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수 목사
(미주장신대 전 총장)

1907년 평양에서 시작된 대부흥운동의 기수는 길선주 장로였고, 그에 대해 이력은 지난 호에 상세히 기록했다.(부흥 운동 다시 길선주는 평양 장대현교회 장로였다. 그해 6월에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고, 그 해 9월 새로 조직된 독(립)노회에서 첫 졸업생 6인과 더불어 한국인 첫 목사로 안수됐다. 따라서 부흥운동 시는 장로였다는 점을 기억해 주기 바란다.) 기왕 불이 붙은 부흥회는 길선주 장로에 의해 더욱 크게 일어났다. 그의 설교는 많은 사람을 사로잡았다. 길 장로가 설교할 때 현장에 있었던 정익로(鄭益魯) 장로는 다음과 같이 당시의 정경을 기록하였다.

“처음부터 길[선주 목사]의 얼굴은 아니었다. 그는 한때 완전 소경이었고, 당시력도 극도로 약화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위대한 권위와 권세로 차있었다. 그의 얼굴은 순결과 거룩함으로 불타고 있었다. 그는 길 목사가 아니었고 바로 예수님이었다. 그는 세례 요한에 대해 말하였다. 그리고 세례 요한이 어떻게 사람에게 회개하라고 외쳤는지를 말하였다. 빠져나갈 길이 없었다. 하나님께서 부르고 계셨다. 과거에 경험해 보지 못했던 무서운 죄악들이 우리들 앞에 쏟아져 나왔다. 어떻게 이것을 떨쳐 버릴 수가 있으며, 어떻게 도피할 것인가 하는 것이 큰 의문었다. 오, 하나님, 저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겁니까?……이 영감이 내리는 순간 길 장로는 무리들에게 세례 요한과 같은 존재였다. 회개하라고 외치는 소리는 무리들게 던져지는 소리였다. 그리고 그들은 회개할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이렇게 떨어진 성령의 불길은 참석한 모든 사람의 마음을 태우고 더욱 확산되었다. 정월에 평양에서 시작된 부흥의 불길은 2월에 각 급 학교가 개학을 하면서 여러 학교로 퍼져 나갔다. 숭실전문과 숭실중학교, 숭덕중학교, 광성중학교와 숭의중학교 학생 약 2,500명 사이에 급속히 확산됐다. 심지어 초등학교 학생들까지도 부흥운동에 동참하여 회개하는 놀라운 광경이 전개됐다. 학생들은 수업을 중단하고 사경회에 참석하였으며 3월에는 장로교회 부인 사경회가 12일간 열렸는데, 이때도 성령의 뜨거운 역사가 일어나 모든 참석자들이 성령 체험을 했다. 4월 초에는 평양 장로회신학교 학생들이 3개월 만에 개강하는 수업을 하기 위해 학교에 모였다. 이 때 교수(선교사)들은 학생들을 위하여 특별 사경회를 열었다. 이곳에서도 마찬가지로 강한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서 학생들이 참회의 눈물을 흘리고 새로운 각오로 사역자로 훈련 받았다. 한 선교사는 “장차 한국교회의 목회자가 될 이 사람들은 성신의 불로 그들의 죄가 모두 태워져 버림을 체험하였다.”고 술회했다. 일찍이 남장로교회 선교사 레널즈(W. Reynolds)가 “신학을 수업하고 목사가 되려는 사람은 성령의 사람이 돼야 한다. 그는 성령 체험이 있어야 한다.”고 규정했는데, 그의 말대로 신학생들이 성령 체험을 한 것이다.

평양에서 시작된 이 부흥의 불길은 전국으로 펴져 나갔다. 선교사 하디(W. Hardie), 져다인(J. L. Gerdine), 그리고 길선주 장로 등이 전국을 누비며 교회가 있는 곳은 어디에서나 부흥사경회를 열었고, 성령의 강한 역사가 도처에서 일어났다. 길선주 장로가 서울에서 사경회를 인도하여 큰 은혜가 내린 사실을 「장로회사기」(長老會史記)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평양교회 길선주 장로가 경성에 내(來)하야 경기도 도사경회(都査經會)에 성신 도리(道理)를 교수할 시에 성신의 감동을 받아 각기 죄를 자복하고 애통하며 중생의 세례를 밧앗고 열심으로 전도하야 도내 각 교회가 크게 부흥하니라.” 그래험 리(G. Lee) 선교사는 선천으로, 헌트(W. B. Hunt)는 대구, 스왈른 (W. L. Swallen)은 전남 광주로 가서 동일한 성령이 역사하는 힘 있는 집회를 계속 개최하였다.

부흥운동이 한창 전개되던 1907년, 세계 YMCA 총무였으며 후에 세계기독학생연맹의 의장이었고, 세계 에큐메니컬운동의 지도자인 존 모트(J.R.Mott) 박사가 한국을 방문했다. 그는 한국 교회를 둘러보고 나서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근래 내가 극동을 순방하고 나서 나는 깊은 확신을 얻게 되었는데 만일 한국에서 현재 진행되고 있는 선교부의 협력 사업이 계속되고, 또한 가까운 장래에 확대된다면, 한국은 비기독교 국가권에서 처음으로 기독교 국가가 될 것이다. 내가 알기로 한국에서보다 더 크고 놀라운 선교의 결과가 나온 선교지는 없었다.”

모트는 한국 교회가 부흥 열기에 젖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교인들의 숫자와 모든 교인들이 하나같이 열정적으로 전도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는 한국의 복음화가 눈앞에 와 있음을 확신했고 한국이 피선교 국가 중 최초의 기독교 국가가 될 것을 예견하였다. 그가 와서 보았던 상황은 적어도 그런 생각과 확신을 갖게 할 만큼 무르익어 있었다. 남장로교회 선교사 아나벨 니스벳(A. M. Nisbet)도 한국이 이 세대 안에 복음화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언급한 일이 있다.

그러나 사실 모트 이전에 이런 말을 한 사람은 만주에서 선교하면서 의주 청년들과 더불어 성경을 번역하고 복음을 선포했던 존 로스(John Ross)였다. 그는 대부흥운동이 일어나기 거의 10여 년 전에 “한국은 동양의 국가들 중에서 기독교 국가가 되는 첫 나라 중 하나가 될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이 부흥의 열기는 중국에까지 퍼져 나가 만주 지방에서 일하던 중국 교회 목사들이 평양에 와서 부흥회에 참석했다. 그들은 이곳에서 은혜를 받아 본국에 돌아가 부흥운동을 주도하였다. 이 부흥의 열기는 심양, 요양, 만주, 그리고 북경에까지 확대되었다. 장구한 세월동안 우리나라는 중국으로부터 모든 것을 배우기만 했다. 그러나 이제 우리 민족이 복음과 부흥을 그들에게 가르칠 수 있는 위치에 놓였다는 것은 실로 가슴 벅찬 하나님의 은혜가 아닐 수 없다.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은 실로 한국교회 부흥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사건이라 말해야 한다. 역사에서 “만일”(if)란 말을 쓰지 않게 되어 있지만, 만일 이 부흥운동이 없었다면 한국교회 성장은 크게 지연됐을 것이고, 교회는 여전히 미약한 상태에서 생존을 위한 투쟁에 힘겨워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로부터 3년 후 일제의 한반도 강점과 더불어 조선왕조의 맥이 그치고, 혹독한 일제의 철권통치 시대로 넘어 갔기 때문이다. 이 부흥운동은 이런 박해 기간을 견인(堅忍)할 수 있는 영적 힘을 마련한 전기가 됐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