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삼열 목사, 산타클라라한인연합감리교회 CA
(Photo : ) 홍삼열 목사, 산타클라라한인연합감리교회 CA

최근에 한국에서 세월호 침몰 사건이 발생해서 수많은 학생들이 목숨을 잃었다. 이를 계기로 그 선박의 실소유주인 유병언과 그가 교주처럼 지배하고 있는 “구원파”가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필자에게도 구원파가 뭐냐고 묻는 분들이 있어서 이 지면을 통해 간단하게 정리해드리고자 한다.

구원파는 네델란드 선교사인 케이스 글래스와 미국 선교사인 딕 욕의 영향으로 1960년대 초에 한국에서 시작된 기독교 이단이다. 현재 유병언파(기독교 복음 침례회), 이요한파(생명의 말씀 선교회), 박옥수파(기쁜 소식 선교회) 이렇게 세 계열로 나뉘어 활동하고 있는데 그 시작은 권신찬 목사이다. 권신찬은 예장통합측 장로교 목사로 활동하다가 “죄사함을 깨달아” 침례를 받음으로써 (사람이 회개와 믿음이 아닌 “깨달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이 구원파의 주요 교리중 하나이다) 장로교 총회로부터 이단으로 정죄받아 목사직을 박탈당한 인물이다.

현재 문제가 되고 있는 유병언은 권신찬의 사위로서 권신찬의 뒤를 이어 기독교 복음 침례회를 이끌고 있다. 한편 이요한은 유병언이 자신의 사업을 위해 교회를 이용하는 것을 비판하다가 권신찬이 유병언을 지지할 때 그들에게서 분리되어 나와서 방계그룹을 형성한 사람이다. 그리고 박옥수는 권신찬-유병언 계열과는 직접적으로 관계가 없지만 그들이 선생으로 모신 동일한 외국인 선교사들의 영향을 받아 자신의 교회를 형성했는데 같은 선생에게서 나왔기 때문에 교리적인 면에서 거의 같다고 할 수 있다. 이들 모두가 침례교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지만 정통 침례교와는 상관이 없는 이단들이다.

자 그러면 왜 구원파가 이단으로 정죄되었는가? 우선 유병언파에게만 해당되고 나머지 둘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사항이 있는데 그것은 교회와 사업의 동일시의 문제이다. 현재 매스콤을 통해 잘 알려져 있는 사항이지만 유병언은 교회를 이끄는 수장인 동시에 기업의 총수이다. 사업가인지 전도인인지 헷갈린다. 유병언은 교회와 기업을 구분하지 않고 교회헌금으로 사업을 하고 또 신도들에게 구원파 기업체에 참여하는 것을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면서 기업활동과 신앙생활을 동일시하고 있다.

두 번째로 구원파가 이단으로 정죄되는 이유는 구원받은 날짜를 알아야 구원받은 것이라는 주장 때문이다. 주로 이 이유 때문에 이들이 “구원파”로 불린다. 물론 문제있는 사람들에게 붙여진 이름의 대다수가 그렇듯이 이 “구원파”라는 이름도 그들 스스로가 자랑스럽게 붙인 이름이 아니다. 이 이름은 그들을 비판하는 사람들, 특히 지금은 작고한 종교문제연구소장이었던 탁명환씨가 붙여준 것으로 현재는 사람들이 그들을 부르는 공식 명칭이 되었다.

구원파 사람들이 정통 기독교인들을 만나면 사용하는 단골 질문이 있다. “선생님, 구원받으셨습니까?” “예, 구원 받았습니다.” 그러면 그 다음 이어지는 질문이 “언제 어디서 구원받으셨습니까?”이다. 이에 대해 정확히 확신있게 대답하지 못하면 “죄송하지만 선생님은 구원받지 못하셨습니다.” 라고 말해준다. 자신이 육신적으로 태어난 날은 정확히 기억하여 매년 지키면서 어떻게 우리의 영생을 좌우할 영의 생일을 기억하지 못하느냐는 것이다.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구원받은 날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은 아직 영적으로 거듭나지 못한 증거라는 것이다.

그것이 사실일까? 구원받은 날짜가 그렇게 중요한 것인가? 구원받은 날짜를 아는 것이 그렇게 중요하다면 왜 성경에는 그런 걸 주장하는 내용이 하나도 없는 것일까? 우리가 분명히 알아두어야 하는 것은 구원받은 날짜와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현재 내가 구원받은 상태에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가 중요한 것이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바울이나 빌립보 감옥의 간수같이 극적으로 하나님의 기적을 보고 구원을 체험한 사람들, 그래서 구원받은 날짜와 장소를 정확히 댈 수 있는 사람들도 있지만, 반면에 디모데나 루디아같이 그런 극적인 회심의 경험이 없이 (물론 본인이 인식하든 인식하지 못하든 나름대로 회심의 순간이 있었겠지만 적어도 그것이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성경에 그 사건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조용히 예수님 믿고 회심하고 구원받게 된 사람들도 있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구원받았느냐를 아는 것이 아니라, 현재 내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 안에 들어와 있느냐 아니냐인 것이다.

