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주한인여성목회자협의회(회장 김금옥 목사)와 대뉴욕지구한인교회협의회(회장 양승호 목사)가 공동으로 26일 뉴욕순복음연합교회에서 신경림 목사 초청 목회자 세미나를 개최했다.
‘목회자의 정체성 회복’이라는 주제로 열린 이번 세미나에서 신경림 목사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 shame 증상을 설명하면서 여성목회자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바로 할 때 진정한 자유로움을 얻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신경림 목사는 미국에서 많은 시련과 도전 끝에 여성 목회자의 길을 걷게 됐다. 현재 워싱턴 지역에서 미국교회를 훌륭하게 이끌면서 또 한국인으로서는 유일하게 웨슬리신학대학원 교수로 활동하고 있는 인물이다.
신경림 목사는 여성목회자로서 미국 내에서 사역해 나가야하는 어려움과 코리언 어메리칸으로 한인교회와 미국교회에 모두 흡족할만한 모습을 보여야 하는 이중잣대의 기준 속에서 여성 목회자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바로 할 것을 주문했다.
신경림 목사는 “2012년은 1990년대나 2000년 초반과 다른 새로운 모습의 목회를 해야 하는데 우리가 과거에만 묻혀 있어서는 안 된다”며 “또 오늘의 우리의 모습을 모르면 미래의 목회를 할 수 없기에 우리의 정체성을 찾아 미래를 준비하는 여성 사역자들이 되기 바라는 마음에서 강의를 준비했다”고 설명했다.
신경림 목사는 감리교신학대 졸업 후 개렛신학대학원 목회학 석사과정, 웨슬리 신학대학원 목회학 석사과정, 하버드대학교 MLE과정 등을 수료했다. 또 미연합감리교 영성 아카데미 2년 과정도 수료했다.
경력으로는 메모리얼 미연합감리교회 담임, 웨슬리 신학대학원 공동체 담당 학장, 워싱턴 정신대 문제대핵위원회 이사장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웨슬리 신학대학원 및 신학원 강사, 워싱톤 감리교회 협동목사로 섬기고 있다. 다음은 신경림 목사 강의 내용.
제가 지금 휴직 중이다. 일을 한하고 있고 원래 여기도 오면 안 되는 것이었는데 의리 때문에 약속을 했기 때문에 왔다. 사실 휴직을 해서는 안 되는데 도저히 일을 할래야 할 수 없어서 휴직을 하게 됐다. 어쩌다 이런 일이 나에게 생겼는가 고민도 하게 된다. 생각해보면 어려서부터 많이 아팠던 것이 기억난다. 저는 무남독녀였기 때문에 만일 아프면 가족들이 모든 신경을 저에게 집중했기 때문에 건강을 회복해 왔던 것 같다. 휴학을 많이 했는데 교과 과정에 뒤떨어져 많이 힘들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도 여러달을 휴학했다. 그 때 제가 죽는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모든 병원에서는 저를 다 포기했었다. 병원에 있을 필요도 없다고 해서 집에서 요양을 하는 지경까지 이르렀었다. 대학 다닐 때 37KG이었다. 밥 한번 먹는 것도 힘들어서 조그만 도시락을 다 비우면 아버지가 그렇게 기뻐하셨다. 그러던 중 제가 20년 동안 튼튼했고 세계 여러 나라를 다니다보니
공항이 저에게 어떤 때는 낯이 익을 때도 있을 정도로 많이 활동하고 다닌다. 어떤 분은 어떻게 그렇게 일을 할 수 있느냐고 물어볼 때도 있다. 학교에서도 교수 중에는 한국인이 저 혼자 뿐이다. 미국사람들과 함께 일하는데 미국 사람들은 체력이 좋다. 특히 총장님의 체구는 저의 2배다. 한국은 즉각즉각 일정을 바꾼다. 계속 핸드폰으로 통화하고 신경써야 한다. 어느날 총장님이 너무 힘들어 하니까 당신 페이스대로 하지 말고 총장님 페이스대로 맞춰 주라고 한다. 그 큰 체구의 총장님도 못 따라 올 페이스로 일했었다. 이렇게 일을 하다보니까 별명이 저에게 붙었는데 철의 여인이라고 한다. 어떤 이는 세계 7대 불가사의에 이어 8대 불가사의라고 한다.
그러던 중 지난 가을부터 앓기 시작해서 일을 못하게 되는 상황에 왔다. 얼마나 답답한지, 또 하나님께서 저를 이제 사용하지 않으시는가 생각도 됐다. 그리고 그동안 잊고 있었던 것이 떠올랐다. 제가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 쉬운 것을 저는 잊고 살았던 것 같다. 사실 신호는 있었다. 비행기 안에서 혈압이 떨어져서 쓰러지기도 하고 몇 번 갑자기 아픈 경우가 있어서 치료를 급하게 받았다. 하지만 2~3일 정도 쉬면 몸이 다시 회복됐기 때문에 그것이 경고인지 알지 못했다. 여기 있는 분들 중에도 내가 인간이라는 것을 잊고 사는 분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인간이고 한계가 있다. 이것은 누구에게나 적용이 되고 그것은 언제든 찾아올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미리 아시고 인정하시고 받아들이시고 현명하게 사시기 바란다.
이번 주제가 목회자의 정체성 회복이다. 짜고 정한 것도 아닌데 너무도 맞게 정했다. 참 훌륭한 제목이다. 목회자의 정체성을 보기 위해서는 나의 정체성을 봐야 한다. 왜냐하면 나는 목회자이지만 그 전에 인간이다. 우리가 인간이고 목회자이고 이 두 가지를 다 알고 그리고 두 가지에 다 집중해서 살아야 사고를 치지 않고 잘 살 수가 있다.
질문이 있다. 첫 번째 질문 나는 누구인가. 이것을 떠올려 보라. 형용사도 괜찮고 부정형도 괜찮다. 어떤 학교에서는 어떤 정보만 주면 되지 왜 사람을 변화시키려 하느냐고 따지는 학생도 있었다. 변화가 없이 정보만 주면 교육이 아니다. 이렇게 teaching이 필요한 것은 변화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은 딱딱한 학문적인 이야기는 하지 않고 우리 자신을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기 바란다. 나는 누구이며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 생각하자. 그리고 옆에 있는 분들과 이야기를 해보자.
두 번째 질문이다. 남들은 나를 누구라고 하는가. 교회에서는 혹은 한인공동체에서는 나는 어떤 존재인가. 남들이 나를 제대로 봤을 수도 있고 또 다른 가능성은 자신이 남의 판단에 귀를 기울이고 의존했을 가능성도 있다. 미국 사회가 하는 이야기 혹은 한국 커뮤니티의 이야기 그것을 받아들여서 정체성으로 삼고 있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세 번째 질문을 드린다. 사람들은 나를 어떤 사람이기를 바라는가. 다른 사람의 나에 대한 기대를 생각해보자. 교회의 기대, 교단의 기대, 배우자의 기대, 자녀들의 기대 또 미국이란 나라의 나에 대한 기대, 한국사람들이 나에 대해 바라는 것들을 떠올려 보자.
