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순호 목사(전 미국 장로교회 중서부지역 한인교회 총무)
(Photo : ) 현순호 목사

바울은 동역자를 넓은 의미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으로 간주했다. 흔히 남을 위해 한평생 희생과 봉사를 하는 동역자 사이는 언제나 화목하고 사랑이 넘칠 것이라 생각한다. 물론 그런 면이 있지만 기대하는 만큼은 아닌것 같다.

 

인간이 태어나면서 같이 따라오는 것 중의 하나가 타인과의 갈등이다. 심지어 예수님의 제자들 사이에도 갈등은 계속 존재했다. 하루는 선생님이 십자가를 지시려고 예루살렘을 향해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데 뒤따라 오는 제자들은 얼굴을 붉히며 싸우고 있었다. 내용인즉 이번에 예루살렘에 가면 선생님이 왕이 될텐데 누가 국무총리를 하고 누가 비서실장을 할 것인가 였다. 그 틈에 한 어머니가 끼어들어 “선생님, 이번에 왕이 되시면 내 두 아들을 선생님의 좌우에 앉게 해 주십시요”라고 간청을 하자 그 꼴을 보고 있던 다른 제자들은 분통이 터져 그 어머니와 두 제자들을 증오했다. 아무리 좋은 선생님 밑에서 몇 년씩 훈련을 받아도 못 고치는 병은 남보다 높아지려는 본성이다.

여기서 잠깐 미국 이민역사를 살펴보자. 1620년 이래 많은 청교도들이 오직 신앙의 자유를 위해 새 땅으로 몰려오면서 신앙 공동체를 형성했다. 그런데 그들 안에서도 심한 갈등이 생겨 결국 신앙의 동지들이 갈라져 그 일부는 정착지에서 쫓겨나듯 로드 섬(Rhode Island)으로 갔고 그후에도 일부는 심한 갈등에 밀려 다시 쫓겨난다. 이유인즉 미국의 원주민들을 학대하고, 노예로 팔고, 죽이는 것이나 여자들을 차별하는 것은 성경에 위배된다고 강조한 것이 갈등의 원인이었다.

오늘날에도 미국이나 한국의 교계에서 평신도보다 제직 간에 심한 갈등이 더 많고 나아가 목사를 포함한 당회원들 간의 갈등이 심각하다. 그 원인은 남을 섬기라는 예수님의 교훈은 뒷전으로 밀어내고 타인을 지배하려는 욕심에서 비롯된다. 그런 사람들이 모이는 단체에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 가능하면 서로 조금씩 양보해서 윈-윈(Win-Win)으로 끝나면 얼마나 좋을까! 여기에는 조건이 있다. 자기 주장을 어느 정도 양보해야 하는데 그러면 하나님의 뜻을 어긴다고 생각해 절대 양보를 안한다. 자기의 생각을 하나님의 생각과 동일시 하고 상대를 마귀로 간주하기 때문에 동역자 간의 갈등은 일반인보다 더 심각하다.

그래서 나는 바나바에게서 롤 모델을 찾는다. 바나바와 바울의 관계는 부자지간처럼 되어 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죽이는 일에 앞장섰던 바울이 예수님을 만난 후에는 자숙하는 심정으로 다소라는 곳에 숨어 있을 때 그를 찾아가 안디옥교회로 인도해서 사도가 되도록 도운 사람이 바로 바나바다. 또한 예수님의 제자들도 바울을 반신반의 할 때 그들을 찾아가 바울을 동역자로 받아들이도록 한 사람이 바나바다. 그런데 두 사람 사이에 갈등이 생긴다. 후배인 바울의 인기가 선배인 자기를 앞지를 때 그도 사람인데 왜 갈등이 없었을까? 하지만 사랑으로 극복한다. 또 다른 예로 바나바와 사도 베드로가 몇 명의 유대인과 이방인들과 같이 식사를 하는 중에 나타난 바울은 신앙의 대선배들을 향해 위선적인 행동을 했다고 책망했다. 그 때 바나바는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언제부터 저렇게 당당해지고 교만해졌나?’고 생각할 법도 하다. 그러나 그는 웃으며 받아넘겼다. 더욱이 제2차 전도여행을 떠나게 될 때는 두 사람이 크게 부딪친다. 제1차 전도여행 도중 도망간 마가를 다시 데리고 가자는 바나바에게 바울이 정면으로 반대하고 나섰다. 바나바는 실수했던 젊은 마가에게 또 한번의 기회를 주자는 관용이었지만 바울은 받아들이지 않아 결국 심하게 다투고 헤어져 따로따로 전도여행을 떠났다. 얼마나 섭섭했을까! 바울 자신도 실수가 많은 사람인데, 실수한 마가를 다시 훈련시키려는 자기에게 비판적으로 맞설 때 울고 싶었을 것 같다. 그래도 바나바는 웃으며 잘 넘겼다.

동역자 간에도 갈등은 있을 수 있으나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위해 십자가를 지신 그 눈물겨운 사랑을 생각하면 얼마든지 좋게 해결할 수 있다. 남을 나보다 더 높이는 마음만 있으면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