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량
(Photo : 기독일보) 정인량 목사

대부분의 종교개혁자들이 설교를 통하여 종교개혁의 기치를 높이 들었다 것은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특별히 장로교의 기초를 놓은 죤 칼빈에게 있어 종교개혁은 선포 설교와 불가분리의 관계인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대한 재발견은 그로하여금 말씀 선포에 대한 불같은 열정을 쏟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철벽옹성의 여리고와 같았던 캐톨릭교회의 아성을 소리없이 무너지게 했다.

루터역시 신학적 논쟁이나, 성경번역이나, 주석작업보다는 수많은 설교를 통하여 도무지 성공의 여지가 보이지않던 종교개혁을 성취했던 것이다. 진실로 그들의 입은 말씀을 쏟아내는 폭포수와 같았다. 그들의 입은 하나님의 입이었고 그들의 입술은 하나님의 도구였던 것이다.

20세기와 21세기에 걸쳐 조직신학이나 주경신학은 눈부신 진화를 거듭하고 있지만 설교에 대한 확고한 신학이 발전하지 못하고 있음은 중세 개혁자들의 말씀에 대한 소명의식을 현대에는 찾을수 없는 까닭이다. 오히려 회중들이 듣고 싶은 말만 골라서 하는 앵무새 설교, 그리고 기껏해야 설득설교에 지나지 않는 설교의 퇴보의 행진은 어디까지 갈것인지 심히 우려되는 것이다. 게다가 개그설교, 만담설교에 설교무용론에 이르기까지 백가쟁투의 논쟁이 설교학에서 횡횡하는 것을 볼때 설교학계를 이 참에 총체적으로 개혁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지 않았나 싶다.

칼빈에게 있어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이 말씀되게 하는 작업이었기 때문에 그의 심중을 조금 이해하자면 무슨 강해나 주석에 힘을 쏟았다기 보다는 설교는 하나님의 현현이요, 하나님의 임재로 이해하여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고 선언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설교자도 그 설교를 들어야 하는 역설이 성립된 것이다. 이렇게 볼때 설교는 회중이 듣고 싶은 말을 골라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 백성들에게 들려주고 싶으신 말씀을 전하는 것이라 할수 있으며 그 방법은 선포인 것이다.

이런 일이 있었다. 칼빈이 1549년 8월 16일에 행한 예레미야 강해 설교 제 25번째에서 자신을 가혹하다고 비난하는 자들을 향해 그는 이렇게 선언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완전히 자유롭게 활동하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자신에게 던져지는 훈계의 말씀을 거역하여 일어나는 모든자들, 그들은 하나님께 맞서 그에게 반역하는 자들입니다. 내 혀가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한다해서 내 혀를 탓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날 사용하셔서 당신의 말씀을 전달하시고자 할 때 사람들이 내 인격에 맞서서는 안됩니다. 만일 내게 맞선다면 악인들은 하나님이 이 문제에 대해 보증이 되시리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라고 했다.

아! 오늘 칼빈이 다시 살아나 우리의 강단을 불시 점검을 하게 될때 하나님의 현현이나 임재없이 회중에 요구에 따라 꼭두각시가 되어 기껏해야 30분을 넘기지 못하는 황금같은 설교시간을 선포없이 달래고, 어르고, 웃기고, 그저 결론에 겨우 설득으로 마침을 보고, 수많은 설교자들을 질타하게 될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제네바에서 그의 설교시에 조는 자들을 감옥에 보내고 싶어 했을 정도인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