우리는 그 기대를 다 이룰 수 있는가. 절대로 그럴 수 없다. 이 세상 사람들이 원하는 것, 그런 모습이 되기 위해서는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고 한쪽에서는 화를 참으라고 하고, 또 한쪽에서는 분개해야 한다. 일어나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니 절대 우리는 모든 사람들의 기대를 충족할 수 없다. 그렇게 될 때 우리 마음에 좋은 목회자, 좋은 부모, 좋은 남편 등등의 칭찬과 평판을 모든 사람에게서 듣고 싶지만 못 듣는다. 그 때부터 비극이 시작되는 것이다. 우리는 한국에 있는 한국 사람보다 한 가지 더 문제가 있다. 코리언 어메리칸은 이중잣대에 맞춰야 하는 운명이다. 한국사람이 원하는 것과 미국사람이 원하는 것이 있다. 저는 이 것을 너무 잘 안다. 여러분도 이미 경험했을 것이다. 저의 경우 학교에서 빈틈없이 준비해서 인솔했을 때 1.5세인 사람이 고민하다 저에게 말했다. 그쪽 교회 목사님들이 저를 너무 싫어한다는 것이었다. 이유인즉 한 달 전에 보내도 되는 스케쥴을 1년 전에 보내고 몇 개월 전에 이미 이렇게 하고 저렇게 해야 한다고 해서 싫어한다는 것이었다. 내용을 바꿔서 한국식으로 맞췄더니 이제는 미국학교쪽에서 왜 알려주지 않느냐고 난리가 났다.
저는 사실은 남편을 위해 접시를 닦아서 남편 공부시키기 위해서 미국에 온 것이다. 영어학원 한번 가지도 않았는데 제가 공부를 한다는 것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아이 둘을 돌봐야 했고 남편이 한인교회를 하니까 사모로서 일도 바빴다. 그러던 중 우연히 남편이 다니는 신학교에서 한 강의를 듣게 됐고, 그러다 강의를 다 듣게 됐고, 그러다 보니 학교를 다니고 미국에서 목사안수를 받게 됐다. 개척은 생각하지 못했었다. 지역 한인들이 90명이었고 그중 79명이 남편의 교회를 출석하고 있었다. 미국교회를 한다해도 영어 잘하는 다른 미국 성직자들이 우선이다. 그런 중 어느 기회에 미국교회 담임에 대한 심사에 응할 수 있었다. 그 심사에서 물어보는 것이 남편 교회를 포기하고 이 교회에 전념을 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들이 원하는 대답은 남편 교회의 일을 정리하고 이 교회만 전념을 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 교회에 대한 책임은 다 완수하겠지만 다른 이들을 외면할 수는 없다고 했다. 속으로 안 되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감리사가 와서 이 교회를 해도 된다고 했고 또 원하지 않는다면 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하겠다고 했다.
알고 보니 이 교회는 문을 닫으려는 교회였다. 교단에서 볼 때도 제가 실수해서 교회를 닫게해도 크게 부담이 없는 곳이었다. 최연소는 60세에 가까웠던 교회다. 그런 교회에 미국에 온지 3년 밖에 되지 않았고, 영어도 서툴고 모든 것이 부족한 사람이 목회를 하게 됐다. 책임감을 느꼈다. 도시에 신문에 크게 났다. 아시아 여자가 백인교회 담임이 됐다는 내용이었다. 때문에 어떤 경우에서든 잘해야 했다. 여기서는 미국 목회자가 문제를 일으켜도 문제를 삼지 않지만 한국 목회자가 문제를 일으키면 한국 목회자 자체에 대한 평가가 절하된다. 이것이 이중잣대의 모순이다. 더욱 열심히 목회했고 교회가 매우 잘 됐다. 그런데 한인 때문에 상처를 받았다. 사모가 나서기 위해서 목사 안수를 받고 백인교회를 맡고 있다고 하니
어떤 사람은 꿈에 하나님을 봤다고 한다. 남편도, 자식도 버리고 미국교회로 가버린 것을 지적하셨다는 것이다. 엄마가 너무 바빠지니까 아이들도, 또 남편도 좋아하지 않았다. 심지어 저보고 나쁜 여자라고 했다. 남편 교회 사람들이 와서 우리 교회를 막 뒤지기까지 했다. 목회를 잘하는지 못하는지 보러 온 것이다. 미국교회 목회를 해야 하는데 영어설교도 준비해야 하고 남편이 목회 하는 것보다 10배나 더 노력해야 한다. 또 남편은 아이들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그래도 저는 좋은 여자, 괜찮은 엄마 소리, 좋은 목회자 소리를 듣고 싶어서 열심히 일했는데 저보고 나쁜여 자라고 하더라. 이것이 정신적으로 너무 스트레스가 됐다. 미국교회 심방을 끝내고 집으로 가는 길에 뭘 먹을지 생각부터, 아이들 옷 준비, 일 준비 등등이 꼬리를 물고 따라오면서 미칠 것 같았고 앞에 트럭이 있었는데 ‘stop’사인에 박고 싶은 마음이 들기까지 했다. 그러면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마침 영성 아카데미를 그 때 했었던 것이 도움이 됐다. 영성 아카데미를 가야 하는데 너무 늦어서 바쁘게 챙겨 갔는데 남편이 우리 저녁은 어떻게 하느냐고 물어보는 것을 야속한 눈으로 쳐다보고 떠났던 기억이 난다. 아카데미에 갔더니 이유없이 막 눈물이 났다. 아무 생각 하지 말고 있어보라고 하더라. 아무것도 안하고 있었더니 그런 적이 없어서 매우 불안했다. 그 때 호수에서 예수님의 형상이 보였다. 자세히 봤더니 예수님이 아무말없이 울고 계셨다. 그 눈물을 봤을 때 아 나는 세상에서 필요 없는 사람인 것처럼 생각이 됐는데 예수님이 나를 위해 울어주는 그런 사람이 저라는 것을 알게 됐다. 물론 신학교에서 예수님의 사랑에 대해서 배우고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은 단순히 정보였다. 그러나 그날 본 예수님은 제 마음에 깊이 새겨지게 됐다. 거기 영성 아카데미에서는 독방을 주는데 독방에서 말하지 말고 묵상하라고 했다. 그 묵상 중에 나는 하나님의 자녀이고 한국사람으로 사는 것이 문제될 것 없다는 것을 결심하게 됐다. 마음에 기쁨이 임했다.
