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 ) ▲백석대 채영삼 교수
(Photo : ) ▲백석대 채영삼 교수

최근 들어 아동학대 피해 사례가 급증하고 있다. 통계에 의하면, 불과 5-6년 전에는 1만건 이하였던 것이, 대략 2012년부터 급증하기 시작하여 2014년에는 2배 가까이 증가해 2만 여건에 이르는 것을 볼 수 있다(보건복지부, 중앙아동보호전문기관 누리집 참조).

이를 두고 부모 자신이 자신의 부모에게 받은 상처 때문에 그랬다고 하면, 그런 개인적인 이유로는 이렇듯 급증하는 아동 학대 사례를 설명하기 어렵다. 그것이 굳이 2012년 이후에 급증하고 있는 사실에 대한 타당한 설명이 필요한 것이다.

아무래도, 사회가 점점 더 각박해지고 있다는 데에 원인이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경제적 요건이 나빠지고 아무리 노력해도 정상적인 미래를 꿈꿀 수 없을 때, 그 좌절과 스트레스는 그것을 쏟을만한 약자에게 향하기 쉽기 때문이다.

물론, 사회 구성원 모두가 다 어려운 시절에는 상대적 빈곤감이라는 것이 적었다. 하지만 겉으로는 다 괜찮아 보이는데, 사회의 내부 구조나 제도가 벽이 높을 때, 아무리 노력해도 구조적으로 좌절에 부딪힌다면, 그 스트레스는 약자에게 쏟아 부어질 확률이 높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그렇다고 개인의 책임을 피할 수는 없다. 고난을 믿음의 연단이요, 더 큰 영적 복락의 길로 이해하며 받아들이게 하는 신앙의 힘도 있다. 설령 그런 신앙이 없더라도, 너무나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부모 됨을 지켜나간 많은 우리의 어머니, 아버지들이 이 땅에는 차고 넘친다. 그런데, 왜 이런 아동 학대가 급증하는 것일까?

단기적인 요인들이 있겠지만 길게 보면, '약자에 대한 배려'라는 소중한 가치를 뒷받침하고 격려해줄 만한 사회적, 정신적, 영적 버팀목들이 하나 둘 씩 무너진 데에 기인한다는 생각이 든다.

심화되는 경제적 양극화 현상, 비정규직 증가로 인한 삶의 불안정성 증대, 가계실소득의 저하 등은 분명한 압박 요인일 것이다. 하지만 급증하는 아동학대 원인을 모두 이런 외적 요인에로 돌릴 수는 없다. 정신적, 도덕적 요인도 중요하다.

사회의 정신적이고 도덕적인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문화나 종교일 텐데, 그나마 전통적으로 '함께 사는 관계'를 강조하는 유교적인 문화도 이미, 물질적이고 개인주의적 문화가 주는 충격에 그 근본이 와해 된 지 오래이다.

사실, 유교문화에서조차 '어린이'는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한 아이'로 크게 존중 받은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나마도 관계 안에서 예의를 갖추고 서로를 대하는 유교적 영향마저 오늘 날 크게 쇠잔한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사회가 약자를 배려하는 가치를 북돋고 지켜가는 종교가 역할을 다해야 한다. 종교는 사회라는 우물물을 지속적으로 맑게 해주는 생명력 같은 역할을 함으로써 그 속에서 사는 고기들을 지켜갈 수 있게 한다.

경제적 평등이나 법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사회를 지배하는 가치관, 그것을 산출하고 요구하고 보여주고 지켜가는 종교의 역할이 크다. 경제적 압박, 개인의 성격적 결함이 있다 해도, 권력자인 성인이 약자인 아동을 보호한다는 것은 결국 자기희생과 책임감, 그리고 약자에 대한 긍휼한 마음이 아니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회는 세속적 욕망들과 성공의 압박 아래서, 과연 이런 '약자에 대한 긍휼한 마음'을 진정 일구어 왔는지 그것을 물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교회마저, 강한 것, 크고 많은 것, 권력을 숭상하며, 거룩함과 진실함을 우습게 여기고 작고 약한 것들은 얼마든지 무시해도 좋다는 가치관을 생산해낸다면, 그것이 곧 약자가 기댈 곳이 없는 폭력의 세상을 조장하는 꼴이 되고 만다.

그런 성공과 권력을 숭상하는 것을 내심 목적으로 삼는 자가 신학생이 되고, 목회자가 되고, 교회를 지도한다면, 거기서 무수히 많은 약자들이 상처를 입고 실족할 것은 불을 보듯 자명한 일이기 때문이다.

결국 교회가 달라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하려면 단연코 성공주의, 그 어떤 약자들을 희생해서라도 자신의 세속적 야망을 성취하겠다는 변질된 복음을 버려야만 한다. 이것보다 시급한 일은 없다. '예수 믿고 세상 복 받는 것'을 핵심으로 전파하는 현세주의 적이고, 무분별하고, 성경에서 멀어져버린, 예수에게서 떠난 왜곡된 복음에서 돌이켜야만 한다.

그런 '순전하지 못한 복음'을 가르치고 전파하는 거짓교사들에게서 돌아서야 한다. 성경도 법도 도덕도, 하나님의 이름도, 사회적 평판도 아랑곳 않는 그들에게 실족한, 수 없이 많은 '지극히 작은 자들'을 돌아보아야 한다.

그래서 어쩌면, 급격히 증가하는 '아동학대'의 주범은, 거대한 부와 권력을 향해 내달았던 한국교회가 '지극히 작은 자'를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버린 증거이기도 할 것이다. 사람보다는 건물을, 섬김보다는 성공을 '복음적 가치'로 오도(誤導)하며 굳게 붙들어온 결과이기도 한 것이다.

그간 교회가 강력하게, 낮은 자리에서, 지극히 작은 자들을 존중하며 소중하게 여기는 복음과 메시지와 삶을 이 사회를 향해 지속적으로 증거 해 왔다면, 그 많은 사회적 약자들과 함께, 외진 곳에서 학대받고 상처받거나 죽어간 아이들을 조금이나마 더 지켜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건강하고 부강한 선진국이란, 약자가 그 약함 때문에 주눅 들지 않는 사회이다. 행복한 가정의 아이가 아버지 등에 올라타고 활개치고 뛰어 노는 것처럼 말이다.

교회도, 이제는 그 '세속과 다르지 않은' 무법(無法)한 권위주의를 숭상하는 문화와 결별해야 할 때이다. 폭력은 제한 없는 권력에서 정당화된다. 제왕적인 목회자를 우러르는 그런 습관, 그런 시대를 떠나보내야 한다.

무엇보다, 거룩한 복음, 세속적이지 않은 복음,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나라에 관한 복음을 회복해야 한다. 메시지와 삶 모두에서, '약자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강하고 성숙한 목회자들, 우리 주 예수님을 닮은 그의 몸 된 교회들이 더 많이 나타나야 한다.

그 길 뿐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빚어진 그 꽃다운 아이들이 이 사회의 보이지 않는 구석에서 매 맞고 소리 없이 죽어갔다는 이 가슴 아픈 소식을 줄여가는, 근본적이고 또 분명한 출발점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