 자부했다.

그런데 딱 하나 부족한 것이 있었다. 무엇이었는가? 이방 족속을 아예 상대도 않은 것이다. 또 여호와의 선민으로서 하나님을 함께 믿는 동족은 물론,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차별했다. 그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었는데 그럼으로써 구별하는 하나님을 차별하는 하나님으로 격하시켜버렸다. 결과적으로 하나님마저 외적 조건으로 인해 차별했다.

예수님이 오셔서 하신 일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며 죄인과 당신의 백성을 어떻게 대우하는지 사람들로 정확히 알게 한 것이다. 유대인들이 잘 몰랐거나 의도적으로 망각했던 오늘 본문의 의미를 다시 상기시켜 주신 셈이다.

예수님이 오셔서 행하신 일이 그것이라면 새로운 창조로 바뀐 신자의 내적 정체성도 당연히 유대인의 반대가 되어야 한다. 유대인처럼 사람을 차별하는데 아주 능했던 자를 예수님처럼 사람을 구별하는데 능한 자로 바뀐 것이다.

새로운 피조물의 의미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4-17)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모든 사람이, 여기서 모든 사람은 신자를 말함, 죽은 것이라고 한다.(14절) 육신적으로 사망한 것이 아니라 옛 자아가 죽었다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죄를 사함 받아 천국 영생을 보장받았다. 그러나 그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산자가 되었다고 한다.(15절) 옛 자아가 죽고 새 자아로 거듭났다는 것이다. 그래서 저희를 대신하여 죽은 자 즉,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살게 하려는 것이 거듭난 자의 인생 목표라고 한다.

종교적 열정 치성 봉사 등을 최고 최대로 바치라는 뜻이 아니다. 이어지는 16절은 '그러므로'라고 시작한다. 앞에서 말한 것(14,15절)이 원인과 조건이 되어서 16절의 결과와 열매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 열매가 무엇인가?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않는 것" 즉, 사람을 외적 조건으로 차별하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바울은 중생 전에는 예수님도 육체대로 알았다고 실토했다. 예수님을 나사렛 출신이라 괄시하고 율법을 어겼다고 비난하고 부정한 죄인과 교제한다고 같은 부류로 취급했다. 대신에 자기 같은 의인을 하나님의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정죄했다. 하나님을 위하는 열심으로 도무지 묵과할 수 없었고 예수는 반드시 죽여야 할 자로 판단했다. 말하자면 바울도 빌라도 법정에 있었거나 있었더라면 다른 유대인과 동일했을 것이라는 고백이다.

우리도 예수를 믿기 전에는 아비도 모르는 사생아로 로마의 사형수이자 이스라엘 민족만의 메시아와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반발했다. 똑같이 육체대로 예수님을 판단했다. 기껏 잘 봐주어야 세계 사대종교 중의 하나인 기독교를 창시한 선각자 정도로 취급했다.

예수님은 인간이 겪을 모든 차별을 다 감당하시고 기꺼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사람의 외적 조건으로 결코 차별하지 않는 하나님임의 본체 되심을 계시해주셨다. 우리가 그런 깨달음을 얻게 된 것이 우리의 지성, 도덕성, 종교성에 힘입은 것이 결코 아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강권하여(14절) 새로운 피조물을 우리 속에 예수님께서 재창조해주셨기에 가능했다. 예수님을 알고 믿고 따르는 것은 전부 그분의 은혜요 선물이다.

이는 정말로 심각한 의미를 지닌다. 새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내면의 평소 생각과 인생의 가치관이 완전히 바뀐 것이다. 그럼 그 바뀐 사람으로 살 수밖에 없다. 다른 방식으로 산다는 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혹시 연약하고 죄의 본성이 남아 이전 방식으로 살게 되면 그 즉시로 스스로 괴롭고 부끄러워져야 한다. 예수 믿으면 삶이 실은 더 괴로워진다는 것이다.

나무를 보면 열매를 알 수 있고, 열매를 보면 나무를 알 수 있는 법이다. 포도나무인 예수님께 붙어 있는 가지의 신분이 신자다. 예수님이 맺어주는 포도는 반드시 열리게 된다. 사람을 외적 조건으로 결코 차별할 수 없다. 만약 삶에 그런 모습이 없거나 부족하다면 예수님이 공급해주시는 영양분을 어떤 이유가 되었건 신자 쪽에서 일시적 혹은 장기적으로 차단했기 때문이다. 아니면 아직 예수라는 포도나무에 가지로 붙어있지 않은 것 두 가지 이유뿐이다.

