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일부터 뉴저지교협(회장 박상천 목사) 주최로 뉴저지 한소망교회에서 3일간 진행된 2013 호산나전도대회가 19일 하나님 사랑에 대한 강력한 메시지를 남기고 폐회했다.
‘하나님을 향한 행복한 갈망’이라는 주제로 열린 이번 집회에서 유관재 목사는 첫날은 신앙의 기본에 대해, 둘째 날은 감사의 신앙에 대해, 마지막날인 셋째 날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깊은 말씀을 전했다.
유관재 목사는 마지막날 집회에서 ‘주님의 능력으로’(시18:1)이라는 제목의 말씀을 통해 다윗의 고백 속에 나오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조명하면서 죽음보다 강한 사랑의 힘에 대해서 설명했다. 특히 ‘좋아한다’와 ‘사랑한다’의 차이를 분명히 하면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시는 아가페적 사랑을 깊이 있게 와 닿게 했다.
마지막날 집회에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메시지로 뜨겁게 결단하고 눈물로 기도하는 성도들이 많았다. 유관재 목사는 조용하지만 뜨겁고 깊이 있는 묵상기도를 인도하면서 결단을 이끌어냈다.
이날 집회는 장문성 목사(새동산장로교회)의 사회로 서정호 목사(소망장로교회) 찬양인도, 이수원 목사(시온성교회) 기도, 성명호 목사(다리놓는교회) 성경봉독, 소망장로교회-한소망교회 연합성가대 찬양, 유관재 목사 말씀, 이형민 집사(한소망교회) 헌금찬양, 강원호 목사(뉴저지밀알선교단) 헌금기도, 박근재 목사(교협총무) 광고, 김정문 목사(성은장로교회) 축도 등의 순서로 진행됐다.
강사 유관재 목사는 뉴저지교협측에도 감사의 말을 전했다. 유관재 목사는 “뉴저지의 많은 목사님들을 보면서 많은 도전을 받았고 감동을 가슴에 가득 안고 돌아가게 된다”며 “뉴저지의 많은 은혜로운 목사님들을 만나면서 정말 하나님의 큰 복을 받았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제가 많은 연합집회를 다녀봤지만 이렇게 감동을 받고 간다고 전하기는 처음”이라고 증거했다. 다음은 유관재 목사 셋째날 말씀 주요 내용.
유관재 목사 ‘주님의 능력으로’(시18:1)
오래전 책을 읽은 적이 있다. 그 책은 정신병원 의사를 지낸 사람이 쓴 에피소드 모음집이었다. 그 일화 중에 밥만 먹으면 새끼를 꼬는 환자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다. 손에 물집이 다 뒤덮을 정도로 새끼를 꼬는데 집착을 한다. 결국 입원을 했다. 그리고 또 한 주에 있다가 질문을 계속 하는 환자가 있었다. 이 두 환자가 같은 병실에 입원했다. 왜 새끼를 꼬는가-팔려고-왜 팔려는가-돈 벌려고-왜 돈 버는가-짚을 사기 위해서-왜 짚을 사는가-새끼를 꼬기 위해서-왜 새끼를 꼬는가-팔려고...... 이 대화가 끝없이 계속 되는 것이다.
어느날 봄날에 따뜻한 볕에 앉아서 두 사람이 마주 앉아 있었다. 어김없이 새끼를 꼬았고 어김없이 또 질문을 했다. 그런데 수천, 수만번 반복된 ‘왜 새끼를 꼬는가’ 질문이 이 병자의 뇌리를 강타하게 됐다. 정신이 돌아왔다 ‘왜 내가 새끼를 꼬고 있지?’ 결국 그 환자는 정상인이 되어서 퇴원을 했다고 한다. 이 ‘왜’라는 질문에는 우리에게도 수천 수만번 던져봐야 하는 것이다.
