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덕영 박사.
조덕영 박사.

1. 악과의 투쟁은 근본적으로 세상과 다른 싸움이다

 

악과의 투쟁도 당연히 싸움이다. 다만 악과의 싸움은 근본적으로 세상의 싸움과 다른 동기와 형식과 방식을 가진다. 이 이상한 성경적·신앙적 싸움에는 보통 두 가지 방식이 있다. 하나는 요셉의 방식이요 다른 하나는 다윗의 방식이다. 요셉이 선으로 악을 제어하였다면, 다윗은 그와 조금 다른 형식의 투쟁을 보인다. 그것은 악과의 적나라한 투쟁이요 전면적 전쟁 선포 방식이다. 진정한 애굽 도성과 출애굽 도성의 진검 싸움이다. 요셉의 형식이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예수 십자가 방식이라면, 다윗의 투쟁은 악과의 전면전이다. 성경은 악한 원수 마귀는 사랑과 용서의 대상이 아니라 꾸짖고 대적해야 될 존재라고 지적한다. 이 악과의 전쟁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고통받고 피투성이가 되는 처참한 싸움이다. 예수님도 광야에서 그 마귀의 시험을 친히 당하셨다. 예수는 십자가 사랑으로 승리(선으로 악을 갚음)하였으나, 종말론적 심판에서 이제 단순한 사랑이 아닌 공의의 하나님으로 나타난다. 즉 요셉과 다윗이라는 두 사람의 싸움 방식은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일 뿐 아니라 공의의 하나님이심을 보여 준다. 그렇다면 요셉과 달리 다윗은 이 악과의 투쟁을 어떻게 하였는가.

2. 다윗은 세상과 다른 '중심의 사람'이었다

세상이 가진 편견이 있다. 세상은 외모를 본다. "헬조선", "금수저, 흙수저" 등 최근 나타난 냉소적 인터넷 용어들은, 사람이 얼마나 외모로 사람들을 평가하는지 역설적으로 보여 준다. 다윗은 세상적 기준으로 보면 조금 모자란 보통 수준의 사람이었다. 이방 여인 룻의 증손이었고(룻 4:18-22) 장자(長子) 중심의 유대 사회에서 탁월한 형들에 비해 부족한 막내였다. 소년기 대부분을 부친의 양 떼를 지키며 들판에서 보낸, 학문 없는 어린 목동이었다. 아버지 이새 뿐 아니라 당대 최고의 선지자요 사사였던 하나님의 사람 사무엘조차 눈치채지 못할 만큼 평범한 인재였다. 세상은 외모를 보나 하나님은 중심을 보신다. 이 말 한 마디로 하나님은 당대 최고 인물 사무엘의 미숙함을 책망하신다. 우리 세상 인간은 늘 그렇다. 내재(內在)는 결코 초월(超越)을 바르게 볼 수 없는 것이다. 사람이 악의 기원과 의미와 투쟁에 대해서도 늘 딜레마에 빠지는 이유는, 바로 세상적 기준에 따른 "신정론" 속에서 바라보고 움직이기 때문이다. 다윗은 달랐다. 그는 세상과 싸울 준비가 되어 있는 "세상과 다른 중심의 사람"(삼상 16:7)이었다. 악과의 투쟁은 곧 "중심"으로 싸우는 것이다. 여기에 승리의 일차 비밀이 있다.

3. 다윗은 세상 왕들과 다른 왕이었다

다윗은 분명 왕이었다. 그는 헤브론에서 유다 사람들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았다(삼하 2:1-4). 사실 그는 세 번이나 기름 부음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세상의 왕들과 전혀 다른 왕이었다. 그의 싸움은 단순히 홀(Scepter)을 가지려는 주도권 다툼이 아니었다. 그는 늘 여호와 하나님께 길을 물어 움직인 세상 지도자였다. 다윗은 여호와께 길을 물어 헤브론으로 가고 기름 부음을 받았다. 이후 근 칠 년 반 동안 유다 지파를, 삼십삼 년 동안 모든 히브리 지파를 통치한 왕이었다. 즉 그는 도합 40년간 이스라엘의 실제적 왕이었다. 성경에서 40이란 숫자는 늘 연단과 시련과 훈련을 상징한다(참조: 노아 홍수 시 40주야간 내린 비, 모세의 금식 40일과 유랑 40년, 예수님의 40일 금식 등). 표면적으로 40년의 다윗 통치 기간은 열두 지파를 통합시키기 위한, 블레셋과 가나안 등 이웃 이방 족속들과의 군사적 충돌의 기간이었다. 다윗은 유다 땅 헤브론을 거쳐 여부스 곧 오늘날 예루살렘으로 알려진 시온의 산성("다윗의 성읍")을 가나안 여부스인들에게서 빼앗았다(삼하 5:6-9).

