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찻집에서의 다셔지는 입맛은
지금 내, 가셔지지가 않아 언제까지 내 입안에서 돌고 있을까

손, 발 움직이는 몇 개 피노키오 줄 색깔 인형, 사들고도 한껏 좋아지는 마음
구름과 햇빛이 엇갈린 장난 끼 같은 몇 낱알 빗줄기를 즐기며
골목을 돌아 나온다.

칼렌타륨 과 플라네타륨 70m의 천문 시계탑 아래 모여 든 군중과 섞여
1410년에 프라하대학 수학교수 하스즈 작품 에 숨은 이야기_
대형 시계의 아름다움을 더 만들 수 없도록 하기 위해, 왕은
하스즈의 두 눈을 불덩이로 지져 눈을 멀게 하자,
장님이 된 하스즈는 어느 날, 그 탑에 아무도 모르게 다시 기어 올라가

눈 감긴 손으로 얼마동안을 만지작거리더니,
작동은 멈춰지고, 시계는 다시 400년을 움직이지 않았다 하는 이야기

時間 알림을 말 한다 하면, 우리의 죽음과도 직결되는 이야기
해골 조각 몸뚱이, 가슴뼈대, 또 그 팔뚝의 뼈대 인형의 잡아 다닌 쇠줄로
시계 위의 황금 닭이 소리 처 울어 댐과 함께
12사도 인형들이 창문을 통해 비껴서 가면,
대형 둥근 2중 벽시계 옆으로 인형들의 상징들이 옴지락거리는데,
거울을 든 에고이스트, 또 이름 명단 적힌 책과 펜을 든 연대 기록 가 인형,
상징적 시간 의미로, 인간 내면 깊은 상징을 읽혀주려는
천문 시계탑인가.

골목 맞은편, 고딕양식의 두 개의 검정 뾰족 탑 교회당 지붕은, 기구하게도
한 때, 공산당 점령시의 무서운 점령지 당 지도부 건물이 되었었다 는데,
틴 교회당 광장 비켜 서 있는 높다랗게 푸른 녹색 동상은
루터의 교회개혁의 해보다 백년이 앞서
그 시대 구교의 교회 횡포에 항거하여
그리스도의 첫 번째 교회로 회귀하자는, 반기를 들어 화형에 처해지고 만
얀 후쓰, 그리고 함께한 순교자들의 동상
바로 이 자리가 그 화형 장이었다니..
가슴으로 파고드는 불끈거리는 아픔 이는데

얀 훗쓰 청동상 되돌려 올려보는
아스라이 다부지게 입술 지긋 깨물면서,
숭고한 당신의 뒷모습을 무겁게 가슴 속에서 못 지워
청동상 아래 새겨 있는 글을, 쉰 목소리로 불러본다.
‘진리를 말하고, 진리를 외치고 진리를 지키라!’
이, 生命과 바꾼 외침이었으니

그 눈물자국 가시기 위해 돌아 선
뉘엿거리는 도시 누각 위의 연보라 노을이
마음 한 가득 담아 남겨져서
저려진 코허리 끝 시림을 식혀
내일의 출발 위한 달큼한 휴식으로 눈 감아도
그렇게 잠 못 들어 하는 새벽은
여전히 다시 솟아오르는 해의 활기 찬 아침으로
햇살 열려져가는 새로운 太陽..

 
 


인간의 삶과 時間, 이 두 사이의 연관관계는 사람 누구나 에게도 막론하고 밀접한 함수관계의 긴장관계로 연관 지어 있는 삶의 역학관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때로는 사람들은 이 연관을 일부러라도 잊어버리고 싶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차피 역시 누구나 에게도 얼마 못가서, 이는 正面에 현실로 부딪쳐 맞고 맙니다.

이것이 헝가리 프라하의 거대한 <하스즈의 시계탑>의 상징이 되겠습니다. 나 자신에게도 이 느닷없는 다가서 온 巨塔 아래서, 그 숨어있는 사연과 함께 찡하게 머릿속에 부딪쳐 오는 전율 같은 소리가 들려오는 듯 했습니다. 거기다가 바로 그 광장 곁 건물 저 절묘하게 서있는 교회당이 또한, 점령시의 무시무시한 공산당 본부 건물로 사용되었다 하는 역사에서 또 離反(이반)적인 아이러니 感情이 스쳐져 왔습니다. 그런데 거기다가 또, 광장 바로 건너편으로는, <얀 후쓰>殉敎者의, 敎會를 바로 지키려다가 순교하는 火刑 場 現場이라니, 참 여기 프라하 광장은 역사 속에 엉켜 있는 쓰라린 아픔이 흠뻑 뭉켜져 있는 교차로의 頂點(정점)임을 마음 속 깊게 되새겨 보여 왔습니다. 어느 세계 歷史에서나, 그 흘러내려 온 굴곡의 교차점 離反이 점점이 점철되어 왔던 게 현실이었겠지만, 또한 인간 개개인의 生涯 속에서도 역시 이런 그림들이 왜 없겠으랴, 되짚어 봅니다. 그런데 이 같은 고비들을, 신앙의 사람들은 또 다, 결국은 긍정적으로 넘겨 내 갈 수 있는 신앙깊이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으며, 아니 그대로 끝내버리고 마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새 세계로 前進해 나아 갈, 세계를 마음 안에 광활(廣闊)하게 다짐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