가장 차별이 심한 문제

그러나 사람을 구별하지 않고 차별만 했던 유대인 같은 잘못이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버젓이 자행되고 있다. 교회가 예수님이 공급해주시는 영양을 스스로 거부하고 있는 꼴이다. 그 가장 대표적인 문제가 바로 오늘날 최고 핫 이슈인 동성애다. 그것도 기독교의 진보와 보수 측 양진영이 다 동일한 잘못을 범하고 있다.

진보 측은 예수님이 기록에는 없지만 동성애자를 결코 정죄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믿는다. 대신 용서하고 사랑해주었을 것이라고 한다. 극단적으로는 성경의 기록 몇 구절로 문자적으로만 해석해서 예수님도 동성애자였다고까지 주장한다. 따라서 예수님이 동성애를 죄라고 정죄하지 않았기에 오히려 동성애자를 죄인으로 차별하는 자들이 죄를 범한다고 말하다.

죄송하지만 이런 식으로 논리를 전개하는 자들은 아이큐가 두 자리가 아닌가 싶다. 정죄하지 않는다는 말 자체가 이미 죄가 있음을 전제한 것이다. 용서는 죄인에게 해당되지 죄가 없는 자에게는 그럴 필요도 이유도 없다.

지난주에 인용한 요한복음 8장의 현장에서 간음한 여인의 사건에서 예수님이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고 한 후에 뭐라고 말씀하셨는가? 가서 다시는 범죄 하지 말라고 했다.(요8:11) 간음이 사형에 해당하는 죄라고 엄숙히 선포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 사형을 면제해 줄 테니 다시는 간음죄를 범하지 말라는 것이다.

만약 유대인들이 동성애자를 데리고 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동일한 말씀을 하시고 동일한 과정을 거쳐 동일한 결말을 낳았을 것이다. 간음은 레20:10이, 남색(男色)은 레20:13 사형에 처하라고 명시해놓았다. 예수님이 죄 없는 자 먼저 돌로 치라고 하면 모든 유대인이 물러갔을 것이다. 그리고 또 나도 네를 정죄하지 않으니 다시는 동성애 죄를 범하지 말라고 했을 것이다.

보수 측은 율법에 사형에 해당하는 죄로 중죄하기에 동성애자를 교회에 아예 발을 못 붙이게 만든다. 교인들 중에는 같은 사형에 해당하는 간음을 현재진행형으로 범하고 있는 자들도 몇몇 있을 것이다. 죄송하지만 간혹 목사님도 그러면서 강단에선 요한복음 8장을 거룩하게 설교하신다. 그러니 타 종교인들이나 불신자들 눈에는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라는 격으로밖에 비춰지지 않는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은 뜻이 무엇인가? 죄는 죽기까지 철두철미 저주하되 죄인은 죽기까지 끝까지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 아닌가? 동성애라는 행위의 죄 즉, 인간의 외적조건이 당신의 궁극적인 구원의 사랑을 받는데 장애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오해는 마셔야 한다. 동성애는 정말로 심각하고 엄청난 죄다. 일반적인 성범죄와는 차원이 다른 몇 가지 요소들이 있다. 오늘의 주제가 아니기에 다음에 기회가 있으면 자세히 설명해드리겠다.

어쨌든 연쇄살인범도 전도하려고 감옥까지 찾아가는데 동성애자가 교회를 나오면 마치 괴물 보듯이 하며 소외감을 주고 차별하여서 쫓아내버린다. 예수님은 창녀와 식사교제하며 복음을 전했음에도 말이다. 신자가 다른 이를 차별하면 자신의 도덕적 우월감을 자랑하는 교만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자신의 무가치함과 영적인 초라함과 추함을 아직 발견하지 못한 것이다. 만약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는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고도 그러면 그야말로 성령을 훼방하는 죄가 될 수 있는 것 아닌가?

단세포 같은 믿음

기독교 좌파나 우파 모두 단세포 같은 믿음을 자랑하고 있다. 예수님이 동성애자를 용서했으니 동성애는 죄가 아니라고 한다. 예수님이 동성애를 죄라고 저주했으니 동성애자는 용서 받지 못할 죄인이라고 저주한다. 그냥 덧셈 뺄셈만 하는 수준이다.