세 번째로 구원파가 이단으로 정죄된 이유는 한 번 회개하고 죄사함 받은 사람은 더 이상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이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그들은 회개(metanoeo)와 자백(homologeo)을 구분한다. 회개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깨달을 때 단 한 번만 하는 것이고, 그 이후로는 일상적인 죄들에 대해 자백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어떤 근거로 이런 주장을 하는가? 요한일서 9절을 근거로 든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homologeo)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그러면 성경에 정말 회개는 한 번만 하면 되고 자백은 반복해서 하라고 되어 있는가? 그렇지 않다. 우선 위의 요한일서 9절을 검토해보면, 거기에서 말하는 “자백”은 사실 구원파가 주장하는 “회개”와 동일한 개념이다. 우리가 자신의 죄를 “자백”할 때 하나님이 모든 불의(adikia, 여성형 단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해주신다고 했는데, 이 “불의”는 의롭지 못한 개별행위들(복수)이 아니라 그런 행위들의 뿌리인 “불의”(단수)인 것이다. 이렇게 “자백”이 그런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준다면 이건 구원파에서 말하는 “회개”와 전혀 다르지 않은 것이다.

또 성경 곳곳에 보면 일상적인 죄들을 씻는 것을 가리킬 때 “회개”라는 동일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고린도후서 12:21절을 보라. “내가 전에 죄를 지은 여러 사람의 그 행한 바 더러움과 음란함과 호색함을 ‘회개’하지 아니함 때문에 슬퍼할까 두려워하노라.” 또 요한계시록의 일곱 교회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내용들을 보라. 이미 예수를 영접한 교회/사람들에게 계속 “회개”하라고 외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예수님 자신이 매일 회개하라고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셨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이렇게 많은 곳에서 회개하라고 하고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매일 회개하라고 말씀하시는데, 구원파만은 이걸 부정하고 회개는 단 한 번만 하면 된다고 하니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주장이다.

그러면 왜 구원파는 이런 성경의 명백한 예들을 부정하면서 한 번의 회개만을 고집하는 것일까? 그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칭의의 교리를 왜곡함으로써 정통 교회에 대항하여 자기들만이 올바른 구원의 교리를 가르치고 자기들만이 구원받는다는 이단의 체계를 세우기 위함이다.

구원파는 성경에서 가르치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칭의(justification)를 철저히 오해한다.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의”가 필요하고 이 “의”는 우리의 선한 행위로 얻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은총을 통해 주어진다는 것이 칭의의 교리의 핵심이다. 그런데 구원파는 이 칭의의 교리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것을 완전히 다른 의미로 이해한다. 즉 예수를 통해 우리에게 의가 주어질 때 우리 속에 있는 “죄덩어리”가 단번에 완전히 없어져서 이제부터는 다시 회개할 필요가 없어진다는 뜻으로 이해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칭의가 그런 의미일까? 그렇지 않다. 우리가 십자가의 은총으로 죄가 용서받고 의롭게 된다는 것은 우리에게서 죄가 완전히 없어진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에게 죄가 남아있지만 더 이상 하나님이 그것을 죄로 여기지 않겠다는 의미인 것이다. 마치 법정에서 범죄를 저지른 피고가 그 범죄에 대한 형벌을 면제받는 것과 같다. 그런데 형벌을 면제받았다고 그 범죄 자체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듯이, 하나님이 우리의 형벌을 면제해주시고 의인으로 선언해주셨다고 해서 우리의 죄성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닌 것이다. 만일 그런 식으로 단번에 우리의 모든 죄의 문제가 해결되고 더 이상 회개할 필요가 없어진다면, 한번 회개한 다음에는 우리가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는 말인가?

우리는 칭의를 위한 회개와 성화를 위한 회개를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구원파에서는 한 가지 종류의 회개, 즉 칭의의 회개만을 알고 있는데, 그것은 성경에 맞지도 않고 우리의 경험에 맞지도 않는다. 바울이 구원받은 후에도 자신의 죄성과 싸우는 모습을 보였고 다윗도 여러 번 회개한 것을 성경에서 볼 수 있듯이, 회개는 한번만 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 반복해서 해야 하는 것이다.