성만찬식에서 제가 주기도문송을 한국말로 부르겠다고 했다. 그 높은 찬양을 또 한국말로 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그날 그것을 불렀고 성만찬식은 매우 은혜 가운데서 눈물로 진행됐다. 지금까지는 무엇을 할 때 옆에서 그것을 하는 사람은 당신이 처음이라고 말할 때 내가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생각이 바뀐 후 이전까지 했던 사람이 없다면 내가 창조적인 일을 한다는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됐다. 신학교에서도 승승장구하고 잘 자리잡게 됐다. 미국사람들이 못 보는 것을 우리는 볼 수 있고 또 한국 사람이 모르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코리언 어메리칸의 존재가 굉장히 독특하고 귀하게 여김을 받을 수 있다. 여러분도 이런 반전의 축복을 받기 바란다.
은혜를 받은 이후 제가 지금까지 왜 이렇게 힘들었는가 공부를 하고 연구를 했더니 알고보니 shame이었다. 이것은 정체성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어떤 것은 건강하고 어떤 것은 건강하지 않은지 묻는 조항이 있다. 나는 문제이구나 형편없구나 이런 식으로 해로운 shame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정의를 했는데 shame이란 다른 사람들 혹은 다른 문화가 정해놓은 스탠다드를 따라 갈 수 없을 때 생기는 열등감, 또 부적절한 느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shame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하면 과거에는 죄의식만 사람을 망치는 것인 줄 알았다. 그런데 shame은 내가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이기 때문에 깊이 있게 우리 마음 안에 자리 잡던 것이다. 보이지 않는 깜깜한 곳에서 점점 세력을 넓히고 커지고 있었다. shame이 있게 될 때 이것 때문에 우리는 다른 일을 더 못하게 되고 점점 더 우리의 상황을 나쁘게 한다. 점점 더 괴로워하고 이런 악순환이 우리 안에 거듭되게 된다. 나쁜 습관 중 하나가 우리를 절망하게 하는 것이다. 대부분 이 shame이 우리 안에 있는지 모르고 사는 경우가 있다. shame의 증상은 이렇다.
1. 자기 자신을 보여주기를 꺼려한다.
2. 극히 수줍어하거나, 금방 당황하고, 열등감을 느낀다. 자신이 잘못을 저질렀다고 생각하는 대신에 자기 자신이 문제라고 생각한다.
3. 자기가 어떻게 노력하더라도 상황은 안 달라질거라고 미리 포기한다.
4. 누가 충고하는데에 대해 강력하게 변명하려 든다.
5. 자신이 비난받지 않기 위해 남을 먼저 비난한다.
6. 모든 잘못이 늘 자기에게 있다고 생각하고 항상 사과한다.
7. 사람들에게 사랑과 관심을 받는다할지라도 늘 외로워한다.
8. 자기가 믿는 바를 억지로 다른 사람에게 믿게 하려고 한다.
9. 자기 자신을 추하다거나 결점 투성이라고 생각한다.
10. 모든 일을 하려면 완벽하게 하든지 아니면 안 해야된다고 생각한다.
11. 우울증이 있다.
12. 거짓말을 잘한다.
13. 끊임없이 일하거나, 먹거나, 물건을 사들이거나 술을 마신다.
14. 남에게 무조건 의존하거나 혹은 절대 남의 도움을 받으려하지 않는다.
여기에 해당되는 경우가 많을 경우 shame으로 볼 수 있다. 누구나 shame을 갖고 있다. 한국 사람들은 특히 shame이 많다. 미국사람은 다른 것을 인정하는 경향이 많지만 한국은 달느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 식당에서 주문할 때 한국사람들은 통일을 좋아한다. 그런 문화에서 우리는 살았기 때문에 그룹 오리엔트 문화에서는 더욱 심하다. 그리고 목회자는 더욱 심하다. 목회자에 대한 기대가 굉장히 크기 때문이다. 때때로 예수님조차 하실 수 있을까 하는 일을 바라고 요구하는 경우도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어떻게 이 shame이 생겼고 이것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
다른 중요한 것도 많지만 먼저 왜 교회에서 조차 이 shame이 있는지 보고자 한다. 우리 신학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우리의 해석이다. 이 해석들이 잘못된 것이 있어서 우리가 shame을 가지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무조건적인 희생, 여태껏 무조건적으로 희생해온 분들이 있는가? 없다. 그리고 무조건적인 희생만을 해서는 안 된다. 희생은 어느 정도 필요할 때 하는 것이지 무조건적 희생을 하는 것이 다 좋은 것은 아니고 할 수도 없다. 우리가 이 희생에 대해 정립을 해야 한다. 죽기까지 참는 것도 다시 생각해야 한다. 우리가 기도할 때 ‘벌레만도 못한 우리’라고 한다. 그런데 말이 씨가 된다고 말을 계속하다보면 나 자신을 그렇게 생각한다. 교회에 공공연하게 쓰고 있다. 또 교회의 기대와 요구가 우리가 shame에 짓눌리게끔 만들어왔다. 교회가 갖고 있는 신학도 이런 경우가 많다. 어떤 선교사가 한국에서 가슴을 치며 우는 기도회에 인도받았는데 왜 저렇게 가슴을 치면서 우느냐고 물어보니 예수님이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셨기 때문이라는 대답을 들었다. 그런데 이틀, 삼일째도 같은 모양, 같은 대답이었다. 그래서 선교사가 물었다.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배우지 않았느냐고 했다.
맨날 내 탓이라면서 울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죽기까지 차는 것 누가 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하나님은 우리가 실패자로 살기를 바라시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 뿐만 아니라 교인들에게도 또 다른 면을 설교해야 한다. 하려고 했는데 실패했을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실지 생각해보자. 고생했다. 내가 알아.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것도 우리가 알아야하고 교인들에게도 우리가 전해줘야 한다. 교회에 말썽부리는 교인들이 있는데 어떤 목사님은 악하고 충성된 종이 제일 무섭다고 했다. 그런데 그런 종들을 가만히 보면 그 사람 안에 shame의 문제가 있는 경우가 정말 많다. 자기도 어쩔수 없어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우리 교회도 그런 분들이 좀 많이 계셨다. 그래서 남편이 저를 두고 이 shame을 두고 전 교인을 대상으로 수련회를 하기 원했고 수련회를 통해 정말 많이 변화됐다. 그런데 한번 shame 수련회를 통해 다 바뀌지 않았다. 영성 수련회 등을 통해 지속적으로 노력해야 한다.