이런 오류를 범하는 근본 원인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 진보는 차별하지 않는 하나님만 강조한 것이다. 예수님의 공사역의 목표가 인권, 자유, 평등을 확보시키는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예수 십자가에서 공의는 제외하고 사랑의 하나님만 일방적으로 증거 한다.

나름대로 하나님을 더 잘 증거 해보려고 그분에게 힘을 보태어드리려는 시도다. 그러나 성경의 온전한 진리를 제대로 전하지 않고 있다. 잘 봐주어야 성경의 반쪽만 그것도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해석하고 인용했다. 성령의 조명을 받지 않고 인간 이성으로 성경을 해석한 것이다.

비유를 하자면 권력자의 자녀가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자 권력을 이용하여 모든 학생이 그 아이에게 사랑한다는 인사를 하고 함께 놀도록 강제 규정을 만들고 위반하면 벌을 주는 셈이다. 분명 왕따는 없어지나 왕따에 동참하지 않은 선의의 학생까지 역차별을 당한다. 무엇보다 학우들 사이에 순전한 인간관계는 파괴되고 자발적인 참 사랑이 형성되지 못한다.

보수 쪽도 마찬가지로 죄를 구별하는 하나님만 강조한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사랑은 제외하고 일방적으로 공의의 하나님만 증거 한다. 동일하게 하나님을 더 높이고 힘을 실어주려 했지만 반쪽 하나님만 가르친다.

비유를 하자면 권력자의 아들이 학교에서 특별대우를 받자 학생들이 단합해서 그 아들을 왕따 시켜버린 셈이다. 아버지가 잘못한 것이지 아들이 잘못한 것은 아니기에 그 아들만 역차별을 당했다. 동일하게 학생들 사이에 참 사랑이 실종되어 버린다.

진보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려는 명분에 묶여 죄를 구별하지 않았다. 사랑과 공의 중에 사랑의 하나님만 강조한 것은 부모님 중에 무슨 잘못을 용서해도 사랑으로 품어주는 어머니만 부모이지 잘못하면 야단치는 아버지는 부모가 아니라고 말한 것이다. 십자가 복음이 모든 죄를, 장래에 지을 죄까지 용서해준다고 하니까 무슨 죄를 지어도 괜찮아졌다. 초대교회의 영지주의나 현대의 뉴에이지 식의 이단으로 흘러버렸다.

보수는 죄를 구별해야 한다는 명분에 묶여 사람을 차별했다. 사랑과 공의 중에 공의의 하나님만 강조했다. 아버지가 공부 못한다고 야단을 쳤으니까 그나마 내가 이렇게 출세 형통했다고 아버지만 내 부모이고 엄마는 부모가 아니라고 말하는 꼴이다. 예수를 믿어도 할례를 하지 않으면 구원 받지 못한다고 주장해서 바울이 천사라도 다른 복음을 전하면 하나님의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야단 친 유대 식의 율법주의로 되돌아갔다.

소름끼치는 더 심각한 잘못

그런데 진짜로 더 심각하고 소름 끼치는 잘못은 따로 있다. 보수와 진보 양 진영에는 저명한 신학자와 큰 목회를 하시는 목사들이 많이 있다. 성경지식의 전문가들이다. 현재 양상은 그들 양쪽이 전혀 타협은커녕 용납도 않고 서로 다름마저 인정하지 않는다. 감정적 대립으로 치달아서 마치 서로 원수 보듯이 한다. 범 기독교 진영이 갈갈이 찢겨졌다.

성경의 진리까지 타협하라는 뜻이 아니다. 모든 교파가 진리와 상관없이 통합하는 에큐메니칼 운동은 옳지 않다. 각기 오직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 하나님의 반만 전했다고 솔직히 시인해야 한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비추면 또 요한복음 8장을 그렇게 많이 설교했기에 조금만 따져 봐도 간단히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 쉽게 깨달을 수 있지 않는가?

그런데도 작금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비상식적이고 비논리적이고 비이성적인 논쟁만 한다. 그들이 분명히 아이큐 두 자리가 아닌데도 말이다. 무슨 뜻인가? 뭔가에 씌어있다는 것이다. 그들 위에 시커먼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는 것이다.

