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옥 교리에 대한 반박의 필요성
그들이 말하는 소위 "연옥"도 더 이상 우리를 괴롭힐 수가 없다. 이미 그것이 도끼에 찍히고 베어져서 송두리째 넘어졌기 때문이다...만일 그 문제가 심각한 결과들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나도 이런 문제를 무시해 버리는 것이 옳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연옥의 교리는 온갖 모독으로 이루어진 것이고, 또한 날마다 새로운 모독을 더하여 그것으로 지탱되고 있고,...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피 외에 다른 데서 죄사함을 찾고, 보속이 다른 곳으로 전이되고 있는 현실에서 이에 대해 침묵을 지킨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다...연옥이란 사탄의 치명적인 허구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무효화시키는 것이며, 도저히 견딜 수 없을 만큼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욕되게 하는 것이요, 우리의 믿음을 뒤집어엎고 파괴시키는 것이라...
연옥에 대한 소휘 복음서의 증거에 대한 반론
...그들은 말하기를, 주께서는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마 12:32; 막 3:28-29; 눅 12:10)고 말씀하심으로써 특정한 죄에 대해서는 오는 세상에서 사함이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계시다고 한다. 그러나 여기서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이 죄의 책임에 대한 내용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할 사람이 어디 있는가? 만일 그렇다면, 이것이 그들이 말하는 연옥과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그들은 죄의 형벌이 연옥에서 시행된다고 주장하는데, 그렇다면 그 죄의 책임이 이 세상에서 사함 받는다는 사실은 왜 부인하지 않는가?
주님께서는 성령을 거역하는 그 부끄러운 악행에 대하여 용서받을 소망을 완전히 끊어버리고자 하실 때에, 그저 그 죄가 절대로 용서받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시는 것만으로 족하다고 여기지 않으셨다. 오히려 그 점을 한층 더 강조하기 위하여, 주님은 각 사람의 양심이 이 세상의 삶에서 체험하는 심판과 부활 시에 공적으로 이루어질 최후의 심판을 구분하여 말씀하신 것이다. 말하자면, 주님의 말씀의 의도는 이런 뜻이었다:"악의가 있는 고의적인 반역은 지금 당장 파멸을 몰고 오는 것으로 여겨 삼가라. 이 세상에서 죄인들이 죄를 사함 받고 회심에 이르지만, 성령께서 주시는 빛을 고의로 꺼뜨리려 하는 자는 이 세상에서도 사함 받지 못하며, 하나님의 천사들이 양을 염소에게서 분리시켜서 천국에서 그들의 모든 죄를 깨끗이 하게 될 그 마지막 날에도 사함받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라"(참조. 마25:32-33).
다음으로, 그들은 마태복음의 비유를 증거로 제시한다:"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고발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주고 재판관이 옥리에게 내어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네가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마5:25-26). 이 구절에서 만일 재판관이 하나님을 의미하고, 고발하는 자가 마귀를, 옥리가 천사를, 옥은 연옥을 의미한다면, 나도 기꺼이 그들에게 승복하겠다. 그러나 여기서 그리스도께서, 정의와 선에서 우러나오는 행실보다는 율법의 문자적인 요구만을 고집스럽게 따르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 위험과 악을 자초하는지를 보여 주심으로써,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정의와 화평을 추구할 것을 강하게 권면하신다는 것이 누가 보더라도 분명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묻노니, 과연 이 구절들 가운데 어디서 연옥을 찾을 수 있단 말인가?
빌립보서, 계시록, 그리고 마카베오서의 증거들에 대한 반론
그들은 또한, 하늘에 있는 자들이나 땅에 있는 자들이나 땅 아래 있는 자들로 그리스도께 모두 무릎을 꿇고 경배할 것을 선언하는 사도 바울의 진술(빌2:10)에서도 연옥에 대한 증거를 찾으려 한다...."땅 아래 있는 자들"이라는 표현이 영원히 버림 받은 상태에 매여 있는 자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가 없고, 따라서 이 자들은 연옥에서 고난 받는 영혼들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당연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그러나 바울은 여기서 그저 통치권이 그리스도께 주어져서 모든 피조물들이 전부 거기에 굴복하리라는 것을 가르치는 것일 뿐이다..."땅 아래 있는 자들"이라는 표현을 마귀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하지 못할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마귀 역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불려와서 그들의 심판주를 두렵고 떨림으로 인정하게 될 것이 분명하지 않은가(참초. 약 2:19; 고후 7:15)?
