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관식  시애틀 형제교회 원로 목사
(Photo : 기독일보) 심관식 시애틀 형제교회 원로 목사

자살은 어제 오늘에 시작된 것이 아닌 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요사이 자살하는 이들이 부쩍 늘어나는 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어떤 큰 회사의 사장은 자기의 명예에 부끄럽다고 강물에 투신하여 자살하고, 어떤 연예인은 허무하다고 자살하고, 어떤 이는 너무 가난하다고 비관하여 자살하고, 어떤 이는 부모에게 책망을 들었다고 자살하고, 어떤 이는 도저히 살 희망이 없다고 자살하고 이런 형편 저런 사정으로 자살을 합니다. 요사이는 어떤 연예인이 자살하였는데 그것이 아름답게 보였는지 젊은이들이 자살하는 비율이 전보다 부쩍 늘었다고 합니다.

자살한 이들의 형편이나 유언을 들어보면 참 안 되었다거나 불쌍하다든가 오죽하면 자살을 하겠는가? 하는 등으로 동정을 합니다.

"세상에 태어나서 한 평생이 몇 백 년 사는 긴 세월도 아닌데 왜 자살을 할까? 좀 참고 견디지 그랬을까? 그 순간만 넘기면 자살을 면할 터인데..." 합니다.

내가 서울 왕십리 중앙교회에서 목회할 때에 새벽기도회를 끝내고 기도를 하다가 나오는데 한 아가씨가 나를 기다리더니 상담을 하고 싶다고 하여 내 사무실로 안내를 하였습니다. 그 아가씨가 우리 교회는 6개월 정도 나왔다고 하는데 별로 내 기억에 남지 않는 아가씨입니다.

한 시간 반 정도 이야기를 들어 보니까 그녀의 어머니가 어떤 부잣집 소실로 들어가서 낳은 딸이라고 하는데 어머니와 딸의 문제가 아주 복잡 미묘하게 얽힌 사연을 들었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조언을 해주고 혜여 졌는데 며칠 후 새벽기도회 후에 또 만나자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지난 번 이야기의 계속인데 아시겠지만 상담이라는 것이 마치 판사가 법조문 몇 조문에 의해서 선고하노라 할 수 있는 것처럼 명확하게 상담을 해서 해결해 주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몇 가지 권면과 방안을 말해주고 보냈는데 2일 후에 갑자기 낮에 만나자고 합니다.

그런데 낮에는 심방 스케줄이 다 잡혀 있을 뿐만 아니라 갑자기 시간을 낼 수가 없어서 내일 새벽기도회 후에 만나자고 하였습니다.

그 때 한국 목회는 심방을 많이 했어요. 그 날 심방을 하는 중 오후 3시 쯤 되었는데 교회 사찰로부터 긴급 전화가 왔습니다.서현숙 양이 자살하여 죽어서 지금 성동구 경찰병원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부부가 급히 병원으로 가보았습니다.

이미 사체실에 있어서 못 들어가게 합니다. 교회 담임목사라고 하니까 들어가라고 하는데 그렇게 예뻤던 얼굴이 약물관계인지 부어올라서 흉한 모습이었습니다. '새벽을 못 기다리고 자살을 했구나!' 하는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자살에 대하여 기독교는 어떻게 보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기독교는 자비와 사랑을 많이 말하니 자살을 동정하지 않을까? 생각한 이가 있을지 몰라요.

기독교는 자살한 형편과 딱한 사정을 떠나서 근본 문제를 말합니다.

공자의 윤리 가운데 자식의 몸은 자기 것이 아니오 부모의 것이기 때문에 머리칼 하나라도 함부로 자식이 제 마음대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이 있지요.

다시 말하면 네 것이 아니니 네가 네 마음대로 천시하거나 져버려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내가 내 것이 아닌 것을 가지고 함부로 내 것처럼 다루면 그것은 경우에 어긋나는 일이지요?

신약성경 고린도 전서 6:19-20절을 보면 "여러분의 몸은 여러분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받은 것으로 여러분 안에 계시는 성령님의 성전이라는 것을 모르십니까? 하나님은 값을 치르고 여러분을 사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십시오." 여기 보면 내 몸은 내 몸이 아니라고 하지요. 하나님이 값을 지불하고 사셨다고 합니다.

옛날 노예들이 팔려오면 그날부터 그 노예는 자기 것이 안 되므로 마음대로 행동할 수가 없었습니다.

어디 가고 싶다고 가고 고생되고 살기 싫다고 떠나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만한 대가를 지불하고 데려왔기 때문이지요.

우리 사람은 얼른 생각하면 내 몸이 내 것인 것 같지요? 그러나 근본적으로 깊이 상고하면 하나님의 것입니다.

기독교는 여기서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것을 내 것처럼 마음대로 죽이는 것은 하나님 앞에 죄가 되지요.

우리는 다시 한 번 내가 누구의 것인가를 알아 바로 살아야 합니다.

먼저 건강이 내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라고도 하는데 사실 사회의 혜택을 입으며 살지 않습니까?

그 사회가 만든 옷을 입고 즉 남이 만든 신발을 신고 농부가 만든 식량을 먹고 그 사회의 교육을 받고 살아가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사람은 성장하여 공공복리를 위해 일하여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이런 일을 하기 위해서 건강이 주어진 것이지요.

모든 사람을 위해 물건을 만들고, 기계를 돌리고, 밝고 명랑하고 평화로운 사회를 이루기 위해 건강을 주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근본적으로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서 건강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건강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리고 물질이 내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애써서 벌었는데 내 것이 아니라니 무슨 말이냐? 하겠지요.

가령 돈 없이 미국으로 이민을 온 사람이 있는데 무엇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습니다. 그 사람이 전부터 아는 돈 있는 부자에게 가서 도와달라고 하였더니 가게하나를 내주었다고 합시다. 그러면 그 수익이 다 그 사람의 것이 될 수는 없겠지요.

우리 인생은 빈손으로 이 세상에 와서 사는데 하나님께서 자본을 대 주셨어요.

그러므로 성서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청지기 즉 매니저라고 하지요. 매니저는 주인의 것을 맡아서 관리하는 것뿐입니다.

청지기는 항상 청지기이지 즉 관리자는 언제나 관리자이지 주인은 아니에요.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주어진 물질을 관리자로서 어떻게 잘 다루다가 가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 것이라고 하면서 내 마음대로만 쓰고 주인을 위해서 바로 쓰지 않으면 훗날에 주인에게 큰 책망을 들을 것 아닙니까?

엄숙한 사실은 "물질이 전부 내 것이 아니다."하는 것입니다. 이 물질관만 분명해지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살 수 있는 것이지요.

꼭 알아야 할 중요한 것은 생명이 내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14:7-8절에서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해서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라고 했어요.

우리는 우리의 생명이 내 것이 아님을 잘 알아야 해요.

그러므로 어떤 상황, 어떤 피치 못할 경우에라도 <자살>은 하나님 앞에 죄가 됩니다. 내 몸이 내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인데 감히 하나님의 것을 내 마음대로 처분한다는 것은 하나님께 큰 실책이 되는 것이지요.

내 몸은 아무리 내 몸인 것 같아도 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면 자살을 할 수가 없는 것이지요.

이제부터 자살의 충동을 일으키는 사람이 곁에 있으면 절대로 자살을 막아야 하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값을 지불하고 우리를 구원하신 기독교의 핵심진리를 깨닫고 살도록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