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 극단주의 탈레반에 의해 살해된 분당샘물교회 부목사인 배형규 목사의 소식이 전해지자 가족과 교회 성도들뿐 아니라 전 국민들도 애도의 표현을 금치 못했다. 배형규 목사의 친구로 알려진 낙도선교회 대표 박원희 목사는 “엎드려 울며 기도할 수 밖에 없었다”며 배형규 목사의 죽음을 애도했다. 박 목사는 ‘분석과 사랑’이라는 제목의 칼럼을 낙도선교회 게시판에 올렸다. 아래는 박원희 목사의 칼럼 내용.
저녁에 중년의 여자분에게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의 남편은 중년이지만 성인유아적 모습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 분과 통화를 하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자매님의 남편에 대하여 분석도 하고 평가도 하겠지만 남편을 사랑할 분은 오직 자매님 밖에 없습니다. 분석과 평가는 사람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오직 사랑만이 변화시킵니다."
형규와 단기선교를 간 지체들에 대한 네티즌의 글들을 보면서 저는 윽장이 무너졌습니다. 극한 말들... "순교하러 갔으면 순교해라", "유서까지 써 놓고 뭘 또 살려달라고 하느냐", "세금 아깝다" 등.
그런데 기도편지를 보내고 기도 부탁을 하는 가운데 저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말들과 글들을 듣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찾아봅시다", "살려달라고만 기도하지 마시고 순교하는 것도 당당하게 받아 들여야죠"
예수님이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실 때 세 번씩 기도하시며 하나님께 고난의 잔을 옮겨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십자가의 선택이 하나님의 선택임을 예수님이 몰랐을까요? 그러나 예수님은 잔을 옮겨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마음의 고통을 위해 베드로에게 기도를 거듭 부탁했습니다.
형규 형제는 늘 순교를 생각했습니다. 저는 형규 형제가 죽을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그의 신앙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그리스도인임을 감추지 않는 형제입니다. 기회가 있으면 분명히 복음을 전할 형제입니다. 다른 지체들 대신 자신의 목숨을 담보할 형제입니다. 형규나 저는 순교하는 것에 대하여 전혀 두려움과 거리낌이 없습니다. 아버지의 뜻에 철저히 순종하고자 하는 것, 그것이 형규 형제의 삶입니다.
형규 형제만큼 하나님 아버지 앞에 순종하고 자신의 뜻을 내려놓는 형제를 저는 지금까지 만나 본적이 없습니다. 그 점에서 늘 저를 부끄럽게 했던 형제입니다. 그래서 형규에게 위험에 처하게 하는 것은 텔레반이 아니라 그의 신앙이라 생각합니다.
저도 형규도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최우선의 기도라 생각하고 삶이라 생각합니다. 우리가 다 압니다.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최선이라는 것을 알고, 우리는 다 그렇게 삽니다.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는 삶을 위해 자신의 것을 드리기 위해 말입니다.
제가 형규를 살려달라고 몸부림치는 것은 아버지의 뜻을 몰라서도 아니고 형규나 저나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기뻐하지 않아서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 친구의 마음입니다. 내 목숨보다 아까운 친구, 내 모든 것을 주고 싶은 친구 생각만 하면 억장이 무너지고 눈물이 나는 친구 사랑하는 내 친구 그 친구를 살려달라고 하는 기도를 하는 것은 친구의 마음입니다.
그 마음에다 분석의 칼을 들이대고 왜 그런 상황을 만들었느냐고 신앙의 잣대로 의로움을 판단할 때, 하염없이 무너지는 아픔을 느낍니다. 왜 모르겠습니까?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죽은 가는 자녀를 붙들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분석하고 냉철하게 자녀의 죽음을 보는 냉혈한 아버지가 어디에 있습니까? 죽어가는 성도를 보고 빨리 죽어라 이야기하는 목회자가 어디에 있습니까?
다 알지만 살려달라고 몸부림치는 것이 아버지의 마음이고 살려달라고 몸부림치는 것이 목회자의 마음입니다. 겟세마네에서 몸부림치는 예수의 마음, 그 사랑이 그립습니다.
잠언 말씀과 같이 우는 자와 더불어 울어야 합니다. 생명 앞에 논리와 냉철한 지식으로 칼을 대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다 압니다. 저는 형규를 사랑합니다. 그리고 주님도 사랑합니다.
