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바인에 최대교회를 이루고 23년 동안 수많은 돌탕(돌아온 탕자)을 맞이한 베델한인교회 손인식 목사(KCC 대표간사). 그의 목회는 위로와 위로의 연속이었다. 4.29 폭동에서 잿더미가 된 이들, 아들 딸의 문제로 간장을 도려내는 것 같은 고통에 신음하는 이들, 친구에게 배신당하고 재산을 다 잃어버린 이들을 끌어안고 함께 아파했던 그는 이제 목회를 마치고 선교사로서의 제 2의 삶을 시작한다.
북한인권을 위한 통곡기도운동을 그동안 주도적으로 이끌어 오면서 앞으로 이 일에 전념하기 위해 선교사로서의 삶을 시작하는 것이다. 베델한인교회 후임은 1.5세 사역자 김한요 목사로 모든 인수인계를 마치고 모세의 사명을 여호수아가 이어갔듯이 손 목사는 교회를 떠날 채비를 마쳤다. 북한인권을 회복하는 ‘그날까지’ 기도운동을 계속 이어가겠다는 그를 만나봤다.
-북한 선교사 파송예배를 드리고 본격적으로 활동하실 텐데 요즘 어떻게 지내고 앞으로의 방향은 어떻습니까?
제가 은퇴를 쉽고 수월하게 한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는데, 23년 동안 베델한인교회에서 목회를 마치고 또 다른 사명을 가지고 떠납니다. 골프치고 크루즈 타려고 은퇴하는 것이 아니라 더 야심찬 일을 위해서 은퇴하는 것이기 때문이죠. 23년 동안 50명이 안되는 교회에서 지금의 큰 교회를 이뤘습니다. 그렇지만 새로운 사명이 주어졌으니 지금은 큰 애착이 없습니다.
저는 2004년 9월 27일에 시작해서 10년 동안 선두에 서서 입히고 섬기며 북한 해방과 자유를 위한 통곡 기도운동을 펼쳐 왔습니다. 지금은 전세계적으로 브랜드네임이 됐죠. 이 기도운동을 통해 동독과 서독이 하나됐듯이 북한도 무너지고 남한과 하나될 것입니다.
이번에 장성택 실각 소식을 들으면서 북한 내부의 균열이 시작되는 예고편이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바벨론에서 70년 만에 포로생활을 마치고 유대인이 돌아올 것이라는 예언이 있었고 정확하게 70년 만에 포로생활을 마치게 됐습니다. 소비에트 공산정권도 70년 만에 정확하게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저는 올해 31일까지 정리하고 1월 초부터 서서히 움직이려고 합니다. 한국에서 북한 인권법이 새누리당과 민주당에서 통과되려면 30년 이상은 걸릴 것으로 보고 있어요. 2004년에 1600명이 되는 한인교회 목회자들이 모여 북한 인권을 위해 기도하고 부르짖을 때 샘 브라운백이라는 상원의원이 와서 연설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해 북한인권법이 발효됐는데 한국에서 북한인권법이 되게 하려면 기적과 같은 그때의 일이 일어나야 합니다.
미국에서 내년 10월 말에 북한인권 국제대회를 개최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북한과 관련해 매우 많은 단체가 있는데 중요한 것은 힘을 합칠 때 큰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다는 겁니다. 북한인권을 통해서 연합을 이루는 것 자체가 전세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드러내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북한인권 국제대회에 또 하나의 프로젝트로 유럽, 일본, 남미, 중미, 캐나다는 물론이고 미국의 30개 도시에 KCCC 창설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의 물줄기가 되어서 한국, 미국, 유럽 등에 다니면서 활동하게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여기는 내년 중반 이후에 사무실을 내려고 합니다. 베델한인교회 근처에 사무실을 내면 교인들이 계속 찾아올 것이라서 교회에 큰 누가 됩니다. 그래서 제가 사랑했던 양무리와 결별하는 것이 마땅하다 생각됩니다.
-지난 23년 동안 목회를 해 오면서 처음 시작할 때가 생각날 것 같은데 어떠신지요.
처음에 이렇게 부흥하는 교회에 오지 않았습니다. 딱히 갈 데가 없었고, 전에 있던 교회에서 부목사로 버티겠다는 저에게 유일하게 청빙하겠다는 이 교회로 오게 됐습니다.
그때가 42세 한창 나이였는데, 캘리포니아 어바인에 오게 됐습니다. 와서 보니 생긴지 1년 만에 장로파, 담임목사파로 갈라진 교회였습니다. 제가 온 곳이 장로들이 모인 교회였는데, 무지하게 싸웠더라고요. 한 집사가 자동차 트렁크에 권총을 가지고 왔다는 이야기가 들릴 정도였습니다. 등에 땀이 날 정도로 무서웠죠. 그때로서는 다른 곳에 갈 곳이 없으니 2년만 붙어 있게 해 달라고 기도를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2년이 아니라 23년을 있게 해 주셨고 자그마한 교회였는데 지금 이런 교회를 이루게 해 주셨습니다. 제가 부흥하려고 한 것은 전혀 없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그런 계획을 가지신 것이지 저는 부흥하고는 관계가 없습니다.