텍사스는 유전이 있어서 부자들이 많다. 정말 대궐 이상으로 잘 사는 집들이 많았다. 집을 짓는데 올림픽 규격의 수영장을 만들고 큰 뒤뜰을 만들었다. 사람들을 초대해서 파티를 여는데 사람들이 엄청난 규모에 놀랐다. 화려한 조명 가운데 호수같은 수영장에 너무도 감탄했다. 그 상황에서 주인이 나와서 말하기를 ‘이 끝에서 저 끝으로 수영으로 제일 먼저 가로지르는 사람에게 제 재산의 절반을 드리던지 딸을 드리겠다’고 했다. 사람들이 말이 끝나자마자 우르르 몰려가는데, 갑자기 뭔가를 보고 다들 뒷걸음쳤다. 그 안에 악어가 있었던 것이다. 무시무시한 악어들이 있는데 갑자기 어떤 청년 한 명이 다이빙을 해서 저 건너편까지 갔다. 부자가 이 청년에게 가서 ‘자네가 1등을 했는데 자네는 딸을 원하는가 나의 재산을 원하는가’라고 물었다. 그런데 청년이 다짜고짜 화를 내면서 ‘다 필요 없습니다. 누가 나를 떠밀었습니까?’라고 했다. 이 이야기는 코미디다. 그런데 우리 인생을 코미디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떠밀려 사는 인생이 그런 것이다.
하나님은 한번도 우리에게 의도하신 적이 없다. 쫓아다니면서 떠미시는 하나님이 아니시다. 신앙은 행복이다. 그런데 신앙을 고통이라고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 하나님은 그렇게 의도하신적이 없다. 떠밀려 하는 문제 중에 한국 사람들은 특히 체면문화 때문에 더욱 심한 경우들이 있다.
다윗은 하나님이 불러주셔서 기름을 부어주셨다. 단순히 인간적으로 생각한다면 기름부음을 받은 순간부터 잘 돼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 때부터 사울의 미움을 받아서 도망자의 신세가 된다. 죽지 않기 위해서 도망을 가는데 광야로 도망을 가게 됐다. 향수병은 나와 가까운 친구와 가족들이 떨어졌을 때 힘이 들어서 생기는 병이다. 처음 미국에 왔는데 며칠 지났는데 가슴이 무겁고 울적했다. 비행기 표 하나 갖고 왔는데 그 그리움, 향수병이 힘들었다. 언제 들짐승의 밥이 될지 모른다. 그리고 죽지 않기 위해서 수염에 침을 흘리며 미친척도 했다. 그의 인생을 보면 하나님이 그에게 기름부으신 이후 꼬이고 또 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들이 다 소망이 안보이고 희망이 안보이는 그 때에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라며 찬양했다. 그는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주를 사랑한다고 고백했다. 하나님은 내 마음에 합한 자라고 다윗을 말씀하셨다.
내가 왜 그 일을 하는가. 왜 예물을 드리고 봉사를 하는가.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동기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사랑 이야기다. 사람들은 사랑을 아는 것 같지만 사랑이 뭐냐고 물어보면 모른다. 사랑을 아는 것 같은데 모르는 것이 진짜 사랑이다. 제가 결혼식 주례를 할 때도 ‘사랑과 결혼의 오해’라는 제목으로 설교하기도 한다. 결혼이 사랑의 완성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하는데 큰 오해다. 사랑이 뭔지 잘 모르는 것이다. 결혼은 사랑의 시작인 것이다. 기공식을 할 때 첫 삽을 뜨는 것이다. 블루프린트가 결혼이다. 그리고 사랑의 집을 지어가는 것이다. 그런데 사랑이 완성됐다고 생각하니까 그 전에는 상대에게 그렇게 호감을 주려고 노력하다가 그 다음부터는 열중쉬어가 된다. 여자 청년들에게 말을 하는데 이런 남자와 결혼하지 말라고 한다. 결혼하기 전에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문 앞에 와서 사랑한다고 말하고 무슨 무슨 이벤트를 계속 빠짐없이 하는 남자 조심하라고 한다. 이것은 사랑이 아니라 집착일 때가 많기 때문이다. 사랑과 집착은 다른 것이다.
정말 사랑이 뭔지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고자 한다.
첫째, 뭔가 정의할 때 아닌 것을 정의해보면 이해가 쉽다. 사람들은 사랑한다와 좋아한다는 것이 비슷한지 안다. 그런데 반대라는 개념을 알아야 한다. 고양이가 쥐를 좋아한다. 그런데 고양이는 쥐를 사랑하는 것은 아니다. 자기가 선호하는 것이 좋아하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찢기고 상해도 사랑하는 것, 그것이 사랑이다. 사랑은 반대의 개념이다. 내가 찢기고 상해도 변함이 없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 고백이 사실 따지고 보면 좋아한다는 것일 수 있다. 이렇게 해주시고 저렇게 해주시고 주님을 조종하는 우리 자신을 보게 된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셨는데 오히려 하나님을 나를 따라오도록 하지는 않는지 살펴보자.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좋아하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자.
