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매춘
매춘(prostitution)의 정의를 살펴보면, 다음백과에서도 대략적 설명을 찾을 수 있습니다. 매춘(賣春)의 춘(春)은 원래 당나라에서 술을 나타내는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매춘'이라고 하면 술을 파는 의미였습니다. 대체로 '매춘'은 돈을 받고 남에게 성(性)을 파는 일을 가리키는데, 거의 모든 도시에서 성행하고 있었고 사실상 통제가 불가능했으며, 공공연히 번창을 거듭하는 중입니다.
그러나 '매춘'이라는 용어는 성을 파는 행위와 비난만을 함축함으로써, 여성에게만 엄격한 윤리를 적용합니다. 따라서 성을 사고파는 양자 모두의 행위와 책임을 포함하는 '매매춘' 개념 사용이 더 적절합니다. 예로부터 매춘부들은 냉대와 욕설의 대상이 되었으며, 돌던지기·매질·낙인찍기·감금·사형 등의 처벌을 받았습니다. 반면 매춘부들의 고객은 처벌받지 않았으며, 실제로 대부분의 사회에서 매춘부를 찾아가는 것은 사회의 공분(公憤)을 불러일으키면서도 한편으로는 남성다움의 표시로 여겨졌습니다.
어떤 사회에서는 사춘기 의식이나 지참금을 버는 수단으로 젊은 여자들에게 매춘을 요구했으며, 일부 종교에서는 특정 부류의 여사제에게 매춘을 요구했습니다.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에는 매춘부들에게 눈에 띄는 옷을 입게 하고 무거운 세금을 내도록 했고, 히브리법은 매춘을 금하지는 않았지만 외국 여자들에게만 매춘을 허용했습니다.
20세기 중반까지 매춘은 스스로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여자들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직업이었고, 대부분의 매춘부들은 가난하고 미혼이며 또 이렇다할 기술도 없는 사람들로서, 이와 연결된 범죄세계로 끌려 들어갑니다. 이들은 대개 매춘 알선업자와 연결되어, 제공된 공간에서 손님과 신변보호를 받는 조건으로 매춘의 몫을 나눕니다.
2. Entertainer & sportainer
오늘날 스포츠 스타들까지 스스로 '공인'으로 자처하지만, 그런 시각에 동의할 수는 없습니다. 연예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졌다는 점에서 공인의 성격을 가지지만, 그들이 공적 지위에서 공적 권력을 누리며 공적인 일을 하는 사람들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연예인이든 스포츠 스타든, 보통 사람들처럼 사적 이익을 추구한다는 점에서는 '공인'으로 칭해지는 것이 불편합니다. 다만 그 과정에서 널리 사람들의 관심을 받으므로 '특별한 개인'으로 불리는 것이 더 적절해 보입니다.
연예인과 스포츠 스타들이 대중들의 관심을 받는 '특별한 개인'이 된 이유로는 미디어의 역할이 컸습니다. 흔히 '연예인'을 가리켜 Entertainer라 부르는데, 'Entertain'은 '남 또는 자신을 즐겁게 하다'에서 비롯된 용어로 '즐겁게 하는 사람'이라는 의미가 강합니다. 언론매체의 수가 급격히 늘면서, 어떤 식으로든 콘텐츠를 만들어야 하는 언론의 입장에서는 이들의 일거수 일투족이 취재의 대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야말로 엔터테이너(Entertainer)와 스포테이너(sportainer)의 시대입니다.
스포츠와 엔터테인의 합성어인 스포테이너(sportainer)와 마찬가지로, 또 하나의 신조어를 예상합니다. Church와 Entertain을 합성한 것으로, 개그와 같은 입담과 설득력 넘치는 언변으로 회중을 즐겁게 하는 목사들을 가리키는 '처치테이너(churchtainer)'입니다. 배고팠던 암울한 시대, 축복의 약속과 희망의 미래를 남발하여 거대한 건물을 세우고 채웠던 이들을 흠모하여, 동일한 퍼포먼스(performance)로 교회의 덩치를 키우려는 분들쯤 되겠습니다.
3. 처치테이너(churchtainer)
그런데 먹고 살 일이 막막하여 거리로 내몰렸던 여인들이 제 몸 파는 것을 두고 매춘이니 어쩌니 하는 말로 비난의 화살을 겨누는 현실을 보면, 과부들을 강탈하는 제사장들 무리를 비난하고, 여인들이 경제적 궁핍으로 말미암아 매춘을 해야 하는 현실을 한탄하던 쿰란 동굴의 글이 떠오릅니다(4Q270 5, 19).
