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릭사이드 교회 김칠곤 목사
(Photo : 기독일보) 크릭사이드 교회 김칠곤 목사

사람들이 관계와 외부적인 요인에 의해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고 화가나면 흔히 쓰는 말이 있는데 그 말들은 "뚜껑이 열리는 것 같다.", "멘탈의 붕괴가 일어난다.", "다시는 이야기 하고 싶지 않다." 이러한 말들이 주어지는 요인들을 찾아 본다면 그것은 외부에서 주어지는 스트레스에 의한 것이다. 예를 들자면, 이러한 것들은 부부간의 갈등 속에서 주어지기도 하고, 자신이 계획한 날짜에 맞추어 일을 끝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는 경우이다. 그리고 자녀들이 부모가 바라는데로 움직여 주지 아니할 때 마음속에서 분노가 일어나 자연스럽게 입속에서 튀어 나오는 말들이다. 또 다른 것은 자신이 공공 장소에서 실수한 것에 대해 수치감이 주어질 때 이러한 말을 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이런 말들을 하는 사람들의 심리를 분석해 본다면 건강하지 못한 부정적인 감정들이 들어나게 되는데 그러한 것들은 " 분노", "심한 괴로움", " 죄 의식". "우울함", "무가치함", "부끄러움" 과 같은 것들이다. 이와 반면에 건강한 부정적인 요인들은 " 다시 생각하고", "후회", "실망", "행동한 것에 대한 뉘우침"과 같은 것들이다. 이러한 두 가지의 원칙들은 인간이 사람들과 환경속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받아들이는데 있어 감정으로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이것을 체계적으로 형성해 놓은 사람이 알버트 엘리스 심리학 교수이다. 그가 말한 원리는 A, B 그리고 C 이다. A는 일어난 사건들에 관한 것이며, B는 그것에 대해 자신이 말을 하는 것, C는 자신이 말을 한 것에 대한 감정을 계속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외부에서 주어지는 스트레스를 받아들이는 심리적인 반응을 표현하는 공식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이 일어나는 것은 주로 그 사람과 가까이 사는 사람들과의 관계 가운데 주어지는 것이다. 이것으로 볼때 아리스토렐레스가 말하는 것처럼 "인간은 천성적으로 사회적(정치적)인 동물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이 살아가는데 수 많은 어려움들이 많지만 그 중에 가장 어려운 것 중에 하나를 든다면 필자는 사람과의 관계형성이라고 본다. 그것은 가정속에서 주어진 부부의 관계 그리고 더 나아가 자녀와의 관계형성이다. 부부와 자녀와의 관계형성에 갈등이 주어지는 것들의 요인을 구체적으로 바라본다면 지나친 "기대감과 소유"에 관한 인식이 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요인들은 어느 부분에 있어서 필요하지만 그것이 도에 지나칠 때에는 서로가 불신감을 가지게 될 뿐 아니라 마음에 분노를 표현하게 하는 불씨가 될 수 있다. 이것에 대한 예를 필자의 삶을 통해 경험한 것을 제시하고자 한다. 한국에서 공부하는 대학교 3학년인 아들과 함께 필자는 아들의 학업, 신앙생활, 여자 친구와 관계형성 그리고 미래의 진로에 관한 것들을 전화로 자주 대화를 나눈다. 아들과 대화를 하다보면 기분이 너무나 좋고 믿음을 가지고 열심히 살아가는 아들이 대견하고 자랑스럽게 느껴지는 적이 많다. 그러나 대화의 모든 것이 좋은 것 만은 아니다는 생각이 들 때도 많다. 그것은 대화 가운데 나 자신도 모르게 자식이 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지나친 기대감을 가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와 더불어 자식에게 부여하는 것은 부모의 시각에서 계속적으로 자식을 통제하고 판단하고 잘못된 것을 반복해서 지적한다는 사실이다. 자식에 대한 지나친 기대감 그리고 자식을 마음대로 통제하려고 하는 것은 "부모의 눈높이"에서 자식을 일방적으로 코치 하려고 하는 것에 기인된 것이다. 부모의 눈높이가 높으면 높을 수록 자식들은 마음에 상처를 받게 되고 대화를 나눈다는 것이 피곤하게 된다. 이러한 현상은 이미 서로에 대한 신뢰감이 상실 되어 가고 있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필자도 가끔 이러한 것들을 경험하게 되고 마음에 상처를 받은 아들에게 그가 품은 마음의 소리를 듣게 된다. " 아빠! 나도 생각하고 살아요", "나에게 훈계 보다는 잘했다는 격려를 듣고 싶어요", "비록 마음에 들지는 않겠지만 저의 말을 들어 주세요"이러한 말을 통해 나 자신을 바라 볼때 마다 문득 문득 드는 생각이 있다. 그것은 바로 어느덧 청년이 된 아들을 아직도 어린아이로 생각을 한다는 것과 자식을 항상 나의 눈높이에서 바라본다는 것이다. 그렇다 보니까 자녀에게 지나친 간섭을 하게 되고 객관적이고 올바른 코칭을 해주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으로 볼때 자신의 삶을 추구하는 자식의 인격과 성품을 존중하지 못하고 통제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불필요하게 분노를 일으킬 수 있으며 그것으로 인해 관계의 상실이 주어질 수 있다. 좋은 관계형성이라는 것은 상호간에 희생하고 서로를 존중하는 것이라고 본다. 이와 반면에 지나친 간섭은 오히려 서로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다.

이것을 위해 때로 가까운 사람들과의 좋은 관계의 형성을 위해서는 "침묵의 대화", 즉 시간을 두고 "자식을 지켜보는 지혜"가 필요하다. 그렇다면 자식을 지켜보는 지혜는 과연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하는 가? 잠언 10장 19절에서 말하기를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하기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 이말은 말을 하려고 하지말고 들으려 하고 적절한 시간에 필요한 말을 하라는 것이다.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에 있어서도 이러한 지혜가 필요하다. 자식을 올바르게 가르쳐야 하지만 때로는 그들이 무슨 생각에서 행동을 했으며 그들이 반응을 보이는 것에 대해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해야 한다. 다른 한 가지는 예수님이 마태복음 18:3-4절에서 말한 말씀을 적용하는 것이다. "3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4그러므로 누구든지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이말은 겸손한 마음으로 어린아이를 소중히 여기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겸손은 어떻게 주어지는 것인가? 이것은 부모가 자식을 바라보는 것을 소유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로 여길때 겸손한 마음이 주어지는 것이다. 이것으로 볼때 부모가 자식을 키우는 것에도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고 볼 수 있다. 만일 부모가 계속적으로 성장해 가는 자녀를 지나친 기대감과 자신의 의지대로 통제하 하기 위해 계속적으로 잔소리를 한다면 부모가 죽을 때 끝나게 된다. 이러한 관계는 부모와 자식간에 관계 단절이 주어질 뿐 아니라 마음속에 진정한 나눔을 가질 기회를 점점 상실하게 한다. 자식과 사랑의 관계회복을 바란다면 분명 자식을 바라보는 시각이 바뀌어져야 할 뿐 아이라 자식의 인격을 소중히 여기고 그들이 성장하는 삶을 믿음으로 지켜 보는 지혜가 필요하다. 인격의 하나님 아버지도 자녀가 잘 못할 때 채찍으로 명령하시기 보다는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통해 스스로의 잘못한 부분을 뉘우치고 성숙한 인격으로 살아가는 것을 지켜 보신다. 그래서 하나님은 놀라우시고 은혜가 많으시며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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