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광서 목사.
박광서 목사.

경제 위기와 시리아 난민 문제로 전 세계가 골머리를 앓고 있다. 한국사회 역시 서서히 이슬람과 관련된 문제로 인해 어지럽다. 수쿠크 금융이나 할랄식품, 그리고 혹시나 있을 원리주의자들의 테러에 긴장하는 것이 그 예다. 교회의 영향력은 갈수록 약화되는 데 반해 이슬람은 약진하는 것처럼 보여, 교회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다.

최윤식 박사는 최근 발간한 《2030 대담한 도전》에서 2050년경 이슬람과 기독교 사이의 갈등에 의한 세계적 종교전쟁의 발발 가능성을 99.9%로 예측하고 있다. 그가 책 제목처럼 대담한 도전을 하고 있는 것인가? 필자는 충분한 개연성이 있다고 본다. 이유는 이슬람이 가진 속성 때문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마지막 10년을 선용하지 않는다면, 그의 예측은 현실이 될 수 있다. 현재 기회를 놓친 유럽과 미국교회가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는 것을 목도한다. 이에 필자는 21세기에 가장 경계해야 할 대상인 이슬람의 속성이 무엇인지 살피고, 한국교회의 갱신을 위한 구체적인 대안이 무엇인지 함께 고민해 보고자 한다.

이전에 경험해 보지 못한 영적 세력

유럽교회는 세속화라는 불치병에 걸려 유럽사회의 소금과 빛이 되지 못했다. 그 틈을 잠식해 들어와 길 잃은 유럽의 유일한 소망인 양 교회의 자리를 갈취한 세력이 이슬람이다. 무리한 예측일지 모르나,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혜와 뼈를 깎는 대개혁이 일어나지 않는 한 유럽은 이미 기울어졌다고 본다. 무슬림이 전 유럽 인구의 10%에 육박한다는 통계는, 역전의 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양극화가 해결되지 않고 이기적인 세대들의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한 반전의 가능성은 적다. 이는 한국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이슬람이 위협적인 이유가 무엇인가? 유럽사회와 교회는 지금 자신들이 이슬람을 몰라도 너무 몰랐다고 고백하고 있다. 도대체 이슬람의 정체가 무엇인가?

1. 종교의 옷을 입은 이데올로기

이슬람은 자본주의 혹은 민주사회에서 사는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전혀 다른, 종교의 옷을 입은 이데올로기라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종교는 정치와 분리된다고 배운다. 그러나 이슬람은 정치와 종교가 합쳐진 삶의 체계이다. 만일 종교가 종교의 보편적 기능보다 정치성을 강하게 표출하면 이데올로기로 흐르기 쉽다. 더 나아가 그 정치가 기본 윤리마저 저버리게 되면, 과거 공산주의나 독재정권처럼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잔인한 해악을 저지를 수 있다. 전혀 양심의 가책 없이 극한 만행도 저지를 수 있다. 이런 정치적 위험성을 내포한 실체가 이슬람이다. IS와 같은 원리주의 테러집단이 대표적 샘플이다. 그들은 폭력과 잔인함의 근거를 그들의 경전에 둔다. 많은 무슬림들이 "저들이 정치적 목적을 위해 경전을 이용하고 있다"고 주장해도, 경전과의 관계는 부인할 수 없다. 만일 이슬람이 기독교나 불교처럼 보편적인 종교의 기능에 충실하다면 얼마든지 공존할 수 있다. 그러나 그동안 견지해 왔던 것처럼 무슬림들의 세상만 존재해야 한다고 믿고 배타적인 교리를 추구한다면 공존은 쉽지 않다.

2. 모든 무슬림의 사명 '전 세계의 이슬람화'