앞에서 든 권력자 자녀의 두 상반된 비유에서 모든 사태의 발단과 잘못은 권력자였다. 지금 그 비유와 동일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듯이 실제로 그런 권력자가 존재한다. 성경의 하나님의 절대적 생명의 말씀마저 인간의 이성으로 판단케 해서 윤리 도덕 종교로 격하시켜버리는 권력자다. 범사를 혈과 육의 싸움으로만 몰아가는 공중 권세 잡은 자 곧 사탄이 바로 그 권력자다.

좌와 우가 서로 하나님의 뜻이라고 우긴다. 성경을 자기들이 더 잘 해석하고 있다고 우기며 죽기까지 싸운다. 사탄이 인간들을, 신자들을, 아니 신학자와 목회자들마저 편을 갈랐다. 집단적 무지와 고집을 넘어 광기로 몰아간다. 세상은 이미 십자가 처형을 시킨 빌라도 법정처럼 되었다. 불행하게도 실제로 우리 모두 죽었다. 기독교는 개독교가 되었다.

하나님을 위한다는 명분을 등에 업고 어느 쪽이든 세속의 법률을 바꿔 상대방을 굴복시키려 한다. 그럼 마치 하나님이, 복음이 승리한 것처럼 간주한다. 이런 어리석음이 도대체 어디서 온 것인가? 하나님의 전을 위한 열정이 그 전은 물론이고 하나님마저 삼켰다. 서로 하나님의 말씀을 등에 앞세워서 신자, 목사, 신학자들이 광명한 천사로 위장된 사탄의 충성된 종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

현 세태의 흐름을 꿰뚫어 보라.

동성애 자체만 해도 하나님을 거역하는 엄청난 죄이다. 신자는 현재 벌어지고 있는 사태를 정확히 꿰뚫고 있어야 한다. 직접적으로는 신자들의 잘못이지만 그 배후의 너무나도 가공스럽고 음흉한 영적인 흐름을 절대로 놓쳐선 안 된다.

기독교 좌우 양쪽 다 어느 누구도 부정 폄하할 수 없는 명분인 인권과 신권을 앞세운다. 문제는 둘 중 하나만 옳다고 앞세운다. 둘 중 하나가 승리하는 세상이 더 행복하고, 인간이 더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길이며, 하나님의 뜻에도 부합한다고 한다. 사탄이 세상을 휘젓고서 인간끼리 서로 박 터지게 싸우도록 하는데 가장 효과적이고도 손쉬운 방안으로 동성애라는 이슈로 토론을 붙여 놓은 것이다.

앞선 비유에서 결말은 둘 다 학우들끼리 인간관계가 파괴되었고 참 사랑이 실종되었다. 지금 세상은 법제화 내지 집단화 된 그것도 한쪽으로 편중된 윤리가 득세하고 있다. 서로가 의롭다고 경쟁하고 있지만 사실은 인류 역사 이래 최고로 분열되었다. 봉합의 가능성이 거의 없을 정도다.

바울 사도가 디모데후서 3:1-3에서 말세의 가장 큰 특징으로 무엇을 엄숙히 경고하고 있는가? 사람들이 무정해지고 서로 참소한다고 했다. 참 사랑이 실종되는 것이다. 그 이유는 유대인들처럼 하나님을 알고 믿고 따르면서도 예수 십자가를 빠트렸기 때문이다. 기독교 보수는 하나님과 연결되는 세로 십자가만, 진보는 인간과 연결되는 가로 십자가만 붙든 것이다.

십자가는 그 모양만 봐도 사람이 짊어지고 가기에 적합하다. 십자가는 신자 모두가 어깨에 짊어지고 가야 한다. 그런데 가로 세로 하나씩만 붙들고 있으니 막대기가 되었다. 막대기 하나씩 들고서 서로 상대방을 때리기에 바빠진 것이다.

동성애처럼 성적 타락이 절정에 이르렀기에 말세가 된 것이 아니다. 성적 타락은 인류 역사 이래 항상 있었고 소돔과 고모라 때와 본문의 애굽이 더 심했다. 말세는 지금처럼 예수 믿는 자들마저 좌우로 나눠서 싸우는 때이다. 엄격히 말해 여기까지도 괜찮다. 인간이 신을 인식한 이래 예수님 오신 후는 물론 종교개혁을 거쳐 지금까지도 신학적 논쟁은 항상 있어왔다.

