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우리 사회에는 갑작스럽게 정치적 주목의 대상이 된 인물이 한 사람 있다. 바로 안철수 박사이다. 아마 최고 명문대 출신의 의사요 교수였던 사람이 자기 전공과는 조금 무관하게 컴퓨터바이러스 분야의 전문가가 되어 사업가로도 성공하고 그 바이러스 백신을 대중들에게 무료로 제공해 국민들에게 호감을 샀고, 최근에는 갑작스레 일부 정치적 발언도 하면서 더욱 관심을 증폭 시키며 본의 아니게 대중들의 인기를 끌게 된 면이 있다. 그런데 여기 그런 스타의 원조격인 한 사람이 있다. 바로 찰스 린드버그이다.
2000년은 새로운 천년이 시작된 해이다. 그리고 2001년은 21세기가 시작되는 해였다. 그러면 지난 20세기 100년간 세계를 움직인 영웅들은 누구일까?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은 지난 20세기 세상을 빛낸 ‘20세기의 영웅 20걸’을 발표한 적이 있다. 그 20명 중에는 △인도에서 봉사한 테레사 수녀 △다이애나 전 영국 왕세자비 △‘안네 프랑크의 일기’를 쓴 유태인 소녀 안네 프랑크 △기독교 부흥 전도자 빌리 그레이엄 목사님 △장애를 딛고 선 교육가 헬렌 켈러 등이 뽑혔다. 영화배우로는 △이소룡(李小龍․홍콩) △마릴린 먼로(미), 운동선수로는 △권투선수 무하마드 알리(미) △축구 황제 펠레(브라질)도 선발되었다. △최초로 세계 최고의 산 에베레스트를 등정한 에드먼드 힐러리경도 뽑혔다. 그런데 그 20명 중에는 찰스 린드버그가 포함되어 있었다. 최초로 대서양을 무착륙 단독 비행한 공로였다.
역사상 처음으로 대서양 횡단의 단독 무착륙비행에 성공한 찰스 린드버그(Charles Augusts Lindbergh, 1902-1974)는 미국의 디트로이트에서 태어났다. 그는 미국 위스콘신 대학을 중퇴한 뒤 1924~1925년 텍사스 육군비행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1926년 세인트루이스~시카고 간의 우편항공비행기의 조종사가 되었다.
지금부터 80년 전 비행 기술은 한창 발전하고 있었지만 여러 가지 기술적, 과학적 한계도 여전히 있었다. 비행기는 아직 대서양을 넘어 미국과 유럽 사이를 비행하지 못하고 있었다. 미국과 유럽을 오고가려면 여전히 배를 타고 며칠씩 고생을 해야 했다. 그 때 한 사람이 나섰다.
“뉴욕과 파리를 무착륙 비행하는 최초의 사람에게 2만 5천 달러를 주겠다.”
현상금을 건 사람은 1919년 호텔을 경영하던 레이몬드 오티그라는 사람이었다. 지금도 상당히 큰 돈이지만 그 때는 정말 엄청난 액수였다. 누군가 비행기로 대서양을 건너기만 하면 부자가 되는 것이었다.
“제가 한번 해보겠습니다.” 첫 번째 도전자가 나타났다. 그는 1차 세계 대전 당시 적기(敵機)를 75대나 격추한 렌 퐁크였다.
“퐁크는 해낼 수 있을 거야!”
많은 사람들이 퐁크는 가능할 거라고 생각했다. 1926년 9월 뉴욕 근처의 루스벨트 비행장에서 퐁크가 탄 비행기가 이륙했다. 그러나 비행기는 떠오르지 못하였다. 그만 폭발해버린 것이다. 퐁크는 동승한 승무원과 함께 사망을 하고 말았다. 장거리 비행을 위해 연료를 너무 많이 실었던 것이 화근이었다. 비행기가 떠오르기엔 너무 무거웠던 것이다. 1927년 4월에는 미 공군의 리차드 비르드 소령이 도전에 나섰다. 그러나 비르드는 바다에 들어서기도 전에 착륙하고 말았다. 미국서 떠서 미국 본토에 잘못 착륙했던 것이다. 비르드 소령은 손목이 부러지고 말았다.
프랑스 쪽에서도 도전자가 나왔다. 1927년 5월 찰스 눈게서와 프랑코 콜리였다. 그들은 파리 쪽에서 이륙하였다. 사람들은 그들이 뉴욕에 도착하기를 기다렸지만 아무런 소식도 날라 오지 않았다. 대서양에서 그만 행방불명이 되어 버렸다. 여러 해 동안 무려 6명이 도전에 나섰다가 생명을 잃고 말았다. 대서양 횡단은 아직 무리일거라고 사람들은 생각했다. 바로 그때 또 한사람이 나타났다.
‘제가 한번 해보겠습니다.’