우리의 정체성은 하나님이 정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누가 정하는가 하면 항상 나쁜 말을 하는 교인들의 정체성에 좌지우지된다. 한번은 남편이 목회를 26년했는데 이정도면 자신은 실패한 것이라고 그만두겠다고 했다. 그 때 남편에게 못살게 구는 교인 숫자를 세보자고 했다. 10명이 나왔다. 26년 목회해서 이정도 숫자가 나온 것은 목회를 잘못한 것이 아니다. 예수님 시대때도 예수님을 미워하던 사람들이 있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우리를 만드셨다. 그러니까 우리는 하나님 닮게, 하나님 같이 창조가 된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최고의 사랑의 표현이다. shame이란 것은 없었다. 이것이 진정으로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시는 모습이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불순종의 죄가 생겼다. 따먹지 말라는 것을 따먹었다. 왜 그런가. 욕심, 유혹 때문일 수도 있다. 뱀이 하와에게 선악과를 따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되어서 선악을 알게한다고 했다. 그런데 이미 하와의 상태는 하나님과 같은 형태였다. 하와가 창조된 상태는 하나님 같이 창조된 그 자체였다. 그러니까 뱀이 와서 네가 이것을 먹어야 하나님같이 된다고 할 때 ‘나는 이미 하나님과 같은 사람’이라고 하면서 뱀을 쫓아야 했다. 하와는 자기 자신을 몰랐다. 정체성의 문제가 이렇게 중요하다. 자기 자신을 모를 경우 착각하게 된다. 잘못이 저질러진다. 우리 자신이 얼마나 훌륭한지 못믿은 불신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자기 모습대로 창조해주셨는데 그런 하나님을 못 믿은 불신이다. 거기서 문제가 다 나온 것이다. 우리가 누구인지 잘못 알게 되면 이 소리, 저 소리에 넘어간다. 그리고 목사님 이렇게 하면 잘 할 수 있다고 하면서 넘어가게 된다. 어떻게 해야 잘 하는 것인가. 하나님에게 물어보고 하나님에게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이다.
우리도 우리 자신에 대해서 벌레만도 못한다고 생각하고 넘어간다. 부족하다고 생각하면 그냥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넘어간다. 채우려고 할 때 무리가 오기 때문에 그냥 포기하고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태초에 주어진 수치를 느끼지 않고 당당하게 살 수 있는 권리를 놓치게 됐다. 타락한 모습은 죄의 결과로 나타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께서 처음 만들어주신 본래의 모습대로 사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인 것이다. 그래서 정체성의 변화라고 하지 않고 정체성의 회복이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는 변화될 필요가 없다. 회복되면 되는 것이다. 본래 우리가 갖고 있었던 것을 회복하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다. 이미 우리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것이 더러워졌고 닦아만 내면 된다. 그래서 이번 주제 ‘목회자의 정체성 회복’이 너무도 감사하다. 세상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어떠한 모습에 너무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 우리가 할 일은 우리 본래의 모습을 회복하면 되는 것이다. Becoming이 아니고 Being이다. 자기가 가진 것을 불평하게 되고 공허하게 되다보면 유혹에 빠진다. 이것이 바로 사탄이 우리를 노리는 것이다. 거기에 절대 빠져서는 안된다. 우리를 하나님께서 지으시고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셨다. 마틴 루터도 We are good이라고 했다. 우리가 선한 사람이기에 선한 행위를 할 수 있다고 했다. 우리가 하나님이 선하게 만들어주신 것을 믿고 살면 그 믿음 때문에 우리가 선한 일을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콩심은데 콩나고 팥심은데 팥난다. 어느 누가 아니라 해도 거기에 넘어가지 말기를 바란다. 누가 아니라고 하는 사람이 오면 뱀이 왔구나 생각하면 된다.
존재와 행위 중에 어떤 것이 중요한가. 존재가 중요하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것을 믿고 살면 좋은 선한일을 할 수 있게 된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사도바울은 고백했다. 그가 자기 존재를 믿었기 때문에 그 감옥 속에서도 모든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을 믿을 수 있었고 이뤄졌다. 인간적인 방법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그 안에서 복음을 전파하고 싶었지만 그 믿음대로 됐다. 믿으면 이뤄지는데 그것을 안 믿으면 사탄의 유혹에 빠질 수밖에 없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입었다. 하나님께서 잘못했지만 잘못을 탕감해주셨다. 이제 잘못 없는 것으로 여기신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잘못한 것 때문에 그것에 매여 있다면 부모의 입장으로서는 매우 속이 터지는 것이다.
캐톨릭의 어떤 수녀가 하나님을 만났는데 그것이 진짜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어서 교황에게 확인을 했다. 교황이 봐도 아리송해서 교황이 지혜를 냈다. 세상 사람이 모르고 나만 아는 죄가 있는데 그것을 물어봐서 그것을 알면 하나님일 것이다. 그래서 수녀가 그대로 물어봤다고 한다. 교황도 매우 궁금해 했다. 그런데 그 수녀가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기억을 못하신다고 했다고 한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다. 예수님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하셨다. 우리에게 진리를 알려주시는 이유는 자유롭게 살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기억하지 않으시듯 우리도 우리 죄를 기억하지 말고 자유롭게 살아야 한다.
헨리 나우웬은 자유롭게 된 사람은 날마다 새롭게 산다고 했다. 시간은 늘 새롭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유롭게 된 사람은 얻은 자유로 기쁨을 선택한다. 아무리 흐리고 폭풍우가 쳐도 해는 있다. 해가 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 흐린 것을 알 수 있다. 기쁨이 반드시 있다는 것이다. 세 번째 자유롭게 된 사람은 희망을 갖고 산다. 세상 사람들에게 물어봐도 그러하다. 행복하느냐고 성공했느냐고 하면 욕심은 끝이 없기에 만족하고 있는 사람은 없다. 우리 삶에 고통과 아픔이 없을 수 없다. 있다. 그러나 그 고통과 아픔을 두려워하지 않고 껴안으면서 실패와 슬픔 가운데서도 기쁨을 선택하며 누리며 사는 사람은 자유롭게 된 사람이다. 여기까지가 제가 쓴 박사논문의 내용이다. 이제는 우리가 누구의 것이가를 제대로 알고 살아야 한다. 내가 누구인가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내가 누구의 것인가 이것이 분명해야 한다. 똑같이 중요하다. 저는 이것에 대한 답을 누가복음에 나오는 마리아의 말 ‘주의 종이오니 말씀대로 이루어지이다’ 여기서 찾았다. 비극적 상황에 있었던 마리아가 이렇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누구의 것인지에 대한 정확한 정체성이 있었다. 정체성을 세미나에 와서 알기만 하면 안 된다. 평소에 갖고 살아야 한다. 우리가 하루만 살아도 얼마나 많은 결정을 하는지 모른다. 그런데 그 결정은 평소에 갖고 있는 생각대로 하는 것이다. 우리의 미래를 어떻게 이끌 것인가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것에 의해 결정된다. 평소에 무슨 생각을 갖고 사느냐에 따라 우리 삶이 좌우된다. 순간의 선택이 영원을 좌우한다는 말이 맞는 말이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는 전적으로 지으신 분에게 달려 있는 것이다. ‘주의 종이오니’ 이것이 바로 우리의 정체성이고 삶의 이유다. 말씀대로 이루어지이다. 이것이 우리의 삶의 목표다. 그리고 우리의 삶의 결론이다. 주의 종이라는 분명한 자기 정체성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분명한 결론을 내려주신다.
