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릭사이드 교회 김칠곤 목사
(Photo : 기독일보) 크릭사이드 교회 김칠곤 목사

집안에서 화초를 가꾸기를 좋아하는 대학 동기인 한 친구 목사와 "크리스마스 꽃"에 대한 이야기를 어느날 나눈 적이 있다. 그것은 샛빨간 붉은 잎을 가진 아주 화려한 느낌을 주는 것으로 매년 크리스마스를 전후로 등장하는 '포인세티아'(Poinsettia)이다. 이것은 잎이 너무나 선명하고 푸른 잎과의 색상의 조화를 이루기에 사람들에게 인기가 너무 많아서 크리스마스에는 결코 빠질 수 없는 식물이다. 포인세티아의 유래를 보면 멕시코의 한 작은 마을에는 크리스마스 이브에 예수 탄생을 기리며, 교회 연극 무대 앞에 선물을 가져다 놓는 풍습이 있었다. 그런데 가난한 한 소년이 선물을 준비하지 못하여 안타까워 하면서 하나님께 무릎을 끓고 기도를 드렸다. 그 소년이 기도를 드리는 동안 갑자기 빨간 잎이 달린 나무 한 그루가 자라게 되었다. 그것을 본 소년은 그 나무를 선물로 드리게 되었고 사람들은 베들레헴의 별을 닮은 그 나무에게 '성스러운 밤의 꽃'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래서 그때 부터 포인세티아는 "축복", "축하 합니다.", "내 마음은 타고 있어요"라는 꽃말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일화를 친구와 함께 나누면서 한 가지조언을 얻게 되었다. 그것은 녹색인 잎을 어떻게 빨간색으로 변화를 시켜 주느냐는 것이었다. "11월쯤 되면 일조량이 줄어 들면서 포인세티아의 꽃 눈이 생기고 나무의 잎이 붉게 물들기 시작하는데 만일 그것이 붉어 지지 아니한다면 까만 비닐 봉지로 며칠만 씌워 놓으면 녹색의 잎이 빨간색으로 바뀐다는 것이었다.

포인세티아에 관해 관심있게 친구에게 물어 본 것은 지난해 크리스마스 시즌에 프레드 마이어에서 하나를 구입한 것이 잘자라고 있어서 였다. 그것을 겨울 내내 집안에 두고 그 꽃의 화려함을 보고 많이 즐거웠 했다. 그런데 봄이 되면서 붉은 색깔의 모습이 녹색으로 변하는 것이었다. 시애틀의 봄은 그리 춥지 아니하여 봄비를 맞치려고 어느날 포인세티아를 밖에 베란다에 내어 놓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봄비를 맞은 포인세티아는 더욱더 자라게 되었고 풍부한 일조량에 맞추어 잎들이 무성하게 맺었고, 처음에는 하나의 뿌리 였는데 어느날 가을날에 그것을 보았을 때는 세개의 뿌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을 본 우리 부부는 조만간에 화분을 사서 분갈이를 해주고 그것을 새개로 나누어 누군가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나누어 주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리고 친구 목사에 들었던 것처럼 그것을 집안에 놓고 까만 비닐 봉지로 감싸려고 했다. 하지만 그것은 마음만 먹은 것이지 실천에 옮기지 못한 것이다. 하루 하루 미루다가 갑작스럽게 몰아닥친 한파가 나의 생각을 완전히 무색하게 하고 말았다. 그것은 밖에 베란다에 두었던 포인세티아를 미처 집안에 들여 놓지 못한 것이다. 영하의 날씨로 인해 항상 녹색으로 자신의 모습을 뽐내던 포인세티아의 잎들 모두가 풀이 완전히 죽은 모양을 하고 고개들을 완전히 숙인 것이었다. 그것을 본 나는 고개를 숙인 포인세티아를 집안으로 들여 놓고 혹시 실내가 따뜻하면 잎들이 다시 제 모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라는 기대감을 가지게 되었다. 그런데 그것은 나의 기대감 이었지 이미 그 잎들이 살아갈 수 있는 희망을 전혀 찾아 볼 수 없었다.