린드버그의 대서양 횡단 도전
바로 린드버그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름도 모르던 이 젊은이를 아무도 눈 여겨 보지 않았다. 하지만 린드버그는 달랐다. 한 회사의 도움으로 1927년 5월 19일 7시 52분 무전기와 낙하산도 없이 2750 파운드의 연료와 5개의 햄과 치킨을 넣은 샌드위치와 약간의 물만 가지고 대서양 횡단을 위하여 루즈벨트 비행장을 이륙하였다. 그의 비행에서 가장 큰 적은 졸음이었다. 홀로 하는 비행이었기 때문이다.
처음 비행 시작할 때 일기는 맑았다. 그러나 곧 바다에는 빙산(氷山)이 보이기 시작했다. 린드버그는 해변을 따라 비행 하고 있었다. 저녁이 되어 어둠이 찾아오자 안개는 진해졌다. 검은 구름이 둘러쌌으나 암흑을 뚫고 비행은 계속됐다. 달이 떠오르자 비행은 조금 쉬워졌다. 그는 계기를 사용하였지만 종종 항로를 이탈하기도 했다. 그러나 더 힘든 것을 따로 있었다. 바로 졸음이었다. 졸음을 참는 것은 쉽지 않았다. 손으로 눈을 비비면서 졸음과 계속 싸우며 비행을 계속했다. 졸릴 때마다 물 한 모금을 마셨다. 그리고 꾸벅꾸벅 졸다가 깨기를 반복했다. 비행한지 23시간이 지났을 때 드디어 수평선 너머로 해안선이 보이기 시작했다.
물 위를 날면서 새와 돌고래, 어선도 보았다. 어선에서 한 남자가 린드버그 비행기를 쳐다보았다. 린드버그는 어선 주위를 돌면서 아일랜드로 가는 길을 외쳐 물었다. 그러나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한 시간이 지나서 흐릿한 아일랜드의 해안선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영국을 통과하면서 해가 질 무렵에야 그는 런던과 파리 구간을 비행하기 시작했다. 비행을 시작한지 33시간 만에 드디어 파리의 등불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에펠탑을 한 바퀴 선회하고서 르 부르제 비행장 쪽을 향했다. 그는 비행장을 한 바퀴 선회하고 착륙을 시도했다.
드디어 비행은 끝났다. 성공한 것이다. 그는 3600 마일을 여행해 1927년 5월 20일 아침, 미국을 떠난 지 33시간 30분만인 21일 밤(파리 시간) 파리 근교의 비행장에 무사히 착륙했다. 연료는 아직 85 갤론이나 남아 있었다.
현대판 미디어 스타의 원조
린드버그가 탄 비행기가 프랑스 땅에 도착하자 수천 명의 사람들이 린드버그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그들은 1시간 전부터 하늘을 쳐다보며 린드버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파리 시민 10만 명이 린드버그와 ‘세인트루이스 정신'이라고 이름을 단 비행기를 에워쌌다. 그들은 린드버그를 조종석에서 끌어내어 린드버그를 치켜 올리기 시작했다. 열광한 군중들은 린드버그를 1시간 동안 공중에 떠받들고 행진하기 시작했다.
대서양 양쪽 언론들은 당시 26살의 린드버그를 현대판 콜럼버스라고 불렀다. 횡단 성공 후에 미국 신문들은 그에게 <행운의 린디>, <고독한 독수리>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 린드버그는 1920년대의 <영웅 중의 영웅>, <미국의 꿈의 실현자>라고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다. 미국의 대통령 쿨리지는 그를 격려하는 연설을 하였고 해군 순양함을 보내 린드버그와 그의 비행기를 실어오도록 하였다.
뉴욕에서 열린 환영 퍼레이드에는 무려 4백만 명이 몰려들었다. 린드버그를 찬양하는 시 5,000여 편과 노래 250여 곡이 쏟아져 나왔다. 미국의 전기 작가 스코트 버그는 "린드버그야말로 최초의 현대적 미디어 스타"라고 했다. 오늘날로 말하면 유명 인사, 인기 스타, 인기 연예인의 원조였다. 꼭 사업을 해야 돈을 버는 것은 아니다. 유명 연예인들은 대단한 부자들이다. 그래서 오늘날 유명 연예인들은 움직이는 사업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린드버그는 그 원조였다. 린드버그는 그렇게 부자가 되었다.
린드버그의 모습은 오늘날 디지털시대 우리 사회 젊은이들의 우상으로 떠오른 안철수 박사와 여러 면에서 유사성을 발견하게 된다. 새로운 일에 대한 도전 정신, 미디어를 통한 스타 탄생, 자연스럽게 부자가 된 일, 과학 기술인으로서의 삶 등등이 그러하다. 물론 두 사람 사이에 서로 다른 부분이 한 군데 있기는 하다. 바로 믿음이다. 린드버그는 하나님을 믿는 겸손한 사람이었다. 유명 인사가 되었음에도 결코 자만하지 않고 늘 겸손으로 일관한 린드버그 삶의 중심에는 하나님이 있었다.
