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저지 가나안교회 최성남 목사가 그동안 지속돼 왔던 UMC 총회제자훈련부 재직 당시의 공금 유용 오해와 관련한 혐의를 최근 완전히 벗어 주목된다.

그동안 제기돼 왔던 문제는 최성남 목사가 2006년부터 4년간 UMC 총회제자훈련부 아시아/태평양 사역디렉터로 근무할 당시 소수민족에게 할당된 교단지원금에 대한 일부 유용이 있었다는 것으로, 최근 검찰 조사 결과 유용이 아닌 한인교회들을 돕기 위한 과정에 불가피하게 발생한 목적 외 기금 사용이었던 것으로 밝혀진 것이다.

그 결과 최근 UMC로부터 자체 감사 결과를 넘겨받은 네쉬빌 검찰은 최성남 목사에게 아무런 형사적 혐의를 부과하지 않고, 다만 최성남 목사가 총회제자훈련부 한인디렉터로 있을 당시 소수민족 지원기금 중 한인 사역을 돕기 위해 용도 외에 사용된 것으로 지적된 $37,000에 대해 책임자로써 도의적 책임을 지고 배상할 것을 UMC측과 합의하도록 했다.

사건을 맡은 검찰측에서 사건 고발 당사자와 합의하도록 했다는 사실은 최성남 목사의 혐의가 형사 처벌 수준에 이르지 않는 민사간의 문제라는 의미로 실제로 이번 사안에 대한 최성남 목사의 개인적 유용은 전혀 없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최성남 목사가 디렉터로 있을 당시 소수민족 지원기금이 목적 외에 사용된 배경에는 한인교회들이 다른 소수 민족과 달리 영문 사업계획서와 영문 예산서 등의 영문 서류 작성을 어려워한 것이 원인이 됐다. 최성남 목사는 언어의 문제로 예산을 지원받지 못하는 한인교회들의 사정을 알고 직접 신청서를 작성하기도 했고 일부는 신청서 없이 지원금을 받은 경우도 있었다.

네쉬빌 검찰의 결론은 최성남 목사가 자신이 디렉터로 있을 당시 기금이 목적 외에 사용된 부분은 책임자로서 도의적 배상을 하라는 것이었으며, 이에 최성남 목사도 아무리 한인교회를 위한 일이었다 해도 기금이 전용된 것에 대해서는 죄송하다는 입장을 밝히고 배상에 합의한 상태다.

그동안 최성남 목사는 자신을 둘러싼 각종 의혹에도 특별한 대응을 하지 않고 지내왔다. 또한 의혹에 대한 특별한 소명의 기회를 받지 못했던 것으로도 알려졌다. 최성남 목사는 그동안 자신을 믿고 지지해준 이들과 가나안교회 성도들에게 감사하다는 뜻을 밝혔다.

이에 따라 최성남 목사는 그동안 자신을 괴롭혀 왔던 혐의를 완전히 벗게 됐다. 검찰 조사가 진행됐던 시기는 사순절로, 이 기간동안 최성남 목사가 전했던 설교 중 ‘광야의 영성’이라는 제목의 설교는 최성남 목사 개인과 가나안교회의 영적 정황을 잘 설명해주고 있어 주목된다.

최성남 목사는 당시 설교에서 고달픈 광야에서의 생활에 대해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이자 더욱 신앙이 깊어지는 자리”라고 정의했다. 최성남 목사와 가나안교회도 이러한 광야의 고난의 기간이 지나고 새로운 영적 도약의 시기를 맞고 있다. 다음은 최성남 목사가 3월22일 주일예배에서 전했던 설교 전문.

