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를 회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집에 나와 아버지의 긍휼과 은혜를 구하지 않으면, 우리의 영혼은 살 수가 없음을 깨닫고 실천해야 합니다. 그래서 김남준 목사님의 <새벽기도>라는 책을 소개합니다. 저자는 ‘새벽에 일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주제로 성경의 인물들을 소개합니다. 간단하게 각 장의 핵심 내용을 기록해 보겠습니다.

제1장에서는 ‘여호수아의 새벽’을 통해 ‘능력의 하나님’을 말합니다. 여리고 성을 무너뜨릴 때의 모습을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죠. 철옹성과 같은 여리고 성이 6일 동안은 금도 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꾸준히 새벽을 깨우며 기도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며, 하나님은 준비하고 계셨던 겁니다. 사람은 ‘결과’만을 주목하지만, 하나님의 시선은 ‘과정’ 하나까지도 놓치지 않으신다는 것을 믿고, 새벽 제단을 쌓으며 삶 속의 여리고성을 능히 무너뜨리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제2장에서는 ‘히스기야의 새벽’을 통해 ‘승리의 하나님’을 말합니다. 시편 46편은 히스기야 왕 시대에 앗수르가 예루살렘 성을 포위하고 유다를 공격한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불순종과 우상숭배에 빠진 북이스라엘을 점령한 앗수르는 유다까지 침공하는데, 당시 강대국이었던 앗수르와 유다의 싸움은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전력이었습니다. 하지만 히스기야는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실 것이다!’는 확신을 가지고, 상황을 넘어 하나님을 의뢰했습니다. 결국 ‘전쟁은 여호와께 속했다’는 믿음이 히스기야와 예루살렘성을 살렸고, 그 감격의 고백이 바로 시편 46편 5절이 됩니다. 세상의 어떠한 강력한 힘도 새벽을 깨우며 기도하는 나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믿고, 기도로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제3장에서는 ‘롯의 새벽’을 통해 ‘구원의 하나님’을 말합니다. 롯은 육신의 눈으로 ‘소돔과 고모라’를 선택했지만, 땅이 너무 타락해 하나님은 멸망시키십니다. 롯은 소알 땅으로 피하게 하시는데, 그 시간이 새벽이었습니다(창 19:23). 왜 하나님은 믿음 없는 롯을 구원하셨을까요? 아브라함의 중보기도 때문입니다(창 19:29). 나의 중보기도를 통해 영혼이 생명을 얻음을 믿고 기도하는 축복의 통로가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제4장에서는 ‘모세의 새벽’을 통해 ‘기적의 하나님’을 말합니다. 홍해 사건을 우리는 잘 압니다. 앞에는 홍해, 뒤에는 애굽 군대, 진퇴양난입니다. 죽음의 공포가 몰려옵니다. 그 때 하나님은 기적을 베푸십니다. 죽음의 공포 속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른땅으로 걷게 하셨고, 기세가 등등하던 애굽 군대들은 수장시키셨는데, 그 시간이 새벽이었습니다(출 14:27). 떠오르는 아침 햇살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얼마나 감격했을까요? 우리도 매일 아침 해를 그런 영적인 감격 속에서 맞이하기를 바랍니다.

제5장에서는 ‘광야백성의 새벽’을 통해 ‘은혜의 하나님’을 말합니다.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250만에서 300만 명으로 추산됩니다. 따라서 이동할 때마다 먹는 문제는 심각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인도하신 하나님은 새벽마다 은혜로 채우셨습니다(출 16:13-14). 새벽이슬이 내릴 때 만나를 통해 매일 매일 먹이신 겁니다. 하늘 이슬에 젖으며 하루를 시작해 보십시오. 분명히 당신의 삶은 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제6장과 7장에서는 ‘다윗의 새벽’을 통해 말씀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새벽에 응답했습니다(시 108:1-2). 새벽마다 견고하게 마음을 하나님께 정하며 산 다윗은 영안을 소유할 수 있었고, 하나님의 풍성한 복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지금 누리는 내 삶이 부족합니까? 하나님을 향한 견고한 마음이 있는지, 마음을 정해서 새벽을 깨우려는 결단이 있는지 진지하게 질문해 보시기 바랍니다.

제8장에서는 ‘예수님의 새벽’을 통해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바쁘게 사셨습니다. 따라서 새벽에는 쉬고 싶은 마음이 있으셨을 겁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막 1:35) 바쁘고 피곤하다는 이유로 새벽을 포기하지 마시고, “주님, 이 새벽 시간에 기도하러 가는 것까지는 제가 합니다. 그러나 마음을 쏟아 기도할 수 있는 힘을 주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저를 도와주옵소서.” 이런 마음을 품고 새벽을 깨워보십시오. 그 영적인 몸부림 속에 놀라운 은혜가 임할 것입니다.

제9장에서는 ‘막달라 마리아의 새벽’을 통해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 마리아는 눈물로 살았습니다. 그러니 밤새 울고 맞이하는 새벽이 얼마나 힘들고 괴로웠겠습니까? 부활의 새벽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갔을 겁니다. 동이 터 오기 전 이른 새벽에 예수님의 무덤에 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때 주님은 사랑하는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이르되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 하니(이는 선생님이라는 말이라)” 새벽에 애통하며 주님 앞에 나오십시오. 슬픔의 눈물을 소망의 눈물로 바꿔주실 것입니다.

마지막 제10장에서는 ‘베드로의 새벽’을 통해 말씀합니다. 저자는 요한복음이 문학적인 완성도를 고려한다면 20장에서 끝나야 하는데, 21장이 있는 이유는 베드로를 위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지만 실패하고 부인한 후에 낙향한 베드로! 그 상한 마음을 그대로 두고 승천하실 수 없었기에 예수님은 의미 없는 그물질을 하는 베드로에게 가셨는데 그 시간이 새벽이었습니다(요 21:4). 그리고 깨닫지 못하는 베드로를 위해 해안가에 조반을 준비하셔서 먹이시며 말씀을 나누십니다.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요 21:15) 여전히 주님의 수준에 올라오지 못했지만, 주님을 사랑하는 그 마음 하나만 확인하시고, 예수님은 그를 치유하시고 떠나셨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그 사랑에 감격하며 순교할 때까지 주를 위해 살게 되죠.

초등학교 2학년 겨울방학 때, 시골에 계신 할아버지 댁에 놀러간 적이 있었습니다. 읍내에 가려면 평소에도 30분 정도 걸리는데, 폭설이 내리는 새벽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목도리를 둘러매고 새벽기도회에 가셨습니다. 어린 마음에 ‘눈길을 밟으면 재미있겠다!’ 싶어 따라 나섰습니다. 교회까지 1시간 30분을 걸었습니다. ‘왜 새벽부터 이 고생을 하는 거야!’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일제시대 예수를 믿은 조부모님의 결단과 평생 새벽을 깨우며 사시는 부모님 때문에 내가 살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자신을 위해, 자녀와 자손을 위해 ‘믿음의 가문’을 꿈꾸며 새벽 제단을 쌓으십시오. 아브라함이 가는 곳마다 제단을 쌓았기 때문에 ‘믿음의 조상’이 되었고, 그 자손들은 놀라운 복을 누렸습니다.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도 그 복을 누리면 좋겠습니다.

이훈 목사(하늘뜻섬김교회 담임) www.servingod.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