군사적 충돌만이 아니었다. 왕으로서 다윗은 하나님의 언약을 알고 있었다. 이 언약은 근본적으로 (예수의) "피"와 관련되어 있다(마 26:28, 막 14:24, 눅 22:20, 고전 11:25). 신앙의 문제에 무관심했던 "사람의 마음에 합한 왕 사울"과 달리, 언약궤에 대한 다윗의 관심은 그가 단순한 왕이 아닌 "하나님의 언약을 이해한 언약의 임금"임을 보여 준다. "언약궤"를 안치하고 (피의)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고 모든 백성을 축복하고 기뻐 춤춘 다윗을 보라(삼상 6:12-17)! 언약을 이해 못해 남편의 "언약 신앙"을 업신여기고 천하다 조롱하여 죽는 날까지 자식을 갖지 못한, 다윗의 아내요 사울의 딸인 미갈과 비교되는 장면이다(삼하 6:12-23).

비록 궤는 예루살렘에 안치되었으나 여전히 휘장(tent) 안에 있었다. 다윗은 보다 더 원초적 하나님의 뜻(예수 언약)을 알고 있었던 왕이었으므로, 이 언약궤를 안치할 적절한 건물을 준비하려 한다. 하지만 나단 선지자는 이 영원한 성전은 "샬롬의 왕"이 짓게 될 것임을 다윗에게 알려 준다(삼하 7:1-17). 이렇게 다윗의 후손으로 인해 다윗의 집은 영원히 서게 될 것이다(삼하 7:13). 하지만 보이는 성전인 '솔로몬의 성전'은,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영원한 "샬롬의 왕" 예수의 모형이었을 뿐이었다.   

4. 다윗은 세상 예언자들과 다른 선지자였다

다윗은 단순한 왕이 아니었다. 그는 선지자였다(행 2:30). 다윗이 선지자라는 것은 조금 새롭다. 하지만 성경은 분명 그가 선지자였다고 말한다. 그것도 "하나님의 눈동자" 같은 선지자였다. 다윗이 선지자였다는 놀라운 사실은 주로 신약 시대에 입증된다. 심지어 다윗은 그리스도와 자신의 부활까지 내다 본 선지자였다(행 2:25-35). 죽어서 장사되고 하늘로 올라간 본 적이 없는 다윗이 어떻게 이 사실을 알았을까(행 2: 29)? 다윗은 항상 주 앞에서 하나님을 만난 모세와 같은, 계시를 친히 받은 선지자였던 것이다(행 2:25)! 심지어 다윗은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를 배반한 유다의 죽음까지 예언하였으며(행 1:16), 자신의 후손으로 올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주"라고 고백한, 시간을 초월한 놀라운 선지자였다. "시간"에 묶여 다양한 "시간"의 이슈 안에서 우리 인간들이 오락가락하고 티격태격하는 것과 비교하여, 다윗은 얼마나 탁월한 초월을 알던 선지자였던가! 사도 바울은 이 다윗에 대해 "믿음으로 값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은 사람의 행복에 대해서까지 잘 알고 선포한 선지자"였다고 말한다(롬 4:6-8). 다윗이 본 이것은, 세상의 지식과 완악한 눈으로는 절대 볼 수 없는 생명의 진리였다(시 69:22-23; 롬 11:9-10). 다윗의 열쇠를 가진 빌라델비아 교회에는 책망이 없음에 주목하라(계 3:7).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겼다(계 5:5). 예수는 성경의 마지막 책 계시록의 마지막 22장에서 자신의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별이라 하였다(계 22:16). 그분의 마지막 말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계 22:20)였다. 이렇게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마 1:1)께서 재림하시면 영원한 다윗의 왕좌에 앉으실 것이다(사 9:7, 눅 1:32, 행 2:30). 

5. 다윗은 '밧세바의 일'을 제외하면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였다

사람은 누구나 완벽하지 않다. 시행착오를 범하면서 성숙해 간다. 다윗도 그랬다. 다윗도 우리와 같은 심령을 가진 자로, 연약함 속에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그의 삶은 밧세바의 일 뿐 아니라 시대적 악함에 그대로 노출됐다. 다윗의 일부다처나 인구조사 문제(대상 21:1, 대상 2:17)를, 성경은 다윗 자신의 악함보다 사단이 구축한 인류의 악한 사회적 구조 속에서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다윗은 밧세바의 일을 제외하면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였다.

히브리어 '다위드'는 "사랑"이라는 의미의 어근에서 왔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다윗은 요셉처럼 완벽해 보이지 않는다(물론 요셉은 완벽한 사람이라는 의미가 아님). 요셉처럼 사람을 온전히 용서하고 사랑하지는 못하였다. 하지만 다윗은 친히 하나님께 용서받고 사랑받은 사람이었다. 인간은 누구나 죄인이다. 하나님 앞에 죄 없다 누가 자랑할 수 있단 말인가. 따라서 죄를 짓지 않는 것이 자랑거리가 아니다. 진리 앞에 진실한 사람이 복되고 강하다. 다윗은 진실한 마음으로 죄를 고백한, 참된 회개의 사람이었다(시 51편).