그래도 이 교회에 적절한 때에 저를 보내신 것은 틀림없는가 봐요. 교인들에게 설교할 때 가장 마음이 편한 단어는 위로였습니다. 교회도 그렇고 가정이 쪼개진 것에 가장 필요한 것도 위로더라고요. 한참 위로에 대한 설교를 던지기만 해도 다 울었습니다. 그래서 생각했죠. 은사가 위로밖에 없는 것이구나.
여기 오기 전에는 동부에서 17년 동안 생활을 했습니다. 동부에서는 교회에 올 때 넥타이에 정장을 차려입고 오는데 여기는 교회에 샌달을 신고 오더라고요. 그때 생각하면 기가 막히죠. 예배에서 전통적이고 예의를 갖추고 따뜻한 것들을 맞보아야 할 때에 저를 얼바인에 보내신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마침 그때에 한창 동부에서 서부로 사람들이 내려 왔습니다. 이러한 여러가지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서 쓰신 것이라 생각합니다.
-섭섭해 하는 교인들이 많을 것 같은데요.
4개월 동안 차기 담임 김한요 목사와 동사목회를 했습니다. 인수인계를 한 셈이죠. 그 전까지는 교인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목사님 따라 여기까지 왔는데 나도 그만둔다고 하는 교인들이 많았습니다. 일종의 협박처럼 들리기도 했죠. 동사목회를 하는 4개월 동안 ‘김한요 목사는 흥해야 하고 나는 쇠하여야 되리라’라는 마음이었습니다.
저는 사회를 봐 주고 김한요 목사는 말씀 강좌를 이끌고 하면서, 너무 흥미로운 것은 3~4개월이 지나니까 같이 떠나자고 한 사람들의 표정이 달라지더라는 겁니다. 이런 면에서 동사목회하길 참 잘한 것 같습니다.
은퇴가 취임보다 10배는 더 힘든 것 같습니다. 얼마나 일이 많은지 몰라요. 쪼개지고 힘들고 갈라진 교회로 끝나지 않게 하시고, 왕성하고 교회 안팎으로 섬길 수 있는 이러한 때에 목회를 넘겨주고 떠나는 것이 참으로 감사합니다.
-이제 선교사로서 왕성한 활동이 기대됩니다. 사회 일각에서는 북한인권을 위한 통곡기도 운동을 정치적인 활동으로 보는 시각도 존재합니다. 이에 대한 견해가 있으시다면.
두 사람이 있어도 당이 생기는데 의견이 여러가지가 있다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것입니다. 출발점이 어디 있느냐에 따라서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기도하고 통곡하는 것이 정치라고 하는 사람들은 스스로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요. 기도를 정치라고 생각하는 것이 비판을 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죠.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있는데 사실 이런저런 생각할 여유가 없습니다. 북한에 이뤄지고 있는 홀로코스트, 지난 68년 동안 650만명이 죽었다고 하는데 자기 백성을 먹이지 않고 무기나 만드는 것을 보면 말이 안나오는 것이죠. 그동안 홀로코스트보다 더 많이 죽었습니다. 이것은 정치의 문제가 아니라 생명의 문제입니다. 죽어가는 사람들을 생각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각국 중국대사관 앞에서 탈북자들의 북송을 막으려고 하는 시위는 생명 윤리를 지키고자 하는 기도연합 운동입니다. 생명을 살리는 하나님을 향해 기도하는 것이 윤리입니다.
훗날 김일성 광장 앞에서 통곡 기도회를 여는 것이 마지막 파트라고 보고 있습니다. 이 말은 상상에 맡기는 소리가 아니라 역사의 현장을 가봐서 제가 느낀 것입니다. 독일도 4번 갔다 왔는데 독일 사람들이 그 당시 아무도 통일을 믿은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아무도 믿지 않았지만 동독의 한 대변인이 잘못 브리핑을 하는 바람에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것이죠.
북한 기도운동을 하게 된 계기는 얼마동안 북한에 지원을 했는데 암만 지원해도 결국에는 핵폭탄이 되어 날아 오고 군비만 증축시키는 것을 보았을 때 이건 아니라는 것이죠. 그리고 탈북자들의 인권유린의 간증을 듣고 지금까지 오게 됐습니다.
“기도하면 됩니다”라고 2004년에 교회 표어를 붙이고, 2005년에는 “그날까지”라고 붙여놓고 지금까지 오고 있습니다. 미국에 기도하는 동지 교회가 전국에 150여개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활발하게 움직이는 교회이고, 봉화가 울리면 모이는 교회가 1400개 정도 될 것입니다.
많은 디아스포라교회들이 북한 인권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생명 논리를 정치적으로 옮기지 않겠다는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