‘목회자의 정체성 회복’이라는 주제로 열린 이번 세미나에서 신경림 목사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 shame 증상을 설명하면서 여성목회자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바로 할 때 진정한 자유로움을 얻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신경림 목사는 미국에서 많은 시련과 도전 끝에 여성 목회자의 길을 걷게 됐다. 현재 워싱턴 지역에서 미국교회를 훌륭하게 이끌면서 또 한국인으로서는 유일하게 웨슬리신학대학원 교수로 활동하고 있는 인물이다.
신경림 목사는 여성목회자로서 미국 내에서 사역해 나가야하는 어려움과 코리언 어메리칸으로 한인교회와 미국교회에 모두 흡족할만한 모습을 보여야 하는 이중잣대의 기준 속에서 여성 목회자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바로 할 것을 주문했다.
신경림 목사는 “2012년은 1990년대나 2000년 초반과 다른 새로운 모습의 목회를 해야 하는데 우리가 과거에만 묻혀 있어서는 안 된다”며 “또 오늘의 우리의 모습을 모르면 미래의 목회를 할 수 없기에 우리의 정체성을 찾아 미래를 준비하는 여성 사역자들이 되기 바라는 마음에서 강의를 준비했다”고 설명했다.
신경림 목사는 감리교신학대 졸업 후 개렛신학대학원 목회학 석사과정, 웨슬리 신학대학원 목회학 석사과정, 하버드대학교 MLE과정 등을 수료했다. 또 미연합감리교 영성 아카데미 2년 과정도 수료했다.
경력으로는 메모리얼 미연합감리교회 담임, 웨슬리 신학대학원 공동체 담당 학장, 워싱턴 정신대 문제대핵위원회 이사장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웨슬리 신학대학원 및 신학원 강사, 워싱톤 감리교회 협동목사로 섬기고 있다. 다음은 신경림 목사 강의 내용.
제가 지금 휴직 중이다. 일을 한하고 있고 원래 여기도 오면 안 되는 것이었는데 의리 때문에 약속을 했기 때문에 왔다. 사실 휴직을 해서는 안 되는데 도저히 일을 할래야 할 수 없어서 휴직을 하게 됐다. 어쩌다 이런 일이 나에게 생겼는가 고민도 하게 된다. 생각해보면 어려서부터 많이 아팠던 것이 기억난다. 저는 무남독녀였기 때문에 만일 아프면 가족들이 모든 신경을 저에게 집중했기 때문에 건강을 회복해 왔던 것 같다. 휴학을 많이 했는데 교과 과정에 뒤떨어져 많이 힘들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도 여러달을 휴학했다. 그 때 제가 죽는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모든 병원에서는 저를 다 포기했었다. 병원에 있을 필요도 없다고 해서 집에서 요양을 하는 지경까지 이르렀었다. 대학 다닐 때 37KG이었다. 밥 한번 먹는 것도 힘들어서 조그만 도시락을 다 비우면 아버지가 그렇게 기뻐하셨다. 그러던 중 제가 20년 동안 튼튼했고 세계 여러 나라를 다니다보니
공항이 저에게 어떤 때는 낯이 익을 때도 있을 정도로 많이 활동하고 다닌다. 어떤 분은 어떻게 그렇게 일을 할 수 있느냐고 물어볼 때도 있다. 학교에서도 교수 중에는 한국인이 저 혼자 뿐이다. 미국사람들과 함께 일하는데 미국 사람들은 체력이 좋다. 특히 총장님의 체구는 저의 2배다. 한국은 즉각즉각 일정을 바꾼다. 계속 핸드폰으로 통화하고 신경써야 한다. 어느날 총장님이 너무 힘들어 하니까 당신 페이스대로 하지 말고 총장님 페이스대로 맞춰 주라고 한다. 그 큰 체구의 총장님도 못 따라 올 페이스로 일했었다. 이렇게 일을 하다보니까 별명이 저에게 붙었는데 철의 여인이라고 한다. 어떤 이는 세계 7대 불가사의에 이어 8대 불가사의라고 한다.
그러던 중 지난 가을부터 앓기 시작해서 일을 못하게 되는 상황에 왔다. 얼마나 답답한지, 또 하나님께서 저를 이제 사용하지 않으시는가 생각도 됐다. 그리고 그동안 잊고 있었던 것이 떠올랐다. 제가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 쉬운 것을 저는 잊고 살았던 것 같다. 사실 신호는 있었다. 비행기 안에서 혈압이 떨어져서 쓰러지기도 하고 몇 번 갑자기 아픈 경우가 있어서 치료를 급하게 받았다. 하지만 2~3일 정도 쉬면 몸이 다시 회복됐기 때문에 그것이 경고인지 알지 못했다. 여기 있는 분들 중에도 내가 인간이라는 것을 잊고 사는 분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인간이고 한계가 있다. 이것은 누구에게나 적용이 되고 그것은 언제든 찾아올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미리 아시고 인정하시고 받아들이시고 현명하게 사시기 바란다.
이번 주제가 목회자의 정체성 회복이다. 짜고 정한 것도 아닌데 너무도 맞게 정했다. 참 훌륭한 제목이다. 목회자의 정체성을 보기 위해서는 나의 정체성을 봐야 한다. 왜냐하면 나는 목회자이지만 그 전에 인간이다. 우리가 인간이고 목회자이고 이 두 가지를 다 알고 그리고 두 가지에 다 집중해서 살아야 사고를 치지 않고 잘 살 수가 있다.
질문이 있다. 첫 번째 질문 나는 누구인가. 이것을 떠올려 보라. 형용사도 괜찮고 부정형도 괜찮다. 어떤 학교에서는 어떤 정보만 주면 되지 왜 사람을 변화시키려 하느냐고 따지는 학생도 있었다. 변화가 없이 정보만 주면 교육이 아니다. 이렇게 teaching이 필요한 것은 변화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은 딱딱한 학문적인 이야기는 하지 않고 우리 자신을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기 바란다. 나는 누구이며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 생각하자. 그리고 옆에 있는 분들과 이야기를 해보자.
