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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온 사람으로 갈멜 지방에서 크게 목축업을 하는 나발이란 부자가 있었다.  다윗이 사울의 핍박을 피해 이리저리 도망 다니던 중 어느 날 다윗은 나발의 집에서 양 털을 깎는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 때는 마치 추수기와 같아 사람들의 인심은 보통 넉넉했다.  마침 다윗과 수하들이 그의 목장 주변에 머물러 자연스럽게 나발의 목축들을 보호하는 역할을 했다.  이를 안 다윗은 인심이 넉넉할 것으로 본 나발에게 자기 수하를 보내 도움을 받고자 했다. 


그러나 단호하게 도움을 거절한 나발은 이렇게 답했다.  "다윗은 누구며 이새의 아들은 누구뇨 근일에 각기 주인에게서 억지로 떠나는 종이 많도다"(삼상25:10절)  이로 보아 나발은 다윗이 누구인 줄 알았다.  다윗이 그 당시 사울 왕에게 핍박을 받고 있음도 알았다.  그를 도와줄 경우 앞으로 사울 왕에게서 어떤 불이익과 어려움을 당할 지도 잘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 부족한 것이 있었다.  다윗이 비록 고난을 당하고 있지만 하나님의 세움을 받아 앞으로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이란 믿음이었다.  불신앙이 그가 다윗을 박대하게 만들었다.


돌아온 수하에게서 안 좋은 소식을 들은 다윗은 분노하여 즉시 군사를 동원해 나발에게로 갔다(삼상25:13절).  이 때 소년 중 하나도 나발의 부인 아비가일에게 급하게 찾아가 나발이 다윗을 모욕했음을 알려주었다.  아비가일은 필요한 물자들을 챙기고 자신이 직접 다윗을 만나려고 재촉해 집을 나갔다.


급히 다윗을 만나기 위해선 정상적인 길을 갈 수 없었다.  아비가일은 산의 유벽한 곳을 택해 나귀를 타고 서둘러 내려 갔다(삼상25:20절).  남편과 집안을 구하고자 하는 다급한 마음에서였다.  그리고 나중 알려졌지만 다윗으로 하여금 불필요한 살인을 저지르지 못하도록 방지하려는 배려에서였다. 

 

이 때 그는 반대 편에서 마주 내려오는 다윗을 만났다.  얼른 나귀에서 내려 다윗에게 절을 했다.  그리고 남편의 죄를 자신에게 돌리고 자신의 말을 들어달라고 사정했다. 


"내 주여 여호와께서 사시고 내 주도 살아 계시거니와 내 주의 손으로 피를 흘려 친히 보수하시는 일을 여호와께서 막으셨으니 내 주의 원수들과 내 주를 해하려 하는 자들은 나발과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삼상25:26절)  이런 놀라운 말도 했다.  "주의 여종의 허물을 사하여 주옵소서 여호와께서 반드시 내 주를 위하여 든든한 집을 세우시리니 이는 내 주께서 여호와의 싸움을 싸우심이요 내 주의 일생에 내 주에게서 악한 일을 찾을 수 없음이니이다 사람이 일어나서 내 주를 쫓아 내 주의 생명을 찾을지라도 내 주의 생명은 내 주의 하나님 여호와와 함께 생명싸개 속에 싸였을 것이요 내 주의 원수들의 생명은 물매로 던지듯 여호와께서 그것을 던지시리이다 여호와께서 내 주에 대하여 하신 말씀대로 모든 선을 내 주에게 행하사 내 주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우신 때에 내 주께서 무죄한 피를 흘리셨다든지 내 주께서 친히 보수하셨다든지 함을 인하여 슬퍼하실 것도 없고 내 주의 마음에 걸리는 것도 없으시리니 다만 여호와께서 내 주를 후대하신 때에 원컨대 내 주의 여종을 생각하소서"(삼상25:28-31절)


그의 언급은 내용상 넷으로 나누어진다.  다윗은 하나님 나라 이스라엘을 다스릴 왕이 될 것이다.  이 덕분에 다윗의 생명은 어디서나 하나님에 의해 늘 그리고 틀림없이 보호를 받을 것이다.  반면 그의 대적은 그의 손에 반드시 망할 것이다.  그러므로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먼 훗날 후회할 일을 그 전에 저지르면 절대로 안 된다.


아비가일은 정말 놀랍고도 지혜로운 여인이었다.  시골 궁벽한 곳에 살았지만 고난 당한 다윗이 누구이며 앞으로 무슨 일을 할 것인지를 정확히 알고 믿고 있었다.  아비가일은 이스라엘과 다윗의 관계를 잘 이해하고 있었다.  이스라엘은 인간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였다.  이방 나라와 다른 하나님 나라를 가나안 땅에 세우도록 다윗은 하나님의 특별한 부름을 받았다.