무슬림들은 전 세계가 A.D. 7세기로 돌아가 창시자 무함마드처럼 살기를 소망한다. 그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보편적인 종교에서는 힘든 교리들을 수용한다. 거짓을 허용하는 타끼야(Taqiyya) 교리, 계시의 취소를 인정하는 만수크(Mansukh) 교리, 그리고 무함마드의 삶대로 살아야 한다는 우스와 하싸나(Uswa Hassana) 교리 등이 그것이다. 이 교리들은 전 세계 이슬람화를 위한 실천 강령과 같다. 비록 다수의 무슬림들이 평화를 소망한다고 하지만, 그들의 역사는 그렇지 않았음을 확실히 보여 준다. 무슬림들은 경전 앞에 서면 언제나 작아지고, 그 찔림에 의해 원리주의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경전은 끊임없이 전 세계의 이슬람화를 위해 지하드 전사가 되라고 재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무슬림으로서 이 땅에서의 사명이다. 불신자(kafir)의 판단 기준이 무엇인가? 무함마드의 사도됨 인정 여부인 바, 만일 이를 부인한다면 어떻게 될까? 독자의 상상에 맡긴다. 꾸란과 하디스 없는 이슬람이나 무슬림을 생각할 수 없다. 이제껏 우리가 경험해 보지 못한 영적 세력이 우리 곁에 다가와 똬리를 틀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뼈를 깎는 갱신이 요구되는 한국교회

주일학교의 부재, 급격한 세속화, 목회 현장과 괴리된 신학교 등은 한국교회의 미래를 어둡게 하는 요소들이라 할 수 있다. 한국교회는 말 그대로 절벽 끝자락에 위태하게 서 있는 형국이다. 무엇보다 유럽사회와 교회가 골머리를 앓고 있는 이슬람 문제는, 앞으로 한국에서도 예외가 아닐 것이다. 어떻게 해야 총체적인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가능한 선에서 몇 가지 대안을 제시해 본다.

1. 복음과 경건의 회복

최근 한국어린이전도협회 대표와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전도의 어려움은 거기서도 마찬가지였다. 매년 30만 명 이상의 어린이들에게 복음을 전했는데, 작년에는 그 수가 20만 명대로 줄었다는 것이다. 전도를 가로막는 요소들이 갈수록 커진다는 것이다. 필자는 한국교회의 제일 심각한 문제가 무엇인지 물었다. 그는 "복음을 제대로 체험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필자 역시 동감하는 바다.

청교도가 강조했던 것들 중 하나가 '중생' 혹은 '회심' 체험이다. 오늘날 목회자들의 치명적인 문제 중 하나는 교인들의 거듭남 체험 여부에 주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러다 보니 교회 속에 가짜 복음을 추구하는 '명목상의 교인', '실천적 무신론자'들이 넘쳐나게 되었다. 교회 세속화의 원인이 여기에 있지 않을까? 참된 성화는 거듭난 이후 성령의 은혜로 시작된다. 그저 열심만 낸다고 하늘 백성이 되는 것은 아니다.

교회는 십자가의 복음을 회복해야 한다. 속물들의 소원을 들어 주고 비위나 맞추는 것이 아니라, 비참한 죄인이 회복되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만 가능함을 온전히 깨닫게 해야 한다. 즉 십자가의 은혜 체험은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지만, 목회자와 교회는 이를 위해 바른 복음을 가르치는 데 힘쓰고 기도와 헌신으로 도와야 한다. 이 체험이 있을 때에 비로소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순종하는 것이다. 참된 경건의 회복은 이것이 전제될 때에 가능한 일이라 생각한다.

2. 영적 지도자의 올바른 시대 인식

교회학교 침체에 위기감을 느낀 교단마다 대책을 세우고 많은 노력을 한다. 필자가 속한 고신 역시 마찬가지다. 그런데 공통적인 아쉬운 점을 발견한다. 하나같이 주일학교의 책임을 교사에게 돌리려 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교수법·전도법·관리법 등 교사의 자질 향상에 초점을 맞춘다. 물론 교사의 역할이 지대하다. 그러나 목회자의 갱신이 더 우선되어야 하지 않을까? 교사가 아무리 발버둥쳐도 그 열심을 한순간에 좌절시킬 수 있는 존재는 목회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결되어야 할 것은 지도자들의 시대 인식과 각성이다. 지도자들이 성숙해질 때 교회학교의 부흥도 시작된다고 믿는다. 세상의 기업도 기회가 7-8년밖에 남지 않았다며 변화를 모색하고 있는데, 교회가 시대를 읽지 못하고 계속해서 본질에서 이탈한다면 도태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라 생각한다.

3. 다음 세대를 살리기 위한 각골지통(刻骨之痛)의 수고

기업도 이전에는 감히 상상도 못했던, 경쟁 기업과의 합병이나 협력을 적극적으로 모색하고 있다. 불확실한 시대에서 살아남기 위한 상생(相生)의 몸부림이다. 교회는 어떤 변화를 모색해야 하나?