그러나 계시록에서 말씀하는 다음의 내용은 그런 식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피조물이 이르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하니"(계 5:13)....여기서 말하는 피조물들이란 이성이 없고 생명이 없는 것들을 뜻한다는 것이 너무도 분명하지 않은가? 여기의 이 말씀의 의도는 다만 세상의 개별적인 부분부분들이 전부, 하늘 꼭대기에서부터 심지어 땅의 중심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제각기 나름대로 자기들을 지으신 창조주의 영광을 선포한다는 사실을 선언하는 것일 뿐이다(참조. 시 19:1).
그들은 또한 마카베오 가문의 역사에서도 증거를 제시하는데(마카베오하 12:43), 이에 대해서는 응답할 가치가 없다고 본다. 내가 마카베오서를 성경의 정경에 포함히시키는 것 같은 인상을 주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제롬은 서슴지 않고 그 책의 권위는 교리를 증명하는 데는 가치가 없다고 가르치고 있다. 키프리아누스의 저작이라고 알려져 있는 [사도신경해설]이라는 책에서도, 마카베오서가 고대 교회에서 전혀 인정되지 않았다는 것이 확실히 드러난다.
고린도전서 3장의 증거에 대한 반론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고전 3:12-13, 15).
여기서 말하는 불이 죄의 더러운 것을 깨끗이 씻어내서 순결한 사람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해 주는 연옥의 불이 아니면 무엇이겠냐고 그들은 묻는다. 그러나 대다수의 고대의 저자들은 이 불을 달리, 즉 환난 혹은 십자가로 이해하였다. 주께서 그의 백성으로 하여금 육체의 더러운 것에 끌려다니지 않도록 그것으로 시험하신다는 의미로 이해한 것이다. 이런 해석이 가공으로 꾸며낸 연옥을 상정하는 것보다 후러씬 더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나는 이 사람들의 해석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보다 더 확실하고 분명한 본문의 의미를 내가 깨닫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들이 과연 모든 사도들과 성도들이 이 연옥의 불을 통과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하는 것이다. 그들은 아니라고 말할 것이다. 왜냐하면 교회의 모든 지체들에게 다 돌아가고도 남을 만큼 공적이 크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깨끗이 씻음을 받아야 한다면 그것은 정말 모순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렇다고 선언한다. 어느 특정한 사람들의 공적을 밝히겠다고 하지 않고 모든 사람들의 공적을 밝히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는 것이다. 이것은 나의 논지가 아니라 아우구스티누스의 논지다.
그런데 더욱더 모순된 것은, 사도 바울이 그들이 자기들의 공적 때문에 불을 통과해야 하리라고 말하지 않고, 그들이 지극히 신실하게 교회를 세우는 일에 수고했다면 그들의 공적을 불로 시험한 연후에 그들에게 상급이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는 사실이다.
...금이나 은을 불에 가까이 댈수록, 그 순전함과 순수함을 보여 주는 이런저런 증거들이 더욱 확실히 드러나느 것처럼, 주님의 진리 역시 영적으로 살펴서 조심스럽게 시험하면 할수록 그 권위가 더욱 완전하게 확증되는 것이다.
그러나 "나무나 풀이나 짚"을 불에 대면, 곧바로 타서 소멸해 버리는 것처럼, 주의 말씀에 근거를 두지 않은 사람들이 만들어낸 가르침들은 성령께서 행하는 시험을 견딜 수가 없고 즉시 넘어지고 무너지고 마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령께서 바로 그들을 시험하는 불이며, 그 불의 시험을 바울은 "그날"이라고 부르는데, 이날은 곧, 성경의 일반적인 용례로 볼 때에 "주의 날"을 의미하는 것이다.
...자, 이제 우리는 바울이 말씀하는 "불"이 다름 아닌 성령의 시험을 의미한다는 것을 입증한 셈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의 정금 같은 순결함을 이런 연옥의 더러운 것으로 더럽히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의 공적을 잃는 고통을 당하게 되는 거이다.
