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크리소스톰

▲존 크리소스톰.
(Photo : ) ▲존 크리소스톰.

존 크리소스톰(349-407)은 가장 위대한 헬라 교부들 중의 한 사람으로서, "황금의 입"으로 불릴 만큼 탁월한 설교가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유대인에게 가장 심각한 적대감을 가졌던 교부였다. 그는 로마제국에서 가장 번
성한 도시 중 하나였으며 예수님의 제자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렸던 안디옥에서 목회했다(행 11:26). 당시는 여전히 기독교의 이상적인 권위가 확립되지 않은 상태였다. 기독교는 여전히 헬레니즘과 아리아니즘(Arianism), 그리고 유대교의 위협을 받고 있었다. 기독교의 제의가 제대로 확립되지 않은 상황에서 기독교인들은 유대교의 제의와 관습을 좇는 유혹을 받고 있었다. 그래서 크리소스톰은 그의 교구 사람들이 샤밧을 지키는 것을 불쾌하게 생각하고, 또 랍비의 설교를 듣는다든지 랍비들에게 작물을 축복해 달라고 한다든지 병들었을 때 유대인 의사들에게 찾아가는 것을 아주 불쾌하게 생각했다.

유대인은 "마귀와 춤추는 자"

크리소스톰은 크리스천으로서 유대교의 관습을 좇는 자들을 "병든 자요 미친 자"라고 비난하면서 "하나님에 대해서 분노를 일으키는 자들과 교제하는 자들"이라는 딱지를 붙였다. 그는 크리스천들이 유대인과 가까이 지내거나 그들에 대해 인도주의적인 감정을 갖지 못하게 했다. 유대인들은 인류의 정상적인 일원이 아니라 "마귀와 춤추는 자들"이며 "선천적으로 악한 자들"이라고 비난했다. 그들은 예수가 이 땅에 오기 전에도 또 온 이후에도 악했고, 그들의 악함이 계속되고 있다고 했다. 그는 유대인들은 신(그리스도)을 죽인 자들로서, 이는 범죄 중의 범죄라고 했다. 그들은 탐욕주의자들이고 마음이 무딘 자들이며 세속적이고 육적인 자들로서 "이 세상의 일에 빠진 자들"이라고 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기독교의 진리에 영적으로 눈먼 자들이며, 약탈하는 자들, 탐욕하는 자들, 가난한 자들을 저버린 자들, 도둑들, 무역에서 속이는 자들이라고 비난했다. 돈을 위해서 어떤 것이라도 할 자들이며, 심지어 하나님을 죽인 자들이라고 했다.

 

반유대주의로 인한 방화로 불타는 회당 사진
▲반유대주의로 인한 방화로 불타는 회당 사진.

 

 

"하나님이 회당을 버리셨다"

크리소스톰은 "하나님이 회당을 버리셨다"고 주장했다. 하나님께서 버리신 회당은 사창가나 절벽보다도 더 악한 것이며, 도둑의 소굴보다 더 위험하고, "더러운 야수들의 모임"이라고 했다. 회당은 거룩한 장소이지만 하나님이 버리신 회당은 사악하다는 것이다. 그는 크리스천들이 유대인들이 예배하는 장소를 지나쳐야 한다고 했다. "강도의 소굴이요 마귀의 집"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회당에 관한 그의 설교를 들어 보자:

"...그리스도를 죽인 자들이 모인 회당에 십자가는 치워져 버렸고 하나님께서 모욕을 당하고 계신다. 여기서 아버지는 무시를, 아들은 모욕을 당하고 있다. 그리고 여기서 성령의 은혜가 거부되고 있다. 유대인들 자신이 마귀이기 때문에, 이방신들에서보다 더욱 큰 해가 나오는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가 이런 회당들을 부르기에 더욱 적합한 이름을 어떻게 찾을 수 있겠는가. 성전이 이미 강도의 소굴이 되었다... 이제 너희가 사창가나 죄의 요새, 마귀가 머무는 곳, 또 마귀의 성, 영혼의 파괴 장소라고 부르고 것보다 그것을 더 잘 묘사할 수 있는 이름을 붙일 수 있다면 붙여 보라..."

"유대인들은 도살되기에 적합하게 자랐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을 배반한 자들이 마땅히 받을 고통의 예(example)로, 유대인들을 살려 두고 그들이 영원히 방랑하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크리소스톰은 어거스틴과는 달리 유대인들에게는 어떤 사용 가치도 없다고 했다. 쟁기를 끌기를 거부하는 동물을 죽여야 하듯이, 유대인들은 도살되기에 적합하게 자랐다고 하였다. 그는 누가복음 19장 므나의 비유에 나오는 "저 원수들을 이리로 끌어다가 내 앞에서 죽이라"는 말씀을 그리스도가 유대인들을 죽이라고 명령한 걸로 해석했다. 그는 이러한 성경 해석에 근거하여 유대인 학살을 정당화하면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행하는 것은 비록 나쁜 것처럼 보일지라도 모든 것 중 최상'이라고 주장했다.

크리소스톰은 누구보다도 후대에 굉장히 영향을 많이 끼친 설교가였고, 따라서 히틀러는 그의 반유대적인 사상을 높게 평가하였다. 히틀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유대인은 일을 다른 사람을 이용하는 수단으로 생각한다" "유대인들은 주인이 되고자 하는 큰 목적 없이는, 결코 생산적인 창조자로서 일하지 않는다. 유대인은 비생산적으로 다른 사람의 일을 이용하고 즐기며 일한다."

크리소스톰: 비잔틴제국(동로마제국)과 정교회의 반유대주의에 대한 신학적 스승

 

▲정연호 박사(홀리랜드대학 구약학 및 유대학 교수)
(Photo : ) ▲정연호 박사(홀리랜드대학 구약학 및 유대학 교수)

크리소스톰의 반유대적 입장은 비잔틴시대 황제들의 반유대적 행동에 영향을 미쳤다. 그의 반유대적인 설교는 러시아어로 번역되었고, 그래서 1100년 러시아에서 첫 번째 유대인 대학살이 일어났을 때에 영향을 미치게 됐다. 8세기부터 시작해서 기독교학교와 신학교에서 크리소스톰의 반유대 설교를 가르쳤다.

유대교의 종교적·경제적·법적, 그리고 정치적인 권리들은 결국에 기독교 신학에 의존하게 되었다. 황제의 법은 유대인들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결정하는 테오도시안법으로 구체화되었다. 황제들은 법을 제정했고, 교회는 황제들을 조종했다. 승리의 신학은 교회의 유대인 정책을 결정했다. 교회와 기독교 황제들은 유대교를 하나의 범죄집단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회당을 법적으로 파괴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았고, 중세에 종교재판을 강요했으며, 탈무드를 불태우도록 했고, 유대인에 대한 대량 학살을 가능하도록 했다.

유사한 불의와 핍박이 비잔틴제국에서 일어났는데, 330년부터 콘스탄틴제국이 1453년 터키에서 의해 멸망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비잔틴제국에 살던 수백만의 유대인들이 기독교 사상가들과 국가와 사회에 의해 핍박을 받고 죽어갔다. 600만이었던 1세기의 유대인 인구는 12세기에는 10만 명으로 떨어졌다. 동유럽의 신학자들은 서방의 신학자들에 의해 시작된 반유대신학을 반복했다. 그리고 동로마제국, 즉 비잔틴제국은 서로마제국에서 행한 것과 같은 방식으로 유대인들에게 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