분립 개척을 실시하는 것이다. 작금의 교회 개척은 비용의 부담이 크고, 그에 따른 어려움도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래서 큰 교회들이 개척교회에 일정액을 일정 기간 지원하는 형식을 취했다. 개척교회 입장에서 큰 힘이 된다. 그러나 장기간 성장하지 않을 경우, 교회는 매너리즘에 빠져 병이 들기 쉽기 때문에 이 방식은 효과적이지 못하다. 이동 성장에 의한 부흥이 주를 이루는 시대에 건강한 교회를 개척하기 위해서는, 준비된 목회자와 교인들을 모아 분립 개척시키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본다. 하지만 분립 개척은 모교회의 큰 결단과 내려놓음이 전제되어야 가능하다. 지금처럼 더 커지려는 욕심으로 성장주의를 추구한다면 불가능하다. 또한 왜 큰 교회만 희생해야 하느냐고 항변한다면, 그 교회는 교회를 인간의 소유물로 여기는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교회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잊어서는 안 된다. 교회가 탐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결국 공멸하고 말 것이다.

준비된 일꾼을 파송하여 돕는 것이다. 큰 교회는 작은 교회에 비해 여러 면에서 자원이 풍부하다. 경험과 열정이 있는 준비된 일꾼을 일정 기간 가능성 있는 개척교회로 파송하여 다음 세대 살리는 사역을 돕는 것도 또 하나의 방법이다. 필자는 적어도 3년 이상 도와주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할 수만 있으면 그 교회에 정착하는 것을 유도해야 한다. 1-2년의 생색내기 봉사는 할 만하면 돌아가게 되어 열매를 거두기 어려우며, 돕는 자 역시 본 교회로의 회귀에 마음이 가 있어 온전한 충성이 어렵다. 이와 같이 하나님나라의 입장에서 상생(相生)을 위한 노력을 경주한다면, 다음 세대에 대한 불안은 일정 부분 해소되지 않을까? 하지만 이 역시 대승적 차원의 내려놓음이 없다면 쉽지 않은 일이다.

총회와 노회의 협력과 지원이다. 분립 개척이든 일꾼 파송이든 상생의 마인드가 없으면 실현되기 어렵다. 다른 말로 어떤 시대가 도래하고 있는지 하나님의 눈으로 직시해야 가능하다. 이를 위해 총회와 노회는 다각도로 계몽에 힘써야 하며, 더 나아가 다양한 형태의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목회자, 교사, 그리고 교인들을 위한 효율적인 프로그램을 제공함으로써, 다음 세대가 세워질 수 있도록 협력해야 한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다. 임시 방편이 아닌 지속적이고 장기적인 관점에서 아낌없는 투자를 계속할 때에 한국교회는 위기의 쇠사슬을 끊을 수 있을 것이다.

포기할 수 없는 십자가의 사랑

우리는 이슬람의 위협과 더불어 '고령화와 인구 감소'라는 두 악재를 만나고 있다. 해마다 3천 개 이상의 교회들이 문을 닫고 있고, 개척교회 정착률은 제로에 가깝다고 한다. 아마도 수 년 내에 교회의 통폐합 현상은 낯설지 않게 될 것이다. 그나마 나타나고 있는 부흥도 80-90%는 '회심 성장'이 아닌 '이동 성장'인 것이 낯 뜨거운 우리의 현주소다. 그렇다고 교회가 맥없이 쓰러지도록 방임해야 하는가? 결코 그럴 수는 없다. 향후 당황스러운 일들이 벌어진다 해도, 교회가 본질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하나님의 역사는 계속될 것이다. 만일 유럽처럼 교회와 신학자와 교인들이 진리의 입을 닫고 세상의 동조자가 된다면, 하나님께서는 은혜의 촛대를 다른 곳으로 옮기실 것이다. 복음은 영원하지만 한 곳에 머물지는 않는다. 초대교회 신앙의 중심지였던 터키와 이집트가 오늘날 무슬림의 땅이 되지 않았는가! 교회가 세상을 탐하지 않고 십자가의 은혜를 사모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심판의 날까지 이 민족에게 은혜와 기회를 베풀어 주실 것이다. 십자가의 은혜와 부활의 산 소망은 교회가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되는 생명의 열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