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봉호 장로가 충현선교교회에서 '고통과 위로'라는 제목으로 강연하고 있다.
손봉호 장로가 충현선교교회에서 '고통과 위로'라는 제목으로 강연하고 있다.

한국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의 설립자이자 고신대학교 석좌교수인 손봉호 장로가 지난 6~9일 LA 소재 충현선교교회(담임 민종기 목사) 창립 30주년 집회에서 네 차례 강연했다. 손 장로는 강연에서 “고난 받기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받은 사람은 절대로 후회하지 않는다”며 “그것은 엄청난 무기이자 자원”이라고 강조했다. 1938년 경북 포항에서 출생한 그는 서울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에서 신학 석사, 암스테르담자유대학교 대학원에서 철학 석·박사를 받았다. 나눔국민운동본부, 푸른아시아, 샘물호스피스선교회 등 10여개 단체의 이사장을 맡아 시민운동의 길을 애오라지 걷고 있다. 다음은 8일 고린도후서 1장 1~7절을 말씀을 읽고 ‘고통과 위로’라는 제목으로 행한 강연 내용 요약.

“행복 있지만 고통 역시 당하는 인생
질병, 배고픔, 장애 등 견디기 힘들어
자식의 죽음은 가장 가슴 아픈 시련”

“기독교, 고통의 이슈 심각하게 취급
십자가의 가혹한 고난 받으신 주님
힘든 사람들 곁에 찾아오사 위로”

오늘의 주제는 고난, 고통입니다. 사람들이 별로 듣고 싶어 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꼭 필요하기에 강의합니다. 20여년 전 미국의 신학자가 미국교회에 대해 쓴 책에서 “미국의 목사님들은 성도로 하여금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게 하는 대가로 사례를 받는다”라고 심한 비판을 한 적이 있습니다. 무서운 말입니다. 그의 의도는 성경이 가르치는 하나님은 축복, 기쁨, 위로의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진노의 하나님이시기도 하며 예수님께서는 고난의 십자가를 지신 분인데, 그것을 얘기하지 않고 교인들을 즐겁게 하는 설교만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의 교회는 고통의 문제를 별로 다루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사람은 그래서는 안 됩니다. 수년전 저는 1996년 ‘고통받는 인간’이란 책을 쓴 적이 있습니다. 오늘날 철학자들은 물론 신학자들도 이런 주제의 책을 거의 내지 않습니다.

저는 고통을 아주 많이 겪어본 사람은 아니지만 밀알장애인 복지운동을 하면서 그것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1970년대 공부를 마치고 귀국해 보니 많은 지성인들이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을 위한 민중운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보니 가장 차별 당하는 사람들은 장애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이야말로 정말 억울하고 힘든 삶을 사는 이들이었습니다. 저는 가장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정의라고 여기고 그 운동에 가담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인생에는 기쁨, 사랑, 축복, 행복이 있습니다. 그러나 고통, 고난, 어려움 역시 있습니다. 기쁨, 사랑, 축복, 행복에만 관심을 가지면 우리의 사고방식, 생활, 신앙이 피상적이 되어 버립니다. 나의 것이든, 다른 사람의 것이든 인간의 고난과 고통에 관심을 갖고 아파해 보아야 삶에 깊이가 생깁니다. 불교는 삶 전체를 고통이라고 부르며 그것을 중심으로 한 종교입니다만, 기독교도 고통을 많이 언급합니다. 욥기 5장 7절, 14장 1~2절이 대표적입니다. 우리는 다 아파 봤지만 그 정도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저는 호스피스선교회 이사장으로 섬기고 있습니다. 희망이 없는 말기암 환자들은 참 힘듭니다. 우리 단체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많이 오는데 그들은 아픈 것도 서러운데 시간이 지나면서 가족들로부터 ‘빨리 안 죽나’ 하는 시선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저는 일하는 분들에게 “이분들을 최고로 대우해 주세요. 인간적인 대접을 받고 돌아가시게 해 주세요”라고 부탁합니다.

저명 기독교 문필가인 C.S. 루이스는 부인이 암으로 죽은 뒤 쓴 ‘A Grief Observed’(내가 관찰한 슬픔)라는 책에서 하나님을 ‘Cruel Vivisector’(잔인한 생체해부자)라고 불렀습니다. 경건한 그가 부인의 고통이 얼마나 견디기 어렵게 보였으면 그랬을까요? 육체적 고통이 얼마나 힘듭니까? 사고로 전신마비가 되었거나 뇌성마비에 걸린 사람은 억울함과 열등감 때문에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배고픔도 육체적 고통 중 하나입니다. 저는 일정시대 때 태어나 소나무 껍질과 칡뿌리를 씹어 먹어 보았습니다. 그래서 누군가 굶는다는 소리를 들으면 눈물이 납니다. 곧 귀국하면 기아대책기구의 이사장으로 취임하는데 나이 80이 가까워 또 무슨 이사장이냐며 주저하다 그래도 굶는 사람을 먹여하지, 하는 마음에 결국 맡았습니다. 저는1960년대 초반 100달러를 들고 미국에 유학 와 타자기를 사는 데 62달러를 쓰고 38달러만 남았기 때문에 첫날부터 일을 했습니다. 1학년 때 2등을 했지만 자존심 때문에 학비 외의 장학금은 안 받으려고 풀 깎기, 접시 닦기 등 정말 힘든 일들을 다 해 보았습니다.

