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수희 상담사
한수희 상담사

한동안 어디를 가나 알파고에 대한 이야기가 화두가 되었다. 세계 최고의 실력자를 뛰어넘는 인공지능 로봇의 활약을 보면서 앞으로 인간이 감당할 역할이 어디까지 침범 당하게 될 지 한편 두려움과 씁쓸함을 모두 느꼈던 듯 하다. 그런가 하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각본상을 수상한 바 있는 영화 “Her”는 과학기술의 발달과 함께 개인화된 미래의 도시에서 인격형 인공지능 체계와 사랑에 빠진 남자의 이야기를 그려서 사회적 반향을 일으키기도 했다.

세태가 이러하다면, 앞으로는 ‘경청 전문 로봇’의 등장도 예견해 볼 만할 일일까?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 단언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어쩌면 소문 날 염려 없고, 판단하지 않고 들어주며, 적당한 추임새까지 넣어주는 새로운 로봇에 사람들은 열광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단언컨대, 사람이 하는 진정한 의미의 경청을 로봇이 절대 대신 할 수는 없다. 왜냐면 사람 안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심겨져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품은 좋은 뜻이 바람직하지 않은 전달 방식을 통해 상대방에게 잘 전달되기를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경청의 기술을 알 필요가 있다.

경청을 할 때는 먼저 눈 맞춤을 해야 한다. 이것은 ‘나의 관심이 지금 내 앞에 있는 당신에게 있다’는 표현이다. ‘난 당신의 세밀한 표정과 몸짓에서 당신의 좌절과 당혹스러움과 억울함을 볼 수 있다’는 표현이며, ‘당신의 반짝이는 눈에서 당신이 갖는 자랑스러움과 기대와 벅차 오름을 본다’는 이야기다.

고개를 끄덕여 주며 추임새를 넣어주는 것 또한 경청에 필요한 기술이다. “그렇군요. 당신은 그렇게 느끼고 생각하는군요.”라는 마음을 전달하는 수단이다. 나와는 다를 수 있으나, 당신이 느끼는 것들을 인정한다는 표현이다. 내 생각을 일단 멈추고 상대의 생각을 그저 듣는 시간이다.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지 않은 숱한 기도들과 하소연을 그저 묵묵히 들어 주셨던 주님처럼 말이다.

백트랙킹의 기법(backtracking)도 사용한다. 백트랙킹이란 상대방이 강조한 동사나 명사를 따라 말하며 반응하는 대화법이다. 상대가 한 말을 다시 간략하게 정리해서 반복해 주는 작업이 비효율적으로 느껴질 지 모르나, 역설적으로 그 속에서 대화의 깊이와 효율이 높아지게 된다. 자신이 한 말을 다시 옮겼을 뿐 인데 그에 따른 상대의 반응은 자기의 말을 부인하기도 하고 수정하기도 하고 때론 공감 받는 것에 위로 받기도 한다.

경청의 또 다른 기술은 미러링(mirroring), 즉 타인의 거울이 되어주는 것이다. 백트래킹이 상대방의 말을 따라 하는 것이라면, 미러링은 타인의 행동을 조심스럽게 따라 해 주는 기술이다. 예를 들면 상대방이 물 잔을 들 때 함께 들어 준다거나, 상대방이 턱을 괼 때 따라서 턱을 괴고 들어주는 행동들을 말한다. 한 실험에 따르면 남녀가 서로에게 호감도가 높을수록 한 쪽에서 잔을 들 때 상대방이 자신도 모르게 함께 잔을 드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미러링은 서로간의 심리적 다리를 이어주는 데 탁월한 효과가 있다.

경청의 마지막 기술은 페이싱(pacing)의 기술이다. 페이싱은 보조를 맞춘다는 의미로 특히 상대방의 호흡과 목소리 톤을 맞추는 방법이다. 상대가 들떠서 한껏 상기된 목소리로 이야기 하는데 시무룩한 목소리로 대꾸해 주는 사람에게서 경청의 모습을 찾을 수 없는 것이다. 페이싱의 기술을 잘 사용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것을 유지하고 지속하려는 마음의 습성을 내려놓는 것이 중요하다. 자신의 틀을 유지하면서 타인의 호흡을 맞출 수는 없다. 타인을 판단하면서 그 사람의 호흡에 자신의 호흡을 동조하기란 어렵다. 내 마음의 판단들을 내려놓으면서,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상대방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호흡을 맞춰보면 그 사람의 마음이 훨씬 의미있고 실감나게 내 가슴으로 전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경청이 갖는 정말 중요한 의미는 상대로 하여금 하나님의 품성을 경험하게 하는 기회를 제공한다는 것에 있다. 변화는 하나님의 품성을 경험하는 데서 비롯된다. 경청이 정말 필요한 순간은 상대가 자신의 약함을 숨기고 드러내지 못할 때이며, 자신의 연약함에 스스로 실망할 때이다. 스스로도 발견하지 못하는 자신의 선함을 어떤 너절한 모습 속에서도 발견하고 믿어주는 그 한 사람이 필요하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온전한 이유는 듣는 우리가 그들보다 더 나아서가 아니라, 이미 그 사랑을 주님을 통해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것이 소명인 사람들이고,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성품을 경험하도록 기회를 제공해야 하는 거룩한 부담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경청할 수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