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이 말하는 신비
기독교는 초월의 종교이다. 세상(내재)를 사는 인간에게 초월은 신비한 것이다. 성경에 신비라는 단어는 주로 "뮈스테리온"(비밀, "musterion")으로 표현된다. 신약 공인 본문(Received Text)에 27회 나오는 이 단어는 주로 바울서신(20회)에서 인간을 향한 창조주 하나님의 구속사역의 계획과 측면들을 언급하는 데 사용된다. 즉 성경에서 "신비"란 곧 그리스도 계시와 관련된 비밀이다. 창조주 하나님의 모든 초월적 신비는 그 양상이 어떻게 전개되든 그리스도의 사역과 구원사와 연관된다. 칠십인역(Septuagint)에서 "뮈스테리온"이 하나님의 감추어진 뜻(시 24:14)이나 숨겨져 있는 (군사적) 전략(외경 유딧서 2:2)으로 나타나는 것도,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를 향한 계시의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는 것들이다. 그렇게 볼 때 기독교의 신비란 그리스도의 사역과 구원의 비밀과 관련된 신비가 성경적 신비의 영역이라 할 것이요, 이를 벗어난 신비는 유사 신비에 속하는 악마적 영성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성경 밖 신비주의
성경 밖에도 엄연히 신비주의가 있다. 다만 그 체험은 당연히 기독교와 그 차원이 다르다. 기독교의 신비가 주로 그리스도와 관련된 비밀을 말하는 데 반해 영어의 "미스티시즘"(mysticism) 등 신비주의라고 번역되는 서구 근대어는 어원적으로는 (눈 또는 입을) 닫는다는 의미의 그리스어 "myein"에서 유래한다. 따라서 신비주의는 물질적인 세계로 초월한 통상의 표현이 허용되지 않는 영의 세계를 중심한 철학, 교리, 가르침이나 신념이나 경험을 시사하는 것으로 신, 최고 실재, 우주의 궁극적 근거 등으로 생각되는 "절대자"를 인간이 자기의 내면에서 하나님 임재의 직접적이며 친숙한 의식을 통해 체험하려는 입장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절대자는 물론 기독교의 창조주 하나님과는 조금 다른 개념이다. 성경의 창조주 하나님이 초월자인 동시에 내재의 세상에도 관심을 가진 인격적 존재로서 인간과 끝없이 다양한 방식으로 소통하면서 일관된 창조-타락-구속의 계시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지향하는 반면, 일반 종교로서의 절대자는 자신의 인격과 세상을 향한 절대자로서의 일관된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신비적 합일을 추구하는 인간
인격성을 보이기도 하고 인격성을 숨기기도 하는 "절대자" 앞에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든 신비 체험을 경험하려고 몰입하는 경향이 있다. 사람들은 그것을 신비적 합일(uniomystica)이라는 방식의 합일 체험이라고 한다. 이것은 인간을 초월한 절대자와의 합일, 통상의 자기와는 절대적으로 다른 것과의 합일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자기에서의 탈각(脫却), 자기라는 틀의 돌파를 통해서만 현성(現成)하려고 한다. 그런데 이들 합일은 기독교적 신비와 조금 다른 측면이 있다. 즉 기독교의 신비가 인격적 존재인 인간이 인격적 그리스도와 관련된 체험을 말하는 반면, 이들 합일은 탈자(脫自)의 형태로 엑스터시(탈아, 망아)를 통해 개인적 체험된다. 이 "절대자"라는 것이 세계와의 합일이면 범신론의 형태가 되고, 만물의 신비 속에서 체험되면 만유내재신론의 형태가 되기도 하고 애니미즘이나 미신이나 유사종교의 형태 속에서 체험되기도 한다. 이 같은 신비주의는 기독교의 그리스도 계시로서의 신비가 아닌 말 그대로 주관적·개인적 신비 체험을 이루게 된다. 즉 기독교의 신비주의가 전지전능한 창조주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 말씀에 기초한 반면, 세속 신비주의는 주관적 체험이 주를 이룬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결국 성경 외의 또 다른 특별계시를 믿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따라서 기독교적 신비 체험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성경의 테두리를 벗어난다면 기독교를 이탈한 주관적 체험이라고 평가해야 하는 것이다.
기독교 신비 체험을 분별하는 도구들
기독교 신비주의 역사 속에서 교회는 신비 체험에 대해 그 진위와 건전성을 분별할 수 있는 몇 가지 도구를 도출해 내었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 성경론(성경의 틀을 벗어나지 않는 경험이어야 한다). 신비 체험이 성경의 하나님, 성경적 창조, 타락, 구속과 하나님나라에 대한 근본적 틀을 허무는 작은 여우(아 2:15)가 되지 말아야 한다. 성경을 이탈하는 신비 체험을 통해 개인의 주관적 체험이 자신과 이웃의 신앙의 근간을 허무는 일이 없어야 한다. 수많은 이단과 개인이 성경을 벗어난 체험을 가지고 성경을 가감하면서 바른 신앙에서 이탈하였다.
둘째, 기독론(성경적 기독론을 훼손하는 체험은 위험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사역에 대한 복음적 기독교 교리에 탈선을 일으키는 신비적 체험은 조심해야 한다. 근본적으로 기독론에 대한 도전은 성경에 대한 훼손이요 믿음의 반역이다.