두 번째 질문이다. 남들은 나를 누구라고 하는가. 교회에서는 혹은 한인공동체에서는 나는 어떤 존재인가. 남들이 나를 제대로 봤을 수도 있고 또 다른 가능성은 자신이 남의 판단에 귀를 기울이고 의존했을 가능성도 있다. 미국 사회가 하는 이야기 혹은 한국 커뮤니티의 이야기 그것을 받아들여서 정체성으로 삼고 있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세 번째 질문을 드린다. 사람들은 나를 어떤 사람이기를 바라는가. 다른 사람의 나에 대한 기대를 생각해보자. 교회의 기대, 교단의 기대, 배우자의 기대, 자녀들의 기대 또 미국이란 나라의 나에 대한 기대, 한국사람들이 나에 대해 바라는 것들을 떠올려 보자.
우리는 그 기대를 다 이룰 수 있는가. 절대로 그럴 수 없다. 이 세상 사람들이 원하는 것, 그런 모습이 되기 위해서는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고 한쪽에서는 화를 참으라고 하고, 또 한쪽에서는 분개해야 한다. 일어나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니 절대 우리는 모든 사람들의 기대를 충족할 수 없다. 그렇게 될 때 우리 마음에 좋은 목회자, 좋은 부모, 좋은 남편 등등의 칭찬과 평판을 모든 사람에게서 듣고 싶지만 못 듣는다. 그 때부터 비극이 시작되는 것이다. 우리는 한국에 있는 한국 사람보다 한 가지 더 문제가 있다. 코리언 어메리칸은 이중잣대에 맞춰야 하는 운명이다. 한국사람이 원하는 것과 미국사람이 원하는 것이 있다. 저는 이 것을 너무 잘 안다. 여러분도 이미 경험했을 것이다. 저의 경우 학교에서 빈틈없이 준비해서 인솔했을 때 1.5세인 사람이 고민하다 저에게 말했다. 그쪽 교회 목사님들이 저를 너무 싫어한다는 것이었다. 이유인즉 한 달 전에 보내도 되는 스케쥴을 1년 전에 보내고 몇 개월 전에 이미 이렇게 하고 저렇게 해야 한다고 해서 싫어한다는 것이었다. 내용을 바꿔서 한국식으로 맞췄더니 이제는 미국학교쪽에서 왜 알려주지 않느냐고 난리가 났다.
저는 사실은 남편을 위해 접시를 닦아서 남편 공부시키기 위해서 미국에 온 것이다. 영어학원 한번 가지도 않았는데 제가 공부를 한다는 것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아이 둘을 돌봐야 했고 남편이 한인교회를 하니까 사모로서 일도 바빴다. 그러던 중 우연히 남편이 다니는 신학교에서 한 강의를 듣게 됐고, 그러다 강의를 다 듣게 됐고, 그러다 보니 학교를 다니고 미국에서 목사안수를 받게 됐다. 개척은 생각하지 못했었다. 지역 한인들이 90명이었고 그중 79명이 남편의 교회를 출석하고 있었다. 미국교회를 한다해도 영어 잘하는 다른 미국 성직자들이 우선이다. 그런 중 어느 기회에 미국교회 담임에 대한 심사에 응할 수 있었다. 그 심사에서 물어보는 것이 남편 교회를 포기하고 이 교회에 전념을 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들이 원하는 대답은 남편 교회의 일을 정리하고 이 교회만 전념을 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 교회에 대한 책임은 다 완수하겠지만 다른 이들을 외면할 수는 없다고 했다. 속으로 안 되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감리사가 와서 이 교회를 해도 된다고 했고 또 원하지 않는다면 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하겠다고 했다.
어떤 사람은 꿈에 하나님을 봤다고 한다. 남편도, 자식도 버리고 미국교회로 가버린 것을 지적하셨다는 것이다. 엄마가 너무 바빠지니까 아이들도, 또 남편도 좋아하지 않았다. 심지어 저보고 나쁜 여자라고 했다. 남편 교회 사람들이 와서 우리 교회를 막 뒤지기까지 했다. 목회를 잘하는지 못하는지 보러 온 것이다. 미국교회 목회를 해야 하는데 영어설교도 준비해야 하고 남편이 목회 하는 것보다 10배나 더 노력해야 한다. 또 남편은 아이들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그래도 저는 좋은 여자, 괜찮은 엄마 소리, 좋은 목회자 소리를 듣고 싶어서 열심히 일했는데 저보고 나쁜여 자라고 하더라. 이것이 정신적으로 너무 스트레스가 됐다. 미국교회 심방을 끝내고 집으로 가는 길에 뭘 먹을지 생각부터, 아이들 옷 준비, 일 준비 등등이 꼬리를 물고 따라오면서 미칠 것 같았고 앞에 트럭이 있었는데 ‘stop’사인에 박고 싶은 마음이 들기까지 했다. 그러면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마침 영성 아카데미를 그 때 했었던 것이 도움이 됐다. 영성 아카데미를 가야 하는데 너무 늦어서 바쁘게 챙겨 갔는데 남편이 우리 저녁은 어떻게 하느냐고 물어보는 것을 야속한 눈으로 쳐다보고 떠났던 기억이 난다. 아카데미에 갔더니 이유없이 막 눈물이 났다. 아무 생각 하지 말고 있어보라고 하더라. 아무것도 안하고 있었더니 그런 적이 없어서 매우 불안했다. 그 때 호수에서 예수님의 형상이 보였다. 자세히 봤더니 예수님이 아무말없이 울고 계셨다. 그 눈물을 봤을 때 아 나는 세상에서 필요 없는 사람인 것처럼 생각이 됐는데 예수님이 나를 위해 울어주는 그런 사람이 저라는 것을 알게 됐다. 물론 신학교에서 예수님의 사랑에 대해서 배우고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은 단순히 정보였다. 그러나 그날 본 예수님은 제 마음에 깊이 새겨지게 됐다. 거기 영성 아카데미에서는 독방을 주는데 독방에서 말하지 말고 묵상하라고 했다. 그 묵상 중에 나는 하나님의 자녀이고 한국사람으로 사는 것이 문제될 것 없다는 것을 결심하게 됐다. 마음에 기쁨이 임했다.
성만찬식에서 제가 주기도문송을 한국말로 부르겠다고 했다. 그 높은 찬양을 또 한국말로 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그날 그것을 불렀고 성만찬식은 매우 은혜 가운데서 눈물로 진행됐다. 지금까지는 무엇을 할 때 옆에서 그것을 하는 사람은 당신이 처음이라고 말할 때 내가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생각이 바뀐 후 이전까지 했던 사람이 없다면 내가 창조적인 일을 한다는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됐다. 신학교에서도 승승장구하고 잘 자리잡게 됐다. 미국사람들이 못 보는 것을 우리는 볼 수 있고 또 한국 사람이 모르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코리언 어메리칸의 존재가 굉장히 독특하고 귀하게 여김을 받을 수 있다. 여러분도 이런 반전의 축복을 받기 바란다.
