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인권
(Photo : 기독일보) 안인권 목사.

하루 동안 사람의 머리 속을 스쳐가는 생각은 몇 가지나 될까? 사람들이 생각없이 내뱉는 말 중에 오만가지 생각이 다든다는 말이 있는데, 실제가 그렇다. 사람들이 하루에 생각하는 생각이 5만 가지가 넘는다고 한다. 심리학자들에 의하면 사람은 잠자는 시간 8시간을 빼고 하루에 약 6만 가지 생각을 하며 산다고 한다. 그렇다면 '오만 가지 잡생각' 가운데 긍정적인 생각을 할 수 있는지의 여부가 새로운 생각을 임신할 수 있는 가능성의 지표가 될 것이다. 어른이 되고 나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단어 세 가지가 있다. '물론 그렇다', '당연하지', '원래 그런 거야' 세상에는 물론 그렇고, 당연하고, 원래 그런 것은 없다. 물론과 당연, 그리고 원래에 의문을 갖고 시비를 걸어야 한다. 그래야 새로운 생각의 잉태, 임신이 가능하다. 세상에는 '당연'하지 않은 것, '원래'부터 그렇지 않은 것, '물론' 그렇지 않은 현상이 비일비재하다. 모든 생명체를 비롯해서 사물이 그 자리에 존재하는 이유가 있게 마련이다. 이유 없이 어떤 결과가 발생하지 않는다. 모두 나름의 이유가 있는 가운데, 몰랐던 특정한 원인 때문에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현상이 발생한다.

인간을 생각하는 동물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과연 생각하면서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생각 없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반문하겠지만 진정한 의미의 생각은 습관적으로 생각하는 것, 타성과 고정관념에 젖어 사는 것을 뜻하지 않고, 이전과 다르게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내 의지나 의도와 관계없이 남의 생각이 내 생각 속으로 하루도 빠짐없이 들어 온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들어온 남의 생각이 내 생각의 주인 노릇을 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 생각을 기반으로 제기되는 의견일지라도 편견일 수 있고, 내 생각으로 이해한 것이 오해일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고 난 후 '의견'을 제시한다고 생각하지만, 그 '의견'은 습관적으로 생각해 온 '의견', 즉 자기 중심적 '편견'과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본 '선입견'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 '의견'도 '의심'해볼만한 '의견'인 경우가 많은 것이다. 우스갯 소리로 사람에겐 자기 나이만큼 키워온 '개' 두 마리가 있다고 한다. 그 개 이름은 '편견'과 '선입견'이다.

내 자신이 이제까지 해온 생각이 편견과 선입견으로 포장된 습관적 생각이나 고정관념, 타성이나 관성을 벗어나기 어려운 이유는 우리의 생각이 사각지대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의 생각은 사각사각 죽어가는 것이다. 죽어가는 것은 생각뿐이 아니다. 내 인생이 죽어가는 것이다. 죽어 가면서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을 보면 생각의 사각지대가 얼마나 치명적인지 알 수 있다. 내 생각이 죽으면 나 자신은 물론 나와 관계된 모든 것이 죽은 것이 된다. 심지어 하나님 조차 죽은 하나님이 된다. 하나님은 죽은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라는 의미가 그 것이다. 내 생각이 사각지대에 갇히면 나의 관점은 점차 사각형처럼 답답한 박스 안에 갇힌채 사각형의 안경을 쓰고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 그 사각형 안에 들어갈 수 없는것은 무의미하고 필요없는것이 되어 시각형 밖으로 추방당한다. 단단한 사각형 틀이 새로운 가능성의 문을 굳게 닫아 버리는 것이다. 환경이 닫힌 것이 아니라 생각이 닫혀 있으면 환경이 열려 있어도 닫힌 것이 된다. 환경이 닫혀 있어도 생각이 열려 있으면 닫힌 것이 아니다.

사각지대에 갇히게 되는 순간, 관습과 타성에 젖어 안색은 사색이 되고, 그 때부터 '상식'의 덫에 걸려 상식을 벗어난 '몰상식'한 발상을 인정하지 않는 '식상'한 삶을 살아가게 된다. 식상한 생각으로 인해 자신 뿐 아니라 많은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생각이 이미 죽어 있었기에 결과적으로 죽고 죽이는 사건으로 나타나는 뉴스가 많은 사람의 생각을 절망하게 한다. 관습과 타성에 젖은 상식은 다시 습관과 결탁하여 '고정관념'으로 변질된다. 상식은 좌정관천의 경험과 합작하여 '편견'으로 전락한다. 상식은 새로운 생각을 거부하면서 '선입견'으로 굳어진다. 상식은 관습과 어울리면서 웬만한 타격으로는 깨지지 않는 '타성'으로 자리 잡게 된다. (고후 10장 4-6절)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너희 복종이 온전히 될 때에 모든 복종치 않는 것을 벌하려고 예비하는 중에 있노라' 하나님은 우리 안에 구축된 하나님을 거부하고 대적하는 생각의 진을 파괴시키신다.

우리에게 가장 큰 위협은 경쟁자가 아니라 성공이 우리를 안주하게 만드는 과거의 성공경험이다. 과거에 성공했던 사람이 자신의 능력과 방법론을 절대시하는 과오를 범하는 현상을 아놀드 토인비는 'hubris(오만, 자기과신)'라고 불렀다. 오만의 함정이 치명적인 이유는 함정에 빠졌다는 사실을 전혀 모를 뿐 아니라 인정조차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 함정은 멸망의 함정이 아니라 성공의 정상이라고 확신하고 있는 것이다. 택한 백성을 40년 동안 광야에서 연단하신 하나님의 뜻은 '두렵건대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하노라. 또 두렵건대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할까 하노라'(신8:14,17)이다. 마귀는 우리의 생각을 사각지대에 빠지게 하고 빠진 사실을 모르게 한다. 그리고 그 상태를 계속 정당화 시키고 합리화 시킨다. 그리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합법적으로 망하게 하고 지옥가게 한다. (잠4:23)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나의 생각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나는 지금 무엇을 지키기 위해 혼신을 다하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