그곳에 세워질 하나님 나라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법에 근거를 둔 통치가 실현될 곳으로 인간의 탐심에서 나오는 폭력은 절대로 금물이다.  하나님의 심판이 나타나기까지 이스라엘의 왕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인내로 통치하여야 했다.  하나님의 이런 통치 실현을 위해 다윗은 부름을 받았다.  이를 위해 불필요한 살인 행위는 금해야 했다.

 

?한 마디로 벽촌의 촌부였지만 아비가일은 이스라엘의 존재와 다윗의 부름이 갖는 구속사적인 목적과 의미를 정확히 알았다. 소문으로 들려오는 사울과 다윗에 관한 여러 가지 소식을 들을 때마다 그 구속사적인 의미를 깨닫고 그 당시 의인인 아비가일은 다윗이 왕 되기까지 기다렸을 것이다. 

 

?당시 사람들은 모두 다윗에 관해 소문이나 소식을 동일하게 들었다. 그 소식은 아비가일에게는 믿음을 키워주는 복된 것이었다면 그의 남편 나발에게는 주인을 거역하고 불순종하는 악한 종의 이야기에 지나지 않았다.  믿음이 이렇게 큰 차이를 만들어 냈다.  다윗은 아비가일의 말을 듣고 깨달은 바가 있어 이렇게 답했다.

 

"오늘날 너를 보내어 나를 영접케 하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할지로다 또 네 지혜를 칭찬할지며 또 네게 복이 있을지로다 오늘날 내가 피를 흘릴 것과 친히 보수하는 것을 네가 막았느니라 나를 막아 너를 해하지 않게 하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노니 네가 급히 와서 나를 영접지 아니하였더면 밝는 아침에는 과연 나발에게 한 남자도 남겨 두지 아니하였으리라"(삼상25:32-34절)


집안에 닥칠 재앙을 미리 막은 아비가일은 집으로 돌아갔다.  이 때 나발의 집은 왕의 잔치 집 같았다.  술에 취해 있는 남편 나발에게 다소간 아무 말도 안하고 다음날 아침까지 아비가일은 기다렸다.  그리고 아침 술에서 깨자 남편 나발에게 어제 일어난 일에 대해 자세히 말해주었다.  그의 미련함과 그로 인해 닥칠지 모른 집안의 불행을 자세히 알려주어 앞으로 다윗에게 같은 잘못과 실수를 하지 못하도록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말은 들은 나발은 그만 낙담하여 몸이 돌과 같이 되었고 열흘 동안 그 상태로 있다가 죽었다.  성경은 하나님이 그를 치매 죽었다고 기록한다(삼상25:38절). 인간적으로 보면 참으로 억울한 죽음이다.  다윗을 박대했다고 하나님이 그를 죽이다니......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다윗이 하나님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일을 할 하나님의 종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앞으로 올 메시아를 모형 하는 인물이었다.  그러므로 그를 박대한 것은 그를 세우고 보낸 하나님과 그가 모형 하는 참 그리스도를 무시한 것이다.  이것은 불신잉이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다윗을 신앙의 눈으로 보아야 했다.  이 점에서 나발은 잘못했고 그 결과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다.


오늘날 목회자들이 자신의 영적 권위를 세우기 위해 나발 사건을 잘 인용한다.  그러나 이것은 큰 잘못이다.  다윗은 앞으로 올 메시아를 모형한다는 점에서 오늘날 목회자와 완전히 다르다.  그리고 간음죄를 범한 목회자가 다윗의 간음 사건을 인용하며 자신의 허물을 벗고자 하는데 이도 하나님 앞에 아주 큰 잘못이다.  다윗과 오늘날 목회자 사이 차이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 결과이다.


예수님도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특별히 보냄을 받았다.  이 때문에 그를 무시하는 것은 그를 보낸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란 존재는 복과 화 그리고 생명과 사망의 갈림길이다.  다윗 시대 이런 갈림길은 위에서 언급한 두 인물에게서 잘 나타난다.  다윗을 박대한 나발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죽었지만 그의 부인 아비가일은 나중 다윗의 두 번째 부인이 되어 결국 왕후가 되었다.  이를 가른 것은 다윗이란 존재를 어떤 믿음의 눈으로 보느냐 여부에 있었다.  예수님과 관련하여 신약 시대에도 이것은 동일하다.