교부들의 증거에 대한 반론
그러나 그들은 말하기를, 이는 교회가 가장 오래 전부터 지켜내려온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반론에 대해서는 바울 자신이 답변을 해 주고 있다. 그는 교회를 세우는 데에 그 기초 위에 적절치 못한 재료를 사용하여 교회를 세우는 자들은 모두 그 공적을 잃어버릴 것이라고 선언하여, 자기 자신의 시대까지도 그 선언에 해당되는 것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고전 :11-15),
그러므로, 나의 대적들이 죽은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일이 지나간 천삼백여 년 동안 관습적으로 시행되어왔다고 반론을 제기하지만, 가는 그들에게 다시 묻고 싶다:"하나님의 어떤 말씀을 근거로, 어떤 계시와 어떤 선례를 따라서 그 일을 행해왔는가?" 성경에도 이에 대한 증거들이 없을 뿐 아니라, 성경에 나타나는 성도들의 모든 실례들을 읽어보아도 그런 일을 보여 주는 대목은 없다. 죽은 자를 장사지내는 절차에 대해서 성경에서 구체적인 기사들이 많이 나타나지만, 그런 기도에 대해서는 단 한 가지의 예도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문제일수록 더 분명하게 언급되어 있어야 마땅한 것이 아니겠는가? 뿐만 아니라, 죽은 자들을 위해서 행하는 기도에 대해 언급한 고대의 저자들의 경우도 이 점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명령도 합당한 전례도 없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었다.
...사도 바울이 가르치듯이(롬 14:23) 신자는 모름지기 양심의 확신이 없이는 아무 일도 해서는 안 되는 것인데, 특별히 기도의 문제에 있어서는 그런 확신이 더더욱 필요한 것이다...
...이교도들 사이에서는 시대마다 항상 죽은 자들을 위하여 예식을 거행하고, 해마다 죽은 자들의 영혼들을 깨끗이 씻는 예식들을 행하여 오고 있다는 것은 우리도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도 그 이교도들보다 못하게 보이지 않기 위하여, 죽은 자들이 마치 완전히 사라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들을 위해서 아무런 예식도 행하지 않는다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게 된 것이다. 그들의 오도된 열심이 바로 여기에서 생겨난 것이다...
...최소한의 지혜와 분별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문제에 대한 고대의 저자들의 기록들은 대중적인 관슴과 일반 사람들의 무지한 상태를 감안하여 씌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아우구스티수느는...[죽은 자를 보살피는 일]이라는 책에서는, 죽은 자들을 위해 간구하기를 원하는 자들의 어리석은 열심의 열기를 꺼뜨려 버릴 만큼 그 문제에 대해서 냉담하게 다루며 온갖 의문을 표현하고 있다. 죽은 자들을 위한 기도 행위에 대해 이 책이 보여 주는 유일한 지지는, 그런 관습이 널리 행해지고 있으니 그것을 멸시해서는 안 될 것이라는 것 뿐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그 이상의 것을 시도한다면 그것이야말로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를 욕되게 하는 것이다...
...고대 교회의 사람들은 성찬에서 죽은 자들을 위해 하나님께 비는 경우가 아주 드물고, 또 있다 해도 그저 마지 못해서 그렇게 했을 뿐이다...
...고대의 저자들이...죽은 자들을 위한 기도의 행위들을 분명하게 뒤집고 있다는 몇 가지 증거들...아우구스티누스의 진술...육체의 부활과 영원한 영광을 모든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으나, 안식을 누리기에 합당한 사람은 누구든지 죽을 때 죽은 다음에 오는 안식을 누리는 것이며, 따라서 모든 경건한 사람들은 선지자나 사도나 순교자들에 못지않게 죽음을 맞는 즉시 복된 안식을 누리게 된다고 가르치는 것이다. 그들의 처지가 그러하다면 과연 우리의 기도들이 그들에게 무엇을 줄 수 있겠는가?
그들은 유치한 미신들로 단순한 사람들을 미혹시켜왔는데, 이에 대해서는 그냥 지나치기로 한다. 그 수가 무수히 많으나 대부분 너무나 어처구니없는것들이어서 도저히 예의를 갖추어 대할 수 없을 정도다. 또한 세상의 크나큰 무지를 이용해서 그들이 욕심에 사로잡혀서 행해온 그 비열한 장사꾼의 행위들에 대해서도 여기서는 다루지 않겠다. 도저히 끝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것들을 구태여 일일이 열거하지 않아도, 경건한 독자라면 충분히 그들의 양심을 바로 세울 수 있을 것이다.
[출처:저작 존 칼빈 / 번역 원광연 / 출판 크리스천다이제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