둘째, 사랑은 절대적인 것이다. 이 남자도 사랑하고 저 남자도 사랑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그 외의 것을 사랑할 수 없는 것이다.
셋째, 사랑은 목숨을 거는 것이다. 사람들이 사은품을 준다고 하면 제가 사는 곳이 수준이 있다는 동네인데도 원가 1불-2불짜리 상품을 위해 길게 줄을 서서 난리가 난다. 그런데 누군가 400미터 높이의 두 건물 사이에 철봉을 두고 걸어서 건너가는 사람에게 돈을 준다고 했을 때 수억을 준다고 해도 건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목숨은 돈보다 소중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일 자신의 자식을 두고 총으로 위협하고 건너라고 한다면 걸어갈 것이다. 백만불 천만불을 줘도 안하는 것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다른 어떤 종교에서 절대자가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없다. 멸망과 치욕 가운데 있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예수님의 목숨을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구속이라는 말, 값을 지불하고 사셨다는 것이다. 얼마를 팔고 사셨는가. 셀 수 없는 예수님의 목숨으로 사셨다. 사랑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 우리의 가치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가치와 여러분의 가치를 하나님은 동등되게 생각하신 것이다. 그렇게 사랑하신 것이다.
오늘 이 시간 갈보리 언덕의 십자가를 바라보시기 바란다. 갈보리 언덕 십자가의 모습, 가시면류관의 그 가시는 장미 같은 가시가 아니다. 어떤 친구가 미국에서 최고급 벤츠를 빌려줬는데 텍사스의 사막을 지나는데 뭔가 바람에 막 날아다녔다. 그러다가 뭔가 축구공 같이 엉켜있던 것을 치고 지났는데 도중에 내려서 바퀴를 보고 깜짝 놀랐다. 그 가시가 두꺼운 고무를 뚫고 들어갔다. 그런 가시로 엮은 면류관인 것이다. 채찍의 끝에는 납이 매달려 있어서 그것으로 책상을 치면 박혀서 안빠질 정도의 채찍인 것이다. 대못의 두께는 손가락보다 두꺼웠다. 심장이 파열되기 까지 모든 것을 주신 것이다. 이것이 주님의 사랑인 것이다. 목숨을 건 사랑, 그 사랑으로 인해 내가 받을 죄의 삯을 그 분이 받으셔서 내가 용서되고 내가 구원되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주님의 친구가 된 것이다. 거저 받은 값 싼 은혜가 아니고 가장 비싼 은혜이다. 주님은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셨다.
제가 첫째날 군대에서 있었던 재미있었던 일들을 말씀드렸었다. 제 친구 중 육사를 간 친구가 있는데 당시 육사38기인데 정말 경쟁률이 높았었다. 저는 30살에 목사안수를 받고 아이를 낳고 사병으로 군대를 가서 10살 어린 고참에게 구타를 당하며 군생활을 했다. 가장 친했던 친구가 사단장 비서실장으로 있었다. 그 친구가 남자답고 정말 멋있었다. 이 친구가 육사에서도 동기 중에 항상 수석이고 일등이었다. 얼마나 일을 잘하는지 그 친구와 같이 일했던 상사가 이 친구는 시킨 일의 120프로 130프로를 해온다고 했다. 장군은 떼놓은 당상이었다. 항상 1등이고 수석이었으니 부족함이 없었던 것이다. 연구도 잘하고 자기에 대한 자존심도 강했던 친구다. 사단장님이 기독교인이었는데 사단장의 권유에도 예수님을 믿지 않았던 친구다. 이후에 제가 일산에서 목회를 했는데 이 친구가 일산 근처에서 중령으로 진급해서 일하고 있었다. 어느날 전화가 왔는데 그 친구가 암으로 입원해 있다고 했다. 깜짝 놀라서 달려가서 봤는데 병실 앞에 고등학교 동기들이 죽 서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동기들이었다. 그런데 다 의사가 돼 있던 친구들이었다. 서로 연락하던 사이니까 의사 친구들이 몰려온 것이다. 그런데 아픈 친구가 면회를 사절했다. 자존심이 너무 강해서 자기의 그런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제가 왔다는 말에 저는 면회를 허락했는데 그 친구 상태는 배를 열어보니 뱃속이 모두 암으로 뒤덮여서 배를 열었다가 다시 닫았을 정도였다. 손을 쓸 수 없는 상태였다. 갈급해진 이 영혼에게 복음을 전했다. 말씀이 스펀지에 물이 흡수되듯이 받아들여졌다. 어느 날 오늘 본문의 말씀을 하게 됐는데 정말 보지 못했던 통곡을 했다. 그리고선 유언과 같은 3가지 이야기를 했다. 자네가 사람들을 많이 만나니 내 이야기를 해달라고 했다. 1. 인생의 끝이 있다고 생각은 못했는데 인생은 끝이 있다는 이야기를 꼭 해달라. 2. 예수 모르는 인생이 얼마나 불쌍하고 고독하고 억울한 인생이었는지 꼭 알려달라. 3. 오늘 말씀을 듣고 보니 사랑해주신 이 몸을 나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동기로 움직이지 못했던 이 아쉬움을 많이 알려 달라.