그렇게 분리된 것이 사탄의 농간에 춤을 추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 못하고 있는 것이 문제다. 서로 원수가 되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그 근본 원인을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요컨대 예수 십자가의 생명력이 쇠퇴되므로 말세가 된 것이다. 명분을 따지다가 참 생명이 역사하지 않아 죄의 삯인 사망에 이르게 된 것이다.

사랑에 바탕을 두지 않는 공의는 편 가름만 낳는다. 공의에 바탕을 두지 않는 사랑은 사람을 바꾸는 능력이 없다. 나도 네를 정죄하지 않으니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은혜 외에는 인류에게 소망이 전혀 없다.

누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가?

신자는 이 세대의 영적 흐름에 대해 정말로 깨어서 경성해야 한다. 동성애가 유독 기독교만이 예민해 하는 종교적 도덕적 이슈가 아니다. 영적으로 사악해지니까, 참 복음에서 멀어져 하나님의 역사가 약해지니까, 종교와 도덕을 넘어 정치 사회 경제 문화 교육 등 인간 삶의 모든 부분에 분리가 만연하게 되었다.

이처럼 인류가 분리되고 무정하고 참소하기 바쁜 이때에 누가 그 분리를 봉합하려고 노력하는가? 신자가 아니다. 진보주의 기독교 좌파와 타종교인과 심지어 불신자들이다. 미국이 이 지경이 된 것이 사람들이 동성애를 옹호해서만이 아니다. 동성애자를 죄인이라고 차별하는 것이 더 싫다는 것이다. 동성애가 죄가 아니라고 하는 자들이 더 의로운 자로 취급당한다. 이를 법으로 규제해 보려는 것은 이제 대세가 완전히 그들 편에 기울었다. 성경의 진리와 거리가 먼 그들이 실리와 명분 싸움에서 다 이겨버렸다.

그 원인이 무엇인가? 사탄 때문이라고 핑계를 댈 수 없고 대어서도 안 된다. 신자가 사탄의 가공할 능력에 패배한 것이 아니다. 사탄이 따로 하는 일이 없다. 어리석은 인간들, 그것도 신자 목사 신학자들에게 동성애를 갖고 토론해보라고 주제만 던져 준 것뿐이다.

신자는 사탄을 이길 수 있는 모든 것을 이미 다 가졌다. 십자가에서 사탄에게 완전히 승리하신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 성경의 진리를 붙들고 성령님의 인도를 받으며 기도할 수 있다. 사태가 이렇게 된 데는 정말 십자가 소명의 막중함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같은 목사의 책임이 가장 크다. 참 생명을 전하고 실현하는데 온전히 헌신해야 한다.

요컨대 지금 이 사태는 저를 비롯한 우리 모두가 새로운 피조물로서 첫 째이자 가장 중요하게 변화된 모습으로 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죄인은 절대 차별하지 않고 죄는 정확히 구별하신 예수님처럼 살지 않았다. 주님의 십자가에 드러난 생명과 진리를 온전히 증거 하지 못했고 그 구원의 은혜를 사람들에게 베풀지 않았고 그 권능으로 세상을 상대하지 않았다.

역으로 말하면 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자는 성경의 진리를 알고 있는 보수 측 기독교뿐이다. 우리가 성경대로 살지 않으면 세상은 아무 소망이 없고 멸망으로 치닫게 된다. 실제로 지금 그렇게 되어가고 있다. 신자와 교회는 정말로 원색적인 십자가 복음을 회복하고 증거하고 실현해야 한다. 그럼 지금이라도 얼마든지 세상을 뒤집을 수 있다. 초대교회의 신자들이 그랬듯이 말이다.

다른 말로 십자가 구원을 단순히 천국 가는 보험에 드는 것으로 여겨선 안 된다. 기독교를 현실 형통의 복을 비는 종교로 전락시켜선 안 된다. 혈과 육의 싸움으로 몰고 가는 사탄에게 져서 참 생명의 진리를 이성으로만 판단하는 윤리 차원으로 떨어트려선 안 된다. 우리가 속한 직장, 교회, 아니 가정에서부터 사람을 외모로 차별해선 안 된다. 예수 십자가 새 생명 안에서 죄는 철저히 저주하고 죄인은 끝까지 사랑하는 것만이 세상도 살아나고 우리 자신도 살아나는 유일한 길이다.

[출처:whyjesuson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