제 몸 파는 것이 매춘이라면, 현대적 의미의 매춘은 좀 더 복잡해집니다. 더 많은 돈을 벌어들이기 위해서라면 내용을 불문하고라도 광고 한 편 더 찍으려는 엔터테이너들과 스포테이너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노동으로 보아야 할까요? 부가가치에 따른 수익으로 여겨야 할까요?
이 분들이 대부업체의 대출이 보다 용이하고 편리하다는 호객 행위에서부터 가짜상품의 거짓 광고에까지 모델을 자처합니다. 그런 방식을 두고 자신의 용모를 앞세워 경제적 궁핍을 채웠던 여인들의 그것과 비교하여, 더 건전하고 더 정당한 경제활동이라 권하진 못하겠습니다.
그런 방식이 허용되고 용인되는 사회라 해서, 매춘은 악하지만 이것은 권장할 만하다고 저는 말하지 못하겠습니다. 그네들이 오늘밤도 브라운관에 등장합니다. 허풍으로 치장하고 요란하게 꾸민 몸과 입담으로 웃음을 팝니다. 계산된 시나리오 속에서 자신의 상품가치를 높이며 스스로를 '공인'이라 여깁니다. 헛웃음이 씁쓸합니다.
그래도 이 정도는 자본주의 시대의 보편적 현상으로 치부할 만합니다. 라디오와 TV 속에는 지역마다 잠복해있는 일부 처치테이너(churchtainer)들이 신의 이름을 들먹이며 자기 장사에 열중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교회마다 담임목사의 이름을 걸고 경쟁합니다. "우리교회로 오세요", "우리목사님 말씀 좋아요", 이쯤 되면 하나님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전하는 것이고, 목사를 알리는 것과 같습니다. 전도(傳道)가 아니라 전회(傳會)입니다.
4. 성전을 보시고 우신 예수
예수님은 왜 예루살렘 성전을 보시고 우셨을까요? 유일한 성전, 예루살렘을 향해 왜 예수님은 '강도의 소굴'이라는 비난을 서슴치 않았을까요? 예수께서는 왜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진다 하셨을까요?
성전의 영적 매춘 행위 때문입니다. 자신들만 모르고 있을 뿐입니다. 교회 건축과 교회 재정을 위해 가난한 이들의 재산을 강탈하며, 축복을 빙자하여 세상이 아닌 교회로의 헌신을 선동하는 행위, 자기 교회당을 채우기 위해 전도를 앞세우는 호객행위야말로 사특한 매춘입니다.
한국인을 가리켜 돈에 환장한 국민이라 합니다. 아무리 천민자본주의적 사회라지만, 유독 돈을 밝히는 것을 비웃는 표현입니다. 공부를 아무리 잘 하고, 돈 많이 버는 직종을 꿰차고, 그렇게 재산 좀 모았다고 이런 추태를 용납할 수는 없겠습니다.
교회는 차라리 자신이 죽는 길을 택한 사람들로 이루어진 공동체입니다. 십자가의 길은 효과적이기 때문에 걷는 길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 길을 걷는 이유는, 단순합니다. 그 길이 참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세상이 하지 않는, 세상이 따라할 수 없는 것을 알리는 곳이어야 합니다. 교회는 눈을 들어 하나님이 바라보시는 곳으로 용감한 걸음을 내딛는 곳입니다. 교회 안에서 자기희생과 손해를 감수하는 이들을 만나야 합니다. 신앙과 양심을 지키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가슴 벅찬 시간이 주일입니다. 주일이야말로 진리를 찾는 구도자들과의 만남의 날이며, 하나님과의 사귐으로 재충전되는 소중한 시간입니다.
예수님은 어둠을 밝히고 불의를 깨치시고, 상대를 찌르며 서로를 해하는 우리를 대신해 찔리려 오셨습니다. 영광을 버린 예수님은 우리로 영광스럽게 사는 길을 여셨습니다. 문명이 발전할수록 갈릴리 광야에서 울려 퍼지던 복음은 약화되었고, 하나님을 외면하고, 말씀은 감추고 왜곡되고 악용되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도 사람들은 우리를 통해 예수님을 찾습니다.
이성호 목사
크리스찬북뉴스 편집위원, 포항을사랑하는교회 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