2015년 3월22일 최성남 목사 주일예배 설교

‘광야의 영성’(신명기 8:2-3, 마태복음 4:1-11)

성경에 자주 나타나는 장소의 이름이 있습니다. 특정한 예루살렘이나 베들레헴 같이 도시 이름이 나타나는 경우도 있지만 추상적이고 공간의 상황을 표현하는 장소도 있습니다. 성경에서 가장 많이 나타나는 장소, 공간으로서는 옥토도 아니고 푸른 풀밭 초장도 아니고 쉴만한 물가도 아닙니다. 광야입니다. 광야는 근본적으로 외롭고 고통스러운 곳입니다. 춥고 배고픈 곳입니다. 그렇게 외롭고 고통스럽고 위험한 곳인데 삶의 아픔과 고난이 있는 곳인데 그러한 가운데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이기도 함을 성서 곳곳을 통해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기에 내가 변화받고 내 한계와 내 부족함을 경험하고 궁핍함과 아픔과 상처를 경험하며 또한 외롭고 위험하고 나의 나약함을 경험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새롭게 만나는 곳, 그곳이 광야입니다.

성경의 구약과 신약에서 가장 부각되고 있는 광야가 각각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역시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서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전까지의 광야입니다. 시나이반도의 아라비아 사막의 연장선상에 있는 광활한 지역과 또 유대 광야로 가나안에 들어가기 직전의 네게브 사막같은 거칠고 위험한 곳입니다. 광야는 누구도 원하지 않는 곳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서 가나안으로 갈 때 그 광야길로 가게 됩니다. 해안길을 따라서 편안히 갈 수도 있는데 그 광야길로 나서게 됩니다. 그 위험한 길, 그 고난의 길, 그 외로운 길로 이스라엘 백성은 나아가게 됩니다. 왜 하필 광야로 갔는가를 출애굽기 13장 18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홍해의 광야 길로 돌려 백성을 인도하시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대열을 지어 나올 때에” 하나님께서 일부러 홍해를 돌아가는 광야길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 부분은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입니다. 선한 하나님께서 좋으신 하나님께서, 사랑이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400년 노예생활을 마치고 새롭게 하나님께서 약속한 땅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백성을 굳이 광야길로 인도하십니다.

오늘 첫 번째 본문 신명기 8장2절에서 3절은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길로 인도하셨는지 그 이유를 아주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2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의 선택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인도하셨다는 것입니다. 이유는 ‘너를 낮추시고’ 그리고 3절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길로 인도하신 분명한 이유입니다. 광야는 사막길입니다. 갈증 가운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통받고 양식이 없어서 굶주렸습니다. 광야길에 전갈을 만났고 불뱀을 만나서 물려 죽어가는 경험도 하였습니다. 외적의 침입을 받아 죽어 나가기도 했습니다. 광야길에서의 그들은 끊임없이 불평 불만하였고 분쟁하였고 신앙의 순수성을 잃어버리고 금송아지를 숭배하였습니다. 그들은 낙심과 좌절 그리고 절망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광야길에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 광야는 그들에게 연단의 과정이었지만 바로 그 연단을 통해서 노예족속에서 하나님이 택한 백성으로 다시 태어나게 됩니다. 그러기에 광야길은 그들에게 은혜이며 축복이었습니다. 광야 길은 그들에게 하나님을 만나 변화받는 삶의 자리였습니다. 비록 고난과 궁핍을 통해서 시험받았지만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광야 길로 인도하셨던 것입니다.