 

아비가일의 훌륭한 점은 또 있다.  나발의 죽음을 안 다윗은 그를 자신의 아내로 취하고자 사람을 보내 알렸다.  이 때 그는 지체 없이 다윗을 따라갔다.  남편의 재산을 상속 받아 나머지 삶을 얼마든지 행복하게 살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다윗의 고난이 언제 끝날지 확신하지 못하면서도 모든 것을 버리고 주저 없이 다윗을 따랐다(삼상25:40-42절).  그 후 마지막까지 다윗과 함께 고난을 당했다.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에 기꺼이 동참한 것이다.  이것은 믿음이 아니고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비가일이란 인물은 불신 세계에 살면서도 복음에 귀가 열린 신자들을 상징한다.  이들은 세상 나라와 하나님 나라 사이 차이를 깊이 깨닫고 불신자들의 비웃음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위해 기꺼이 헌신하는 신자들이다.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들의 신앙 고백은 지극히 성경적이다.  그러므로 수복강령(壽福强寧) 같은 세상의 복(福)보다는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을 더 기뻐하며 어떤 환경에서도 이들은 예수님의 뒤를 끝까지 따른다.  세상 속의 교회와 성도들이 이래야 하지 않겠는가?


아비가일의 뒤를 이어 유다 지파의 한 성읍인 이스르엘 출신 아히노암도 다윗의 부인이 되었다.  다윗을 따르는 무리들은 대부분 유다 지파에 속했다.  이들 중에 섞인 젊은 여인이었을 것이다.  아비가일이 기혼자로서 다윗의 부인이 되었다면 아히노암은 미혼자로서 부인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아비가일은 거부(巨富)의 아내였다면 아히노암은 그저 무명(無名)의 여인이었을 것이다.  그래서인가 아히노암에 대한 성경의 기록은 너무나 단순하고 지극히 제한적이다.


두 여인 모두 다윗에게 평생 헌신적이었다.  그러나 다윗은 고난을 당하는 특수한 환경에 처해 있었다.  이런 때 부유한 출신인 아비가일보다는 보통 사람의 삶을 산 보다 젊고 강한 아히노암이 다윗을 위해 더 많은 일을 했을 것이다.  힘든 세월을 살 때일수록 그런 여인이 다윗에게 더 큰 힘이 되기 마련이다.  그래서인가 성경은 항상 아히노암을 아비가일보다 앞세워 기록했고 아히노암이 다윗에게 첫 아들 암논을 낳아 주는 영광을 얻었다.  아비가일은 먼저 부인이 되었지만 다윗에게 차남 다니엘(길르압으로도 불림)을 낳아 주었다.


아히노암과 아비가일은 모두 헌신적이며 진실한 신자들을 상징하는 인물들이다.  그러나 전자는 어릴 때부터 보통 사람의 삶에 적응하며 살아 신자로서도 이미 연단 받은 성도처럼 살 수 있다.  그러나 후자는 부유한 출신이었다.  아마 죽은 남편 나발의 재산으로 다윗을 잘 도와주었을 것이다.  둘 다 진실한 성도임에 분명하지만 환경에 따라 헌신의 정도와 내용에서 둘 사이 차이가 날 수 있다.  이 두 여인 모두 다윗에게 필요했듯이 교회나 하나님 나라도 이 두 종류의 헌신적인 성도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이들이 낳은 아들들은 다른 모습을 보였다.  아히노암의 아들 암논은 다윗의 셋째 아들 압살롬의 여동생이며 자신의 이복 동생인 다말에게 몹쓸 짓을 저질렀다(삼하13장).  이로 인해 다윗과 그 가문은 자식들 간 피를 흘리는 불행과 비극을 당해야 했다.  그러나 아비가일의 아들 다니엘에 대한 기록은 없다.  그의 평생 아버지 다윗에게 아무 문제도 일으키지 않았다는 뜻이다.


즉 암논은 다윗의 첫째 왕자로서 자신의 영광스런 신분에 걸맞은 처신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면 다니엘은 지나치게 소극적일 정도로 조신하게 처신한 왕자였을 것이다.  이스라엘이 하나님 나라였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차라리 조용한 다니엘이 활동적으로 보이지만 자제력이 부족한 암논보다 더 훌륭한 하나님의 일군으로 드러났다.


부모들의 훌륭한 신앙 삶으로 얻어진 복된 결과가 후손들에게는 역효과를 낼 수 있다는 가르침이 숨어 있다.  달리 말한다면 부모의 신앙이 자식에게 잘 전달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다윗을 고난 때부터 따랐다는 자부심과 자긍심이 이들에게 평생 남아 영적 성장의 걸림돌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출처:http://blog.daum.net/parkl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