그 이유는 포인세티아의 잎 줄기가 중간부터 나무의 끝까지 속이 완전히 비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말은 이미 나무로서의 생명을 다한 것이라 생각한 것이었다. 그래서 생각하게 된것이 '시기를 놓치면 죽는다.'는 것이 었으며 하나의 작은 식물이지만 그것을 잘 가꿀 수도 있었는데 나의 부주으로 인해 죽어가게 그냥 내버려 두었다는 안타까움이 었다. 그래서 '식물도 주인을 잘 만나야 한다.' 희망을 잃어 버린 포인세티아에게 미안한 감을 조금이라도 가지기 위해 죽은 줄기를 잘라내고 다시 분갈이를 하고 내년을 바라보는 것이 마지막으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집안에 있는 화초를 제대로 가꾸지 못하는 것은 그들을 관리하는 주인의 부주의 함 때문이다. 그런데 식물이 영원히 살 수 있는 것은 "땅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그 이유는 그들의 살아갈 수 있는 가장 적당한 토양은 자연의 땅이기 때문이다. 이말은 하나님이 만든 땅에서 자라나는 어느 식물이든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가꾸시기에 어떤 식물도 땅에서는 죽지 않고 살 수 있다. 식물들이 살아갈 수 있는 것은 낮에는 하나님이 주시는 햇빛으로 자신의 색깔을 내고 저녁에 내려 주시는 이슬로 그들은 자라나는 것이다. 이것으로 볼때 하나님은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실 뿐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있으면 무엇이든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창조주이고 세상의 모든 만물들은 하나님의 손으로 만든 것이기에 하나님께서 하나 하나의 식물 까지도 다 아시기 때문이다.

식물이 살아가는 원리를 안다면 우리 인간이 영원히 살아갈 수 있는 '생명의 비밀'은 주님의 품안에 거하여 살아가는 것이며,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주님을 나의 구세주로 영접하는 것이다. 요한복음 3:16절에 말하기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자 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주님은 인간이 영원히 천국에서 살아갈 수 있는 키를 가지고 계신 분이다. 그런데 문제는 주님이 나의 구세주라는 것을 나의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는 것이다. 이것은 고백하는 자가 받을 영생의 면류관이다. 이러한 축복을 알고도 사람들이 주님을 모르고 살아가고, 지식적으로 안다고 해도 삶의 모든 중심이 자신이라고 여기며, 주님을 잃어버리고 살다가 영이 매말라 죽게되는 삶을 살게 된다. 그러다가 어느날 예수님도 모르고 죽어가는 상황이 부닥치게 되면 젊었을 때 주님을 위해 살았어야 할 것이라고 후회를 하게 된다. 그래서 인간의 삶이 '껄, 껄,껄'인생이라고 볼수 있다. "끄때 사람들에게 베풀고 살아갈 껄", "미워하지 않고 용서하며 살았을 껄", "집 사람과 재미있게 살았을 껄", "아내가 교회에 같이 가자고 했을 때 그랬을 껄"하며 자신의 실수를 후회하며 죽게 된다. 주님이 누구인지를 모르고 죽어가는 것은 하나님의 손이 짧아서 그런 것이 아니라 인간이 교만하여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하지 아니한 것에 의한 것이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사이를 갈라 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이사야59:1-2) 하나님은 모든 인간에게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주신다. 그러나 문제는 시간이 나를 한 없이 기다려 주는 것이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사랑할 시간', '주님을 통한 은혜의 경험', '천국을 꿈 꾸며 살아가는 기쁨과 감사의 시간'은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축복의 시간이다. 이것을 내가 누리고 살지 못한다면 사랑과 영원한 소망이 사라지게 되고 절망과 후회만 남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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