오늘의 두 번째 본문은 신약에서 가장 유명하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예수님의 광야시간입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 4장1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성령 즉, 하나님의 영, 하나님께서 광야로 이끌어 가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광야길로 인도해 내신 것처럼 우리 모두의 구세주인 예수님을 광야길로 인도하셨습니다. 광야로 나가신 예수님께서 시험을 받게 됩니다. 마태복음 4장3절은 예수님께서 받으신 첫 번째 시험에 대해서 이렇게 간단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네 주변에 무수히 널려있는 이 돌들로 돈이 되게 하고 재물이 되게 하고 우리가 추구하는 모든 것들로 풍성함이 있게 하라는 뜻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돈, 재물, 부귀영화의 문제가 돌이 떡덩이가 되기를 원하는 세태 가운데 살고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 시험은 5절 6절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 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의 손이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뛰어 내리면 죽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기적을 보여 너가 얼마나 위대하고 대단한 사람인지,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사람인지 보게 하라는 것입니다. 나를 나타내는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주목받으려는 마음 그리하여 모든 것의 중심이 되고자 하는 마음, 이러한 나 중심의 생각 역시 우리의 문화입니다. 예수님께서 받은 시험은 2000년 전에 광야길에서 받은 시험이지만 동시에 오늘날 우리의 삶의 문화이기도 합니다. 9절에 보면 “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힘과 권력에 대한 부분 이 모든 것을 너에게 주리라, 부귀영화를 얻기 위해서는 내가 중심이 되기 위해서는 사탄에게도 경배할 수 있고 악과도 타협할 수 있고 내가 가진 신앙의 순수성도 다 내려놓을 수 있다고 하는 사탄의 유혹입니다. 예수님께서 받으신 시험은 오늘날 우리가 매일 매일 직면하고 있는 삶의 문제이고 삶의 과제이고 시험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들을 거부하셨습니다. 그 모든 시험을 오직 말씀과 믿음으로 물리치고 계십니다. 자기 완성과 성취, 그리고 물질을 추구하는 문화 가운데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자기 부정,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하나님 중심의 삶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출애굽기의 광야와 예수님의 광야를 우리가 묵상할 때 우리는 똑같은 교훈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길로 인도하셨고 예수님을 광야길로 인도하셨습니다. 자발적인 선택이 아니었고 하나님의 의지가 개입되어 있었습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계획이 있고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노예 백성에서 하나님이 택한 백성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예수님도 광야생활을 통해 목수의 아들에서 하나님의 독생자, 구세주로 다시 태어나셨습니다. 그래서 광야는 고통의 기간이었으나 다시 태어나는 삶의 자리였습니다. 광야는 시험과 시련의 기간이었으나 새로워지고 변화하고 성숙되는 그런 기간이었습니다. 광야는 분명히 힘든 곳입니다. 우리가 살아 가면서 광야길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 광야길은 우리의 선택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아이러니가 있습니다. 가장 힘들고 가장 고통스러운 그 삶의 광야길에서 우리는 하나님밖에 의지할데가 없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의지하게 되고 하나님을 다시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다시 생각해야 할 때가 바로 광야에서인 것입니다.

한국에 체험학습이 유행입니다. 머리로 배우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경험하며 느끼고 각인시키는 것입니다. 문화체험, 농어촌체험, 군대체험, 죽음의 체험 등등 많은 체험학습이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 가운데 광야체험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광야는 근본적으로 고통스러운 곳이지만 그곳이 하나님을 만나는 삶의 자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의 삶을 뒤돌아 보면 우리 모두 각자 삶의 지나온 광야자리가 있습니다. 바로 그 각자의 삶의 자리를 되새겨 보면서 바로 그 고난과 고통과 불안함을 다시 한번 체험하며 하나님을 만나는 그 광야 체험이 우리의 신앙에서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고난을 묵상하는 이 사순절은 바로 하나님을 만나는 그 광야 체험이 우리의 신앙에서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고난을 묵상하는 이 사순절은 바로 이 광야체험의 기간입니다. 이 사순절 40일은 이스라엘 민족이 체험하였던 그 광야와 예수님이 체험하였던 그 광야 두 개의 의미가 섞여 있는 것입니다. 내 한계를 느껴보고 내 부족함을 느껴보고 내 궁핍함을 체험해 보는 것이 그것이 광야인 것입니다. 그 가운데 하나님을 만나는 삶의 자리 그것이 바로 광야의 영성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지금 삶의 자리, 현재 삶의 환경이 광야 그 자체로 느껴지시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욥은 바로 그 광야의 자리에서 욥기 23장10절에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그 내가 순금같이 되어 나오리라” 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내가 가는 길을 나는 모르지만 내가 왜 이 광야 길에 있는지, 내가 왜 이렇게 망가지고 무너졌는지 모르지만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 시험하신 후에 내가 순금까지 되어 나오리라. 욥은 그 험난한 광야길을 지나가며 이 고백을 하였습니다. 지금의 삶의 자리가 풍성하신 분들은 광야 체험을 해볼 때입니다. 지금 삶의 자리가 광야 그 자체이신 분들은 바로 이 욥의 고백을 묵상할 때입니다. 이 사순절, 바로 이 광야의 영성으로 우리 믿음이 더 깊어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