셋째, 교회사와 교리사(기독교 역사 속에서 수용 가능했던 신비 현상이나 체험인가). 기독교는 역사적 종교이다. 역사는 제멋대로 전개되는 우연의 산물이 아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역사의 주관자이시며 섭리자이시며 심판자이시며 구속주가 되신다. 교회와 기독교 역사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많은 신비적 현상과 개인적 체험들에 대해 그 진위를 평가하여 왔다. 개인의 신비 체험이 이 역사적 평가의 기준들을 넘어가게 될 때,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불순한 체험일 개연성이 있는 것이다. 한국교회의 소위 "금가루 신비 현상"에 대해 서철원 박사가 기독교 역사상 그런 신앙적 체험은 없었다고 단언한 것을 주목하라.
넷째, 계시론(성경의 틀을 벗어난 첨삭된 특별계시적 체험이 있는가). 인류를 믿음으로 인도하고 구원에 이르는 근본적 계시(특별계시)는 성경 속에서 이미 모두 완성된 것이다. 신비 체험이 이 영역을 넘어 새로운 특별계시를 들고 나온다면 그것은 성령의 인도하심이 아닌 것이다. 새로운 구주, 새로운 성경(몰몬경, 통일교 교리 등)의 첨삭은 결단코 성령의 역사가 아니다.
다섯째, 새로운 교리와 신학(교리적 논쟁과 혼동을 일으킬 수 있는 <낯선 단어>를 분별없이 사용하고 있지는 않은가?). 성경은 은사를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들뜬 흥분 같은 은사가 다가 아니다. 은사는 반드시 성경과 그 열매로 판단받아야 한다. 신비 체험이 새로운 낯선 단어들을 창출해내는 것은 단순한 사건이 아니다. 교회는 성경과 더불어 역사 속에서 새로운 신학적 용어에 대해 치열한 논쟁과 토의를 거쳐 성령의 인도하심 속에 바른 교리를 구성하여 왔다. 비록 과학과 기술의 발달 속에서 다양한 단어들이 탄생하였더라도 이것들을 새로운 신학적·교리적 용어로 활용하는 것은 극히 조심해야 한다. 마리아 염색체와 DNA, 예수의 염색체 숫자, 마리아의 월경, 하늘 언어, 신사도, 빈야드 운동, 구도자 위주의 열린예배(열린교회가 아님), 제2선민론, 제2히브리민족, 부활 복음, 금가루 현상 등과 같은 성경적으로 낯선 단어들이 신비주의와 결합할 때, 그것은 성령의 역사가 아닌 불순한 폭발력을 가지게 될 수도 있다. 따라서 신학 전개에 있어 낯선 용어의 사용은 성령의 사람들 가운데 치열한 신학적 논증 속에서 달궈져서 그 진위를 평가받은 다음 정금 같이 나와야 하는 것이다.
분화되고 있는 신비주의
현대 신비 체험 운동은 세대주의 종말론뿐 아니라 다양한 방식으로 분화되고 있다. 뉴에이지, 관상기도, 빈야드, 토론토 축복, 하늘의 언어 방언 운동, 예언 사역, 신사도, 종교 현상이 초월의 존재가 아닌 UFO 및 외계인과의 조우(遭遇)에서 비롯되었다고 보는 현대적 종교운동 등 새로운 유사기독교운동들이 미숙한 성경 해석, 신학의 부재와 교리에 대한 무시 속에 성경 이탈, 새로운 특별계시와 접목될 때, 주관적·개인적 체험이 초월을 넘나드는 신성모독의 위험한 상황을 초래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성경적 신비주의와 구별되는 최근의 신비주의
최근의 대부분의 신비주의적 경향들은 성경적 신비주의와 분명 뚜렷이 구분되는 점이 있다. 역사적 기독교 신비주의자들이 인간의 더러운 죄성과 정면으로 대면하여 하나님 앞에 철저하고 처절한 개인적 참회와 성결과 거룩성 회복의 모습으로 변화된 반면, 오늘날 신비주의 운동은 대단히 기복적일 뿐 아니라 타인을 향한 상대적 영적 우월감(일종의 영적 선민의식)을 조장하는 경향이 뚜렷한 점은 대단히 우려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예레미야나 요나나 아모스나 나훔과 같은 성경의 선지자들이 참된 회개와 징계의 경고를 발한 초월(신비) 체험자인 것과 달리, 마치 특별 취급받는 무슨 선민이 된 듯한 착각 속으로 대중을 몰고 가는 최근의 신비주의 운동은 성경적 신비주의와 유사하기는커녕 오히려 극렬히 대비가 된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그리스도인들은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안 된다. 한쪽이 성령의 초월적 체험이었다면 한쪽은 분명 아니다. 신비 체험을 통해 '신령한 선민'이 되지 않아도 된다. "진정한 선민"은 신화와 신비에 매달려 복을 누리고 즐기려는 "영적 선민 히브리족"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의 위엄과 십자가의 영광을 알고 십자가 지신 승리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그분과 함께 그렇게, 성문 밖 고난받은 예수처럼 능욕을 지고 나아가는 것이다(히 13: 12-13).
조덕영 박사는
환경화학공학과 조직신학을 전공한 공학도이자 신학자다. 한국창조과학회 대표간사 겸 창조지 편집인으로 활동했고 지금은 여러 신학교에서 창조론을 강의하고 있는 창조론 전문가이기도 하다. 그가 소장으로 있는 '창조신학연구소'(www.kictnet.net)는 창조론과 관련된 방대한 자료들로 구성돼 목회자 및 학자들에게 지식의 보고 역할을 하고 있다. 이 글 역시 저자의 허락을 받아 연구소 홈페이지에서 퍼온 것이다. '기독교와 과학' 등 20여 권의 역저서가 있으며, 다방면의 창조론 이슈들을 다루는 '창조론 오픈포럼'을 주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