그러기에 어느 상황이 와도 주를 찬미할 수 있고 경배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좋은 뜻이 이루어진다는 것 지금도 믿고 있으며 앞으로도 믿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섭리가 어떤 상황가운데에서도 있음도 믿습니다. 최선의 섭리와 선이 있음도 믿습니다. 살려달라고 엎드려 우는 것은 친구의 마음입니다.
십자가는 분석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저녁에 중년의 여자분에게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의 남편은 중년이지만 성인유아적 모습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 분과 통화를 하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자매님의 남편에 대하여 분석도 하고 평가도 하겠지만 남편을 사랑할 분은 오직 자매님 밖에 없습니다. 분석과 평가는 사람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오직 사랑만이 변화시킵니다."
형규와 단기선교를 간 지체들에 대한 네티즌의 글들을 보면서 저는 윽장이 무너졌습니다. 극한 말들... "순교하러 갔으면 순교해라", "유서까지 써 놓고 뭘 또 살려달라고 하느냐", "세금 아깝다" 등.
그런데 기도편지를 보내고 기도 부탁을 하는 가운데 저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말들과 글들을 듣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찾아봅시다", "살려달라고만 기도하지 마시고 순교하는 것도 당당하게 받아 들여야죠"
예수님이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실 때 세 번씩 기도하시며 하나님께 고난의 잔을 옮겨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십자가의 선택이 하나님의 선택임을 예수님이 몰랐을까요? 그러나 예수님은 잔을 옮겨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마음의 고통을 위해 베드로에게 기도를 거듭 부탁했습니다.
형규 형제는 늘 순교를 생각했습니다. 저는 형규 형제가 죽을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그의 신앙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그리스도인임을 감추지 않는 형제입니다. 기회가 있으면 분명히 복음을 전할 형제입니다. 다른 지체들 대신 자신의 목숨을 담보할 형제입니다. 형규나 저는 순교하는 것에 대하여 전혀 두려움과 거리낌이 없습니다. 아버지의 뜻에 철저히 순종하고자 하는 것, 그것이 형규 형제의 삶입니다.
형규 형제만큼 하나님 아버지 앞에 순종하고 자신의 뜻을 내려놓는 형제를 저는 지금까지 만나 본적이 없습니다. 그 점에서 늘 저를 부끄럽게 했던 형제입니다. 그래서 형규에게 위험에 처하게 하는 것은 텔레반이 아니라 그의 신앙이라 생각합니다.
저도 형규도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최우선의 기도라 생각하고 삶이라 생각합니다. 우리가 다 압니다.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최선이라는 것을 알고, 우리는 다 그렇게 삽니다.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는 삶을 위해 자신의 것을 드리기 위해 말입니다.
제가 형규를 살려달라고 몸부림치는 것은 아버지의 뜻을 몰라서도 아니고 형규나 저나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기뻐하지 않아서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 친구의 마음입니다. 내 목숨보다 아까운 친구, 내 모든 것을 주고 싶은 친구 생각만 하면 억장이 무너지고 눈물이 나는 친구 사랑하는 내 친구 그 친구를 살려달라고 하는 기도를 하는 것은 친구의 마음입니다.
그 마음에다 분석의 칼을 들이대고 왜 그런 상황을 만들었느냐고 신앙의 잣대로 의로움을 판단할 때, 하염없이 무너지는 아픔을 느낍니다. 왜 모르겠습니까?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죽은 가는 자녀를 붙들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분석하고 냉철하게 자녀의 죽음을 보는 냉혈한 아버지가 어디에 있습니까? 죽어가는 성도를 보고 빨리 죽어라 이야기하는 목회자가 어디에 있습니까?
다 알지만 살려달라고 몸부림치는 것이 아버지의 마음이고 살려달라고 몸부림치는 것이 목회자의 마음입니다. 겟세마네에서 몸부림치는 예수의 마음, 그 사랑이 그립습니다.
잠언 말씀과 같이 우는 자와 더불어 울어야 합니다. 생명 앞에 논리와 냉철한 지식으로 칼을 대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다 압니다. 저는 형규를 사랑합니다. 그리고 주님도 사랑합니다.
그러기에 어느 상황이 와도 주를 찬미할 수 있고 경배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좋은 뜻이 이루어진다는 것 지금도 믿고 있으며 앞으로도 믿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섭리가 어떤 상황가운데에서도 있음도 믿습니다. 최선의 섭리와 선이 있음도 믿습니다. 살려달라고 엎드려 우는 것은 친구의 마음입니다.
십자가는 분석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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