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섭 목사. ⓒ이대웅 기자
(Photo : ) ▲이경섭 목사. ⓒ이대웅 기자

 

 

칭의유보자들은 자신들의 유보칭의의 근거를 대기 위해 나름대로 성경적 근거를 들이대나, 사실 그 배경을 면밀히 살펴보면 성경보다는 심리주의와 실용주의 메커니즘에 더 고무된 듯 합니다. 이미 의(義)가 완성 종결됐다는 이신칭의 교리는 나태한 인간 본성에 방종을 부추길 것이라는 추정이, 그들로 하여금 두려움과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칭의유보의 제정을 필요로 하게 했습니다. 꼭 집어 말하진 않지만 그들 문맥의 행간에서 그런 기류가 흐릅니다.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기대가 배제된 채, 심리학적이고 실용주의적인 메커니즘에만 고무되어 나온 것으로는 성경적 지지를 받을 수 없습니다. 주지하듯 기독교 신앙은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죄 사함, 구원, 기도 응답 등은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다(마 19:26)' 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 전제입니다.

본래 이 말씀의 출처는 '부자가 천국 들어가기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기보다 더 어려우면 누가 과연 천국에 들어갈 수 있나이까?'라는 베드로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응수였지만, 모든 신앙에 적용됩니다. 본문에만 국한시켜 이해한다면, 부자가 천국 들어가는 것이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하지만, 전능하신 하나님이 하시면 가능하다는 뜻입니다(반면 하나님이 해 주지 않으시면 부자는 아무도 천국에 못들어 간다는 뜻입니다).

이를 성경 전체의 구원론에 확대 적용시키면, 하나님은 구원을 무능한 인간 손에 맡기지 않고 자신의 전능하심과 주권으로 성취한다는 뜻입니다.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계 7:10)'라는 말씀 그대로입니다.

그러나 만일 칭의유보자들의 논리대로 칭의유보의 두려움이 방종을 막아줘야 종말에 칭의가 보장된다면 하나님이 하실 역할도 없어지고,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할 수 있다"는 말씀도 설 자리가 없어집니다.

이 점과 관련하여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칭의 유보에 대한 두려움이 현재의 의(義)를 종말 때까지 성공적으로 유지시켜 줄 것이라는 유보칭의자들의 막연한 추정은, 심리학적으로도 영적으로도 근거가 희박하다는 사실입니다.

오늘날 두려움이 사람의 심신을 위축시켜 기능성과 효용성을 떨어뜨린다는 것이 주지의 사실인데, 공포심을 조장하여 의를 유지시키려는 발상은 과학적이지도 영적이지도 않습니다. 성경은 두려움과 영적 능력은 공존할 수 없는 대치 개념으로 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딤후 1:7)." 두려움이 주장하는 곳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할 수 없고,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하는 곳에는 두려움이 없다는 뜻입니다. 물론 성경에도 '두려워하라'는 말씀이 많이 나오지만, 그것은-또 다른 은혜적 측면으로서의-아버지에 대한 자식의 경외심이지, 구원에서 탈락될까 하는 종말론적 공포심은 아닙니다.

우리는 성경이 은혜를 모든 신앙행위의 원천으로 말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속에서 강하고(딤후 2:1)',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골 1:6)'. 성도의 능력, 헌신, 성장이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에 기반한다 는 뜻입니다. 이러한 은혜지향적인 기독교 정체성에 비추어 볼 때, 공포심을 신앙의 동기로 삼는 것은 온당치 않습니다.

우리는 종말 때까지 의를 유지하지 못하면 버려질 것이라는 소위 칭의유보적 두려움을 당연시하고 답습하는 사람들에게, 심각하게 그것의 위험성을 환기시키고자 합니다. 이는 그 두려움의 실체가 하나님의 자녀들이 갖는 근신(a sound mind)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율법의 종된 자들, 곧 종의 영(롬 8:15)을 가진 자들에게서 나오는 율법적 공포심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율법적 공포심은 성령을 훼방하고 하나님의 사랑(롬5:5)을 차단시켜 결국 심판을 초래합니다(요일 4:18).

칭의 유보의 두려움을 정죄하고 경계하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합니다. 두려움은 단지 정서적 문제만이 아닌, 그 배후에는 파괴적인 일을 도모하는 원수의 책략이 숨어 있습니다. 곧 두려움을 통해 사람들을 자신에게 묶어두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여, 결국은 구원에 이르지 못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두려움'에 '종의 영(롬 8:15)'이라는 인격적인 호칭을 부여한 이유도 여기 있습니다.

또한 '완전에서 완전'으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경륜에 비추어 볼 때, '미완성에서 완성'을 지향하는 칭의 유보는 성경의 지지를 끌어내지 못합니다. '은혜 위에 은혜(요 1:16)', '믿음으로 믿음에(롬 1:17)' 라는 말씀들은, 불완전함에서 완전함으로, 미완성에서 완성으로 나아가는 칭의의 점진성을 확보해주는 근거 구절들이 아닙니다. "은혜 위에 은혜(요 1:16)"는 넘치는 은혜의 충족성, 혹은 중단없이 부어지는 은혜의 지속성을 뜻합니다.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롬 1:17)' 역시, 불완전한 믿음에서 완전한 믿음으로의 점진적 믿음의 완성(John Calvin)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의롭게 됨이 오직 믿음으로만 된다'는 믿음의 강조 혹은 의롭다 함을 입혀 준 최초의 완전한 믿음이 역동성있게 믿음을 계속 고무한다는 뜻입니다.