은혜를 받은 이후 제가 지금까지 왜 이렇게 힘들었는가 공부를 하고 연구를 했더니 알고보니 shame이었다. 이것은 정체성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어떤 것은 건강하고 어떤 것은 건강하지 않은지 묻는 조항이 있다. 나는 문제이구나 형편없구나 이런 식으로 해로운 shame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정의를 했는데 shame이란 다른 사람들 혹은 다른 문화가 정해놓은 스탠다드를 따라 갈 수 없을 때 생기는 열등감, 또 부적절한 느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shame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하면 과거에는 죄의식만 사람을 망치는 것인 줄 알았다. 그런데 shame은 내가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이기 때문에 깊이 있게 우리 마음 안에 자리 잡던 것이다. 보이지 않는 깜깜한 곳에서 점점 세력을 넓히고 커지고 있었다. shame이 있게 될 때 이것 때문에 우리는 다른 일을 더 못하게 되고 점점 더 우리의 상황을 나쁘게 한다. 점점 더 괴로워하고 이런 악순환이 우리 안에 거듭되게 된다. 나쁜 습관 중 하나가 우리를 절망하게 하는 것이다. 대부분 이 shame이 우리 안에 있는지 모르고 사는 경우가 있다. shame의 증상은 이렇다.
1. 자기 자신을 보여주기를 꺼려한다.
2. 극히 수줍어하거나, 금방 당황하고, 열등감을 느낀다. 자신이 잘못을 저질렀다고 생각하는 대신에 자기 자신이 문제라고 생각한다.
3. 자기가 어떻게 노력하더라도 상황은 안 달라질거라고 미리 포기한다.
4. 누가 충고하는데에 대해 강력하게 변명하려 든다.
5. 자신이 비난받지 않기 위해 남을 먼저 비난한다.
6. 모든 잘못이 늘 자기에게 있다고 생각하고 항상 사과한다.
7. 사람들에게 사랑과 관심을 받는다할지라도 늘 외로워한다.
8. 자기가 믿는 바를 억지로 다른 사람에게 믿게 하려고 한다.
9. 자기 자신을 추하다거나 결점 투성이라고 생각한다.
10. 모든 일을 하려면 완벽하게 하든지 아니면 안 해야된다고 생각한다.
11. 우울증이 있다.
12. 거짓말을 잘한다.
13. 끊임없이 일하거나, 먹거나, 물건을 사들이거나 술을 마신다.
14. 남에게 무조건 의존하거나 혹은 절대 남의 도움을 받으려하지 않는다.
여기에 해당되는 경우가 많을 경우 shame으로 볼 수 있다. 누구나 shame을 갖고 있다. 한국 사람들은 특히 shame이 많다. 미국사람은 다른 것을 인정하는 경향이 많지만 한국은 달느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 식당에서 주문할 때 한국사람들은 통일을 좋아한다. 그런 문화에서 우리는 살았기 때문에 그룹 오리엔트 문화에서는 더욱 심하다. 그리고 목회자는 더욱 심하다. 목회자에 대한 기대가 굉장히 크기 때문이다. 때때로 예수님조차 하실 수 있을까 하는 일을 바라고 요구하는 경우도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어떻게 이 shame이 생겼고 이것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
다른 중요한 것도 많지만 먼저 왜 교회에서 조차 이 shame이 있는지 보고자 한다. 우리 신학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우리의 해석이다. 이 해석들이 잘못된 것이 있어서 우리가 shame을 가지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무조건적인 희생, 여태껏 무조건적으로 희생해온 분들이 있는가? 없다. 그리고 무조건적인 희생만을 해서는 안 된다. 희생은 어느 정도 필요할 때 하는 것이지 무조건적 희생을 하는 것이 다 좋은 것은 아니고 할 수도 없다. 우리가 이 희생에 대해 정립을 해야 한다. 죽기까지 참는 것도 다시 생각해야 한다. 우리가 기도할 때 ‘벌레만도 못한 우리’라고 한다. 그런데 말이 씨가 된다고 말을 계속하다보면 나 자신을 그렇게 생각한다. 교회에 공공연하게 쓰고 있다. 또 교회의 기대와 요구가 우리가 shame에 짓눌리게끔 만들어왔다. 교회가 갖고 있는 신학도 이런 경우가 많다. 어떤 선교사가 한국에서 가슴을 치며 우는 기도회에 인도받았는데 왜 저렇게 가슴을 치면서 우느냐고 물어보니 예수님이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셨기 때문이라는 대답을 들었다. 그런데 이틀, 삼일째도 같은 모양, 같은 대답이었다. 그래서 선교사가 물었다.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배우지 않았느냐고 했다.
맨날 내 탓이라면서 울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죽기까지 차는 것 누가 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하나님은 우리가 실패자로 살기를 바라시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 뿐만 아니라 교인들에게도 또 다른 면을 설교해야 한다. 하려고 했는데 실패했을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실지 생각해보자. 고생했다. 내가 알아.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것도 우리가 알아야하고 교인들에게도 우리가 전해줘야 한다. 교회에 말썽부리는 교인들이 있는데 어떤 목사님은 악하고 충성된 종이 제일 무섭다고 했다. 그런데 그런 종들을 가만히 보면 그 사람 안에 shame의 문제가 있는 경우가 정말 많다. 자기도 어쩔수 없어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우리 교회도 그런 분들이 좀 많이 계셨다. 그래서 남편이 저를 두고 이 shame을 두고 전 교인을 대상으로 수련회를 하기 원했고 수련회를 통해 정말 많이 변화됐다. 그런데 한번 shame 수련회를 통해 다 바뀌지 않았다. 영성 수련회 등을 통해 지속적으로 노력해야 한다.
