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9일 주일, 나는 벧엘에서 오후 예배를 시작했다. 벧엘은 우리가 성서활동을 위해 사들인 집이다. 8평방 피트의 방에 한국식으로 모여 앉아 내가 영어로 기도함으로써 예배를 시작했고, 우리는 마가복음 1장을 읽었다. 그리고 장씨의 기도로 폐회했다. 나는 이곳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위대한 센터가 되기를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한다.”(아펜젤러 목사의 기록 中)

1887년 9월 14일, 한국을 방문중이던 워른 감독의 주재 아래 제 3차 연례 선교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서 아펜젤러는 배재학당장 겸 감리사로 임명되고, 스크랜튼은 시병원의 원장 겸 교사로, 그리고 스크랜튼 대부인은 이화학당장으로 각각 임명 파송된다.

워른 감독은 또한 아펜젤러의 선교 활동 계획을 전적으로 지지했다. 그것은 지난 4월에 선교사 회의에서 결의된 한국인들이 모여 성경공부도 하고 예배도 할 수 있는 한옥을 하나 구입하는 것과, 평양에서도 선교사업을 전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펜젤러는 곧 한옥을 하나 물색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9월경 서울 남쪽에 위치한 정동에 작은 집 한 채를 구입하고 이것을 ‘벧엘예배당’이라고 명명했다. 이 예배당이야 말로 한국 감리교회의 요람이며, 정동제일감리교회의 초석이 된 것이다.

1887년 10월 9일에 드린 벧엘에서의 첫 예배는 정동제일교회와 한국 감리교회의 첫 예배가 되는 셈이다.

정동제일교회는 특히 역사적인 3.1 운동의 계획과 수행 과정에 있어서 중심적 역할을 한다. 이 운동의 준비과정에부터 가담한 이필주 목사(당시 정동제일교회 담임)는 당시 33인 민족대표로 참석해 감리교회의 대표자로 서명한다.

동시에 평신도로는 박동완 장로가, 그리고 김진호 전도사와 정득성 전도사 등 교회 지도자들이 대거 민족대표로 참여했다. 교인들이 주머니를 털어 ‘독립신문’을 인쇄하기도 했다. 이렇게 정동제일교회는 목사와 전 교인이 3.1운동에 가담했기 때문에 다른 교회들보다 더욱 가혹한 핍박을 받는다.

현 정동제일교회의 예배당은 1897년 봉헌된 벧엘예배당이 그 모체다. 벧엘예배당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예배당으로서 그 역사적 의미가 깊어 1976년에 국가문화재 사적 제 256호로 지정된 건물이다. 구한말에 세워진 이 예배당은 지난 100여년 동안 우리 민족과 교회가 겪은 고난의 눈물을 지켜본 예배당이다.

성도들이 지난 몇 년 동안 한 세기의 풍상으로 부식된 벽돌과 낡은 마루를 보며 대보수를 위해 기도해오던 중, 정성어린 헌금과 정부의 보조로 보수공사를 마치고 2002년 3월 31일 부활절에 건물을 재봉헌하게 됐다.(<정동제일교회 역사 화보집>, <하늘 사명의 전당, 벧엘 예배당>에서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