나중에 이 친구가 나를 찾는다는 말에 부리나케 달려갔는데 벌써 의식이 없었고 기계에 의지해서 숨만 쉬고 있었다. 임종예배를 내가 드리는데 그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눈물을 계속 흘리는데 옆으로 눈물이 수도꼭지 틀듯이 나오게 된다. 누군가 의식이 없을 때 다 듣고 있는 것이다. 좋은 이야기를 하고 성경을 읽어줘야 한다. 찬송을 부르는 중에 뇌파가 끊어지고 심장이 멈췄다. 얼굴은 정말 천사와 같이 평온했다. 장례식을 마치고 제가 운전하고 올라오는데 이 친구를 생각하니 정말 마음 아파 견딜 수가 없었다. 그 친구의 죽음이 안타까워서 계속 울고 기도했더니 생각을 주시기를 저에게 친구를 통해 가장 강력한 메시지를 주셨다고 하셨다. 목사를 세운 것은 하나님 사랑하기 때문에 일해야 한다는 것을 알리기 위한 것임을 알게 됐다. 그 친구의 죽음으로 메시지를 준 것은 다른 누가 아닌 저 자신이었다. 제가 깨달은 것으로 살았다면 그렇게 살지 못했을 것이다. 하루에 10번 이상 하나님 앞에 고백하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사랑합니다. 길 가면서, 운전하면서도 사랑합니다. 잘 때도 사랑합니다. 하나님 앞에 시스템을 만들며 언제나 하나님께 이 고백을 드리겠다고 다짐했다. 예물을 드릴 때, 아이들 용돈을 줄 때도 사랑의 동기로 할 때 그 하나님의 사랑을 담을 때 내 손을 붙잡으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기계적으로 우리를 만나고 싶어 하시지 않는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내 삶을 드리게 될 때 내 손을 붙잡으시고 내 등을 두드려 주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게 될 것이다. 안주하고 기계적이 될 때 느낄 수 없는 하나님을 느끼게 될 것이다.
‘왜’라는 질문이 중요하다고 했다. 부활 하신 예수님이 베드로를 다시 만나셔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으셨을 것이다. 그런데 다른 이야기는 하지 않으시고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어보셨다. 저는 ‘주님 왜 이 질문을 하셨나요’라고 물어보며 하루를 꼬박 묵상을 했는데 그날 두 가지를 깨닫게 해주셨다. 베드로는 그 때부터 인생이 완전히 바뀌게 됐다. 그 전까지는 베드로는 사람을 두려워했다. 첫째는 ‘나를 얼마나 사랑하느냐’였고 두 번째는 ‘베드로야 실수 했구나 그래도 나는 너를 여전히 사랑한단다’였다. 이 메시지에 저는 눈물로 통곡하며 밤새 울었다. 제가 아는 어떤 분은 아들이 좋은 대학에 합격하고 수석으로 졸업할 때도 너무 기뻤는데 아들이 자기를 사랑한다고 할 때 그 기쁨보다 더 기쁜 것은 없었다고 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을 받고 싶어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질투의 하나님이시라고 했다. 나 때문에 하나님이 질투를 하신다는 것이다. 내가 뭔데 하나님이 질투를 하시는가. 그런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여러분이 베드로의 자리에서 예수님께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실 때 여러분은 과연 무엇이라고 답변을 하실지 깊이 생각해보는 이 시간이 되시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