우리의 정체성은 하나님이 정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누가 정하는가 하면 항상 나쁜 말을 하는 교인들의 정체성에 좌지우지된다. 한번은 남편이 목회를 26년했는데 이정도면 자신은 실패한 것이라고 그만두겠다고 했다. 그 때 남편에게 못살게 구는 교인 숫자를 세보자고 했다. 10명이 나왔다. 26년 목회해서 이정도 숫자가 나온 것은 목회를 잘못한 것이 아니다. 예수님 시대때도 예수님을 미워하던 사람들이 있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우리를 만드셨다. 그러니까 우리는 하나님 닮게, 하나님 같이 창조가 된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최고의 사랑의 표현이다. shame이란 것은 없었다. 이것이 진정으로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시는 모습이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불순종의 죄가 생겼다. 따먹지 말라는 것을 따먹었다. 왜 그런가. 욕심, 유혹 때문일 수도 있다. 뱀이 하와에게 선악과를 따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되어서 선악을 알게한다고 했다. 그런데 이미 하와의 상태는 하나님과 같은 형태였다. 하와가 창조된 상태는 하나님 같이 창조된 그 자체였다. 그러니까 뱀이 와서 네가 이것을 먹어야 하나님같이 된다고 할 때 ‘나는 이미 하나님과 같은 사람’이라고 하면서 뱀을 쫓아야 했다. 하와는 자기 자신을 몰랐다. 정체성의 문제가 이렇게 중요하다. 자기 자신을 모를 경우 착각하게 된다. 잘못이 저질러진다. 우리 자신이 얼마나 훌륭한지 못믿은 불신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자기 모습대로 창조해주셨는데 그런 하나님을 못 믿은 불신이다. 거기서 문제가 다 나온 것이다. 우리가 누구인지 잘못 알게 되면 이 소리, 저 소리에 넘어간다. 그리고 목사님 이렇게 하면 잘 할 수 있다고 하면서 넘어가게 된다. 어떻게 해야 잘 하는 것인가. 하나님에게 물어보고 하나님에게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이다.
우리도 우리 자신에 대해서 벌레만도 못한다고 생각하고 넘어간다. 부족하다고 생각하면 그냥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넘어간다. 채우려고 할 때 무리가 오기 때문에 그냥 포기하고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태초에 주어진 수치를 느끼지 않고 당당하게 살 수 있는 권리를 놓치게 됐다. 타락한 모습은 죄의 결과로 나타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께서 처음 만들어주신 본래의 모습대로 사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인 것이다. 그래서 정체성의 변화라고 하지 않고 정체성의 회복이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는 변화될 필요가 없다. 회복되면 되는 것이다. 본래 우리가 갖고 있었던 것을 회복하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다. 이미 우리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것이 더러워졌고 닦아만 내면 된다. 그래서 이번 주제 ‘목회자의 정체성 회복’이 너무도 감사하다. 세상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어떠한 모습에 너무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 우리가 할 일은 우리 본래의 모습을 회복하면 되는 것이다. Becoming이 아니고 Being이다. 자기가 가진 것을 불평하게 되고 공허하게 되다보면 유혹에 빠진다. 이것이 바로 사탄이 우리를 노리는 것이다. 거기에 절대 빠져서는 안된다. 우리를 하나님께서 지으시고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셨다. 마틴 루터도 We are good이라고 했다. 우리가 선한 사람이기에 선한 행위를 할 수 있다고 했다. 우리가 하나님이 선하게 만들어주신 것을 믿고 살면 그 믿음 때문에 우리가 선한 일을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콩심은데 콩나고 팥심은데 팥난다. 어느 누가 아니라 해도 거기에 넘어가지 말기를 바란다. 누가 아니라고 하는 사람이 오면 뱀이 왔구나 생각하면 된다.
존재와 행위 중에 어떤 것이 중요한가. 존재가 중요하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것을 믿고 살면 좋은 선한일을 할 수 있게 된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사도바울은 고백했다. 그가 자기 존재를 믿었기 때문에 그 감옥 속에서도 모든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을 믿을 수 있었고 이뤄졌다. 인간적인 방법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그 안에서 복음을 전파하고 싶었지만 그 믿음대로 됐다. 믿으면 이뤄지는데 그것을 안 믿으면 사탄의 유혹에 빠질 수밖에 없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입었다. 하나님께서 잘못했지만 잘못을 탕감해주셨다. 이제 잘못 없는 것으로 여기신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잘못한 것 때문에 그것에 매여 있다면 부모의 입장으로서는 매우 속이 터지는 것이다.
캐톨릭의 어떤 수녀가 하나님을 만났는데 그것이 진짜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어서 교황에게 확인을 했다. 교황이 봐도 아리송해서 교황이 지혜를 냈다. 세상 사람이 모르고 나만 아는 죄가 있는데 그것을 물어봐서 그것을 알면 하나님일 것이다. 그래서 수녀가 그대로 물어봤다고 한다. 교황도 매우 궁금해 했다. 그런데 그 수녀가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기억을 못하신다고 했다고 한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다. 예수님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하셨다. 우리에게 진리를 알려주시는 이유는 자유롭게 살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기억하지 않으시듯 우리도 우리 죄를 기억하지 말고 자유롭게 살아야 한다.
헨리 나우웬은 자유롭게 된 사람은 날마다 새롭게 산다고 했다. 시간은 늘 새롭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유롭게 된 사람은 얻은 자유로 기쁨을 선택한다. 아무리 흐리고 폭풍우가 쳐도 해는 있다. 해가 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 흐린 것을 알 수 있다. 기쁨이 반드시 있다는 것이다. 세 번째 자유롭게 된 사람은 희망을 갖고 산다. 세상 사람들에게 물어봐도 그러하다. 행복하느냐고 성공했느냐고 하면 욕심은 끝이 없기에 만족하고 있는 사람은 없다. 우리 삶에 고통과 아픔이 없을 수 없다. 있다. 그러나 그 고통과 아픔을 두려워하지 않고 껴안으면서 실패와 슬픔 가운데서도 기쁨을 선택하며 누리며 사는 사람은 자유롭게 된 사람이다. 여기까지가 제가 쓴 박사논문의 내용이다. 이제는 우리가 누구의 것이가를 제대로 알고 살아야 한다. 내가 누구인가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내가 누구의 것인가 이것이 분명해야 한다. 똑같이 중요하다. 저는 이것에 대한 답을 누가복음에 나오는 마리아의 말 ‘주의 종이오니 말씀대로 이루어지이다’ 여기서 찾았다. 비극적 상황에 있었던 마리아가 이렇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누구의 것인지에 대한 정확한 정체성이 있었다. 정체성을 세미나에 와서 알기만 하면 안 된다. 평소에 갖고 살아야 한다. 우리가 하루만 살아도 얼마나 많은 결정을 하는지 모른다. 그런데 그 결정은 평소에 갖고 있는 생각대로 하는 것이다. 우리의 미래를 어떻게 이끌 것인가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것에 의해 결정된다. 평소에 무슨 생각을 갖고 사느냐에 따라 우리 삶이 좌우된다. 순간의 선택이 영원을 좌우한다는 말이 맞는 말이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는 전적으로 지으신 분에게 달려 있는 것이다. ‘주의 종이오니’ 이것이 바로 우리의 정체성이고 삶의 이유다. 말씀대로 이루어지이다. 이것이 우리의 삶의 목표다. 그리고 우리의 삶의 결론이다. 주의 종이라는 분명한 자기 정체성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분명한 결론을 내려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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