네 번째로 구원파가 이단으로 정죄되는 이유는 전인적인 회개(즉 지정의를 모두 아우르는 회개) 대신에 지적인 차원에서만 하는 “쉬운” 회개를 가르치기 때문이다. 즉 죄에서 돌아서려는 의지가 필요 없는 “깨달음”만으로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이고 이 깨달음이 성경에서 말하는 회개의 전부라는 주장이다. 그래서 권신찬은 일찍이 빌리 그래함 목사가 여의도전도대회에 와서 죄사함을 깨달으라고 설교하지 않고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영접하라는 의지적인 결단을 촉구하자, 그가 성경을 잘못 이해했다고 하면서 그도 구원받지 못했다고 한탄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구원파가 주장하는 구원의 과정은 이렇다.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실 때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실 때 인류의 모든 죄가 일시에 용서되었다. 이 용서는 우리가 회개를 하든 하지 않든 상관이 없다.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다 용서해주신 것이다. 그러면 구원파에서는 결과적으로 누가 구원을 받는가? 우리가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모든 죄가 용서받았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그 순간 우리의 모든 죄가 용서받고 거듭나고 구원받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구원파에서는 회개의 고된 투쟁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고 오직 깨달음만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이 가르치는 회개는 어떤 모습인가? 구원파에서 말하는대로 회개는 지적인 차원의 “깨달음”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머리와 가슴과 의지를 동원하는 전인격적인 회개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주님께로 방향전환을 할 때 이 회심/회개는 세 가지 측면이 있는 것이다. 머리로 복음을 이해하는 것(mental assent), 가슴으로 복음을 체험하는 것(inner experience), 그리고 주님께로 의지적인 위탁(trust)을 하는 것을 동시에 포함하는 것이다. 바로 이런 정적이고 의지적인 회개의 모습이 구원파의 구원론에는 빠져 있는 것이다. 바울이 사도행전 20:21절에서 자신의 복음전도의 핵심으로 설명한대로 우리는 깨달음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부단한 회개와 십자가의 은혜에 나 자신을 의탁하는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다.

다섯 번째로 구원파가 이단으로 정죄된 이유는 오랫동안 기독교 전통으로 내려오는 경건의 모습들을 “종교행위”로 규정하면서 배척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십일조제도, 직분제도(장로, 권사, 집사), 새벽기도, 철야기도, 축도, 심지어는 주기도문까지 “종교”와 “율법”으로 규정하면서 복음의 시대를 사는 사람들은 그런 규정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기성교회는 그런 복음에 반대되는 율법행위를 가르치기 때문에 구원이 없다고 주장한다.

물론 그런 종교의식들이 알맹이가 빠진 형식에 그치는 경우 구원파의 지적이 맞을 수 있다. 나의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이해가 없이 그저 무슨 짓을 하든 소득의 1/10만 바치면 된다고 한다면, 아니면 직분제도를 마치 계급이 올라가는 것으로 이해한다거나 새벽기도나 철야기도를 하면 자신의 노력으로 하나님을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건 분명히 예수님이 경계하신 율법적 차원의 신앙생활인 것이다. 바리새적인 가식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그런 경건의 수단 자체가 악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것을 악용하는 것이 문제이지 그것을 잘 사용하면 신앙생활에 큰 도움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수천 년을 거쳐 수많은 기독교인들의 신앙을 지키도록 도움을 준 그런 수단들을 그것을 악용하는 사람들 때문에 악한 것으로 보는 것은 옳지 않은 것이다.

구원파는 (특히 유병언계열은) 기도 자체를 율법적 종교행위로서 부정한다. 기도는 마음에 있는 것을 표현하는 것에 불과하지 하나님이 들으시는 것이 아니고, 또 이미 구원받은 사람은 기도할 필요가 없다고 가르친다. 이에 더 나아가서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기도문도 거부한다. 표면적인 이유는 그것도 율법적 형식이기 때문이라는 것인데 실제 이유는 구원받은 사람은 더 이상 회개하지 않는다는 구원파 교리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매일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신 내용 중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는 구절을 구원파의 교리에 맞지 않는다고 주기도문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다.

이단은 항상 성경의 전체적인 시각 대신에 편향된 시각을 제공한다. 어느 사안을 볼 때 성경 전체의 입장에서 보지 못하고 성경의 한쪽만을 붙잡고 억지로 해석을 한다. 예를 들어, 구원파는 칭의를 위한 회개는 아는데 성화를 위한 회개에 대해 무지하니, 회개는 한번만 하면 되는 것이고 계속 회개기도 하는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라는 엉뚱한 주장을 편다. 또 “구원받은 날짜”를 아는 것도 극적인 회심의 과정을 거친 사람들에게나 해당되는 것을 일괄적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을 하니 이것도 전체 그림을 보지 못하는 상태에서 무식하게 말하는 것이고, 자신들의 교리에 맞지 않는 경건의 모습들을 모두 “율법”이라든지 “종교”라는 이름을 붙여서 치워버리는 것도 기독교 전통을 무시하는 편협하고 교만한 태도인 것이다. 그래서 이단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성경 전체에 대한 교육과 성경 전체를 보는 균형 잡힌 시각이 필요한 것이다.

출처-한인연합감리교회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