영적 전진의 개념은 진화론자들의 논리처럼-원숭이가 인간으로 진화하듯이-불완전한 인간에서 완전한 인간으로의 진화가 아닌, 어린아이가 어른이 되듯, 완전한 인간에서 보다 완전한 인간으로의 자라남입니다.

다음의 성경구절들도 같은 관점을 드러냅니다. '이제는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이 새사람은 여러분 안에 새 생명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모습을 따라 참된 지식에 이르도록 새롭게 되어가고 있습니다(골 3:10)',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엡 2:10)'. 성도가 요구받는 선한 삶은 의롭다함을 받은 자 답기 위한 것이지, 의롭게 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사데 교회를 향해 "옷을 덥히지 아니한 자 몇명(계 3:4)"을 말한 것은, "칭의 받은 자 답게 의롭게 살았던 자 몇 명"이라는 뜻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성도들의 거룩을 장려하실 때도 늘상 쓰는 어법입니다. 간음 중 붙들린 여자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요 8:11)'고 하신 말씀 역시, 의롭다 함을 받았으니 죄를 피해야 한다는 뜻이었지, 다시 죄를 범치 아니하면 정죄하지 않는다는 의 의미가 아니었습니다. 성도는 옳다 여기심을 받아 옳게 행하고, 하나님자녀가 된 후 하나님자녀 답게 살고, 새로운 피조물이 된 후 변화된 새 삶을 삽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방식은 됨(being)에서 행함(doing)으로 나아가지, 행함(doing)에서 됨(being)으로 나아가지 않습니다. 이는 행함(doing)으로는 됨(being)을 창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됨(being) 없이 행함(doing)만 있는 것은, 죽은 시체에 향수를 뿌리는 것 같은 위선입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 서기관들을 외식자라고 비난 하신 것은(마23:25), 그들에게는 행함만 있고 됨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칭의(중생) 이후에 성화를 두신 것은, 됨(being) 후에  행함(doing)이 오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의 인간관을 존재론적(ontological, being) 인간관이라 함도 이 때문입니다. 우리가 의롭게 살려고 노력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 해주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의롭게 되려고 의로우려는 칭의유보자들과의 근본적인 차이입니다. 그들에게 성화란 칭의의 결과가 아닌, 칭의를 위한 제의적인(cultic) 것입니다. 그렇게 행함(doing)으로 됨(being)을 창출하려다보니, 칭의와 성화가 뒤죽박죽 섞어찌개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열매의 질에 있어서도, 의롭게 되려는 목적으로 내는 칭의유보자의 열매와, 의롭다함을 받은 이신칭의자들이 내는 열매가 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말하고자 합니다.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나는 파종의 원리 그대로입니다.

의롭다는 인정을 받기 위한 율법적인 행위에서 질 좋은 제품이 나올 수 없는 이유는, 율법의 요구에 쫓겨 허덕이며 만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이 바로의 채찍을 맞으며 만든 벽돌이 질 좋은 상품이 못됐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합니다.

또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이 드린 제물들을 눈 멀고, 절고, 병든 것들(말 1:8)이라고 지칭한 것도-실제로 그런 것들을 드린 때문이기도 했겠지만-그것이 상징하는 바, 율법의 요구로 마지못해 급조해 바친 제물의 저급함을 뜻합니다.

이에 반해 맏물(the firstfruits)로 칭송된 제물은(신 26:2) 구원의 감읍함 속에서 자원함과 기꺼움으로 드린 예물들을 상징합니다. 죄사함의 은혜에 감격하여 예수의 머리에 옥합을 붓고, 눈물과 머릿털로 발을 닦은 마리아의 헌신은(눅 7:38) 자원함과 기꺼움이 배인 극상품의 맏물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오직 그리스도의 의 만을 유일한 대속물로 받으신 이유도, 그리스도의 희생이 흠 없고 완전했다는(벧전 1:18-19) 사실 외에, 스스로 하늘 보좌를 버리고 죄인되어 오셔서(빌 2:6-8), 자원함으로 드려진(요 10:18) 향기로운 생축(엡 5:2)이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의롭다 함을 받은 그의 자녀들의 헌물을 기쁘게 받으시는 이유도, 구원에 감읍하여 자원함과 기꺼움으로 드린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면 칭의 유보자들이 드리는 예물을 하나님이 받지 않으실 이유 역시 명백합니다. 그들의 헌물은 대어도 대어도 율법의 요구에 미치지 못하는, 부도난 빚잔치일뿐더러, 기꺼움 없이 마지못해 드리는 억지 예물이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전문위원, byterian@hanmail.net) 
저·역서: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현대이신칭의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