자기가 고통받는 것보다 더 힘든 것이 사랑하는 사람이 고통받는 것입니다. 유학 후 의료수준이 떨어지는 한국에 온 뒤 의사로부터 태어난 지 두어달 된 딸이 심장병으로 곧 죽을 것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날부터 네덜란드 병원에서 “괜찮다. 수술 안 해도 된다”라는 말을 듣기까지 5년 동안 너무 고통스러웠습니다. 죽을 아이를 데리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요. 제 일생에 가장 암담한 5년이었지요. 서울 의대 다니던 외아들을 먼저 떠나보낸 소설가 박완서는 ‘한 말씀만 하소서’라는 책에 “참척(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죽는 일)을 당한 어미에게 하는 조의는 아무리 조심스럽고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위로라 할지라도 모진 고문이요, 견디기 어려운 수모”라고 썼습니다.

고통은 그 자체로도 힘들지만 그것이 아무 의미 없어 보인다는 점에서 더욱 힘듭니다. 시편에는 왜 못된 사람은 잘 되고 의인은 고통당하나 하는 불평이 많습니다.

기독교는 결코 고통을 가볍게 보지 않습니다. 아니, 굉장히 심각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종교입니다.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로마 철학자 키케로는 "십자가라는 말조차도 로마 시민의 입뿐 아니라 그들의 생각, 그들의 눈, 그들의 귀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 정도로 가혹한 형틀이었습니다. 인류가 만들어낸 가장 잔혹한 형틀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 가죽 끝에 쇳조각이 붙어 있어 때리면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채찍에 맞으셨습니다. 억울한 재판을 받으시고 가룟 유다, 베드로, 자신을 환영하던 군중으로부터 배신을 당하셨습니다. 그런 정신적 고통 때문에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부르짖으셨습니다.

왜 예수님이 고통을 당하셨을까요. 참 신기한 이야기입니다. 인류가 고통을 받는다면 구세주는 그것을 다 없애주셔야 되는데 기독교는 참 특이한 종교입니다. 고통 중에 있는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주님께서 우리보다 훨씬 더 큰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우리는 그것은 대속의 죽음임을 압니다. 하지만 거기서 우리가 한 가지 간과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은 고난 당하는 우리를 위로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한국이 배출한 가장 뛰어난 신학자인 한철하 박사는 서울 사대를 다니던, 나중에 대를 이어 신학자로 만들고 싶어 했던 3대 독자를 심장마비로 천국에 보냈습니다. 아세아연합신학원에서 함께 일하던 저는 매일 찾아가 그분을 위로했습니다. 나중에 그분이 “그때 참 고마웠지만 하나도 위로가 안 되더라. 그런데 언더우드 박사가 위로하니 위로가 되더라”라고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언더우드 박사는 아들을 잃어본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해 봅시다. 여러분이 행복해지시길 바라지만, 슬픔, 괴로움, 아픔이 있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꼭 기억하실 것은 예수님은 아신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여러분 옆에 앉으셔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얼마나 슬픈지, 아픈지, 억울한지, 비참한지 안다. 내가 겪어보지 않았느냐.” 여러분, 예수님으로부터 위로받으시기 바랍니다.

뇌성마비로 몸이 뒤틀리고 말도 제대로 하기 힘든 송명희 시인은 ‘공평하신 하나님’이라는 시를 지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말도 안 되는 고백이 나옵니까? 예수님을 진정으로 만난 그는 예수님이 와서 위로하니까 자기는 너무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그는 고통을 당했기에 고통 당하신 예수님과 동지의식을 느끼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가까이 있음을 알기 때문에 너무너무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송명희 시인을 위로하시듯, 고통 당하는 우리도 다른 사람을 위로할 수 있습니다. 고통은 엄청난 무기이자 자원입니다. 자기의 아들을 잃어본 사람이 아들을 잃은 사람을 위로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너무 힘들 때 낙심하지 마십시오. 어떤 의미에서는 감사하십시오. 다른 사람에게 효과 있는 위로를 해 줄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특권입니다. 너무도 아름다운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