6. 다윗은 세상과 싸움의 도구가 전혀 달랐다

싸움은 당연히 그 대상과 해야 한다. 또한 싸움에는 도구가 반드시 있다. 하지만 세상과 다른 싸움을 시작한 다윗의 싸움 도구는 당연히 달랐다. 다윗은 이 싸움은 근본적으로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이 시험은 간단하지 않으나, 그 치열한 싸움에서 용서와 사랑의 방식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대항하고 싸워 이겨야 한다. 성문 밖으로 나가 그 치열한 골고다 싸움에서 승리하여야 한다. 그때 고통의 의미도 알게 되고 고통의 유익도 알게 된다. 고통은 피하고 싶은 실재이나 고통을 당해 본 사람은 누구나 떳떳하게 말한다. 그것이 힘들기는 하나 무익한 체험은 결코 아니었다고. 다윗도 당연히 죄인이었다. 충성스러운 장수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취한 것은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죄악이요, 그 대가는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다윗이 우리아와 밧세바에게 행한 일에 대한 선지자 나단의 지적은, 다윗의 평생 야전(野戰)과 비길 수 없는 엄청난 심적 고통을 선물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무익한 것은 아니었다. 하나님은 밧세바의 일을 제외하면 "다윗은 내 마음에 합한 자"라고 인정하셨다.

다윗과 심성이 다를 바 없는 우리들은, 단순히 용서와 사랑만 외치는 요셉의 방식이 아닌, 어떻게 악과 싸울 것인지 다윗의 모범에서 그 전술전략을 찾아내고 실천해야 한다. 즉 시편에 나타난 다윗의 승리에는, 단순한 전쟁 선포와 전면전이 아닌 여러 가지 다른 요인들이 있었음을 알게 된다. 그 싸움의 도구는 놀랍게도 다양했다. 주로 시편에 다윗의 그 속마음과 내용이 전해진다(최소 시편 73편 이상이 다윗의 작품이다). 다윗은 시편의 기도를 통해 시련 중 하나님의 도움과 보호(시 3-6, 12-13, 70 등), 영적 소망(시 7장), 자연의 주관자 찬양(시 8장), 하나님을 향한 신앙과 소통(시 11), 순결(시 101), 은혜(시 103), 확신(시 108), 메시야의 통치(시 110), 샬롬(시 122), 신뢰(시 131) 섭리와 언약(시 132), 감사(시 138), 사랑(시 145), 악에서의 탈출(시 141) 등 다양한 요소들로 이 영적·육적 싸움에 나섰다. 그가 이렇게 세상과 전혀 다른 도구를 가지고 담대하게 싸움에 나설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자신의 정직함을 들으시고 부르짖음에 주의하시며 공평함을 살피시고 변호하실 것이며 신실하심을 확실하게 믿었기 때문이다(시 16-17편). 하나님은 기이한 인자였다(시편 17:6-12). 인생의 광야 나그넷길과 악과의 투쟁에서 그의 날개 그늘은 영원한 안식을 준다(시 36, 57, 61편 참조). 누가 다윗과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으리요(롬 8)! 여기에 승리의 비결에 있다.

반면에 요셉이 벌인 악과의 투쟁은 단순한 도구였다. 요셉은 오직 하나님의 지혜와 사랑 속에서 선으로 악을 이겼다. 하지만 공의의 싸움은 다르다. 좀 더 치열하고 조직적이며 종합적이다. 믿음과 구원은 단순하다. 하지만 믿음과 구원에 이른 인간은 단순하지 않다. 마치 다윗과 같은 광야의 전쟁터에 놓인다. 이 싸움은 인생 여정 속에서 종합적 전면전인 것이다.

이 싸움도 결국 근본적으로는 세상 능력의 싸움이 아니라, 언약을 가진 자(출애굽 도성)와 언약을 모르고 무시하는 자(애굽 도성)의 싸움이다. 시편 89편은 그리스도의 언약 아래 있는 다윗의 영광을 보여 준다(Augustinus, De Civitate Dei, 17.9. 여기서 어거스틴은 히브리 성경 시편 89편을 라틴어 사본을 중심으로 88편이라고 소개하고 있음에 유의할 것). 애굽을 살해당한 자처럼 박살낼 수 있는 분은 모세나 다윗이 아니라, 다볼산과 헤르몬 산을 만드신 분이다. 이 전투를 지휘하고 악인에게서 다윗을 지켜 주시는 분은 다윗 자신이 아닌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다윗은 기름 부음 받은 자요,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요, 그의 후손들까지 복에 복을 받을 것이고, 그에게서 하나님의 사랑과 진실은 결코 떠나지 않는다. 그렇게 다윗은 승리하며,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위대한 왕이 되었던 것이다.

조덕영 박사는

환경화학공학과 조직신학을 전공한 공학도이자 신학자다. 한국창조과학회 대표간사 겸 창조지 편집인으로 활동했고 지금은 여러 신학교에서 창조론을 강의하고 있는 창조론 전문가이기도 하다. 그가 소장으로 있는 '창조신학연구소'(www.kictnet.net)는 창조론과 관련된 방대한 자료들로 구성돼 목회자 및 학자들에게 지식의 보고 역할을 하고 있다. 이 글 역시 저자의 허락을 받아 연구소 홈페이지에서 퍼온 것이다. '기독교와 과학' 등 20여 권의 역저서가 있으며, 다방면의 창조론 이슈들을 다루는 '창조론 오픈포럼'을 주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