린드버그의 믿음
린드버그 대위가 비행기로 세계 일주를 하고 프랑스에 다시 왔을 때 많은 사람들이 그를 환영했다. 그 무리 중에는 담배회사 사장도 있었다. 그는 담배 한 대를 주면서 이렇게 린드버그에게 제안했다.
“린드버그, 당신이 담배 피우는 사진 한 장 만 찍는다면 5만 달러를 주겠소."
그 때 린드버그 대위는 이렇게 말했다.
“그럴 수 없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린드버그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렇다면 단지 담배를 입에만 물고 사진을 찍으면 됩니다. 그래도 5만 달러를 주겠소."
"나는 세례를 받은 사람입니다. 그런 행동을 할 수 없습니다."
린드버그는 이 제안도 거절했다. 이 기사가 다음날 프랑스 일간지에 크게 보도로 나갔다. 이 기사를 읽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감동을 받았다.
“린드버그를 위해 모금을 합시다.”
그 금액이 두 번 거절한 10만 달러였다. 그는 세계적 인사가 되었다. 그는 당시 비행기 안에 타고 있었을 때의 일을 이렇게 회고했다.
“저는 사람이 만든 기계들이 얼마나 부서지기 쉬운가를 깨닫았습니다. 그러므로 믿음 없이 비행기를 타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한 사람이 죽느냐 사느냐 하는 것은 모두 주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그 분이 만드신 피조물이기 때문이지요”
린드버그의 또 다른 모습
린드버그는 과학자이기도 했다. 자신의 과학자적인 소양과 능력을 사업으로 연결시켰다. 안철수 박사가 컴퓨터 바이러스 백신을 벤처 기업으로 연결한 것과 유사하다. 대서양을 횡단하여 유명해 진 이후 린드버그는 프랑스로 가서 생리학자 알렉산더 카렐과 협력하여<카렐-린드버그 펌프>라고 불리는 인공 심장을 만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1938년 카렐과 함께『장기 배양』이란 책을 발표하였다. 카렐은 노벨 생리학상을 수상한 뛰어난 의사였다.
그 후 미국으로 귀국한 린드버그는 1939년 미 육군성에 배속되었다. 하지만 1941년 미국의 제2차 세계대전 참전에 반대하다가 그만 해임을 당하였다. 그러나 미국이 전쟁에 참전하자 민간인의 자격으로 전쟁에 적극 협력하였다.
1954년 미 대통령 아이젠하워는 린드버그를 미국 예비역 공군 준장으로 임명한다. 말년에 그는 하와이에서 아내와 함께 조용히 지내며 가끔 젊은 시절의 비행을 떠올리곤 했다. 한번은 갑자기 자기가 탓 던 비행기가 보고 싶어졌다. 린드버그는 비행기를 미국 박물관 스미소니언협회에 기증했었다. 박물관을 방문한 린드버그는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젊은 시절 목숨을 걸고 자신과 비행을 함께한 바로 그 비행기의 좌석에 다시 앉아보았다. 린드버그는 큰 감회에 젖었다. 한참 뒤 그는 사다리를 타고 내려오며 말했다.
“내가 저 고물 비행기로 대서양을 건넜단 말입니까?”
그 말에 놀란 박물관장이 물었다.
“아니, 바로 저 비행기를 몰고 대서양을 건넌 장본인께서 무슨 말씀입니까?"
그 때 린드버그가 말했다.
"저 비행기 안에는 고도계며, 계기판이 없군요. 지금 생각하면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 비행기는 엔진과 날개 그리고 바퀴만 달린 날아가는 기계에 불과했던 것이다. 린드버그조차 불가능한 일이었다고 말한 것을 가능케 한 힘은 무엇이었을까? 린드버그가 몰고 대서양을 건넌 ‘세인트루이스의 정신’은 단순한 비행기가 아니었다. 린드버그의 젊음과 꿈, 도전 정신이 담긴 아주 특별한 비행기였다. 그리고 린드버그의 고백대로 성공 뒤에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었던 것이다. 린드버그는 훗날 다음과 같이 고백하였다.
“젊었을 때 나는 과학을 신봉하던 자였습니다. 하나님보다도 과학이 중요했지요. 그러나 곧 깨닫게 되었어요. 사람이 만든 것은 곧 없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적 진리는 없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신 창조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적 진리를 의지할 때 우리는 안심할 수 있습니다. 만일 영적 진리를 거부하면 인류는 곧 멸망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영적 진리를 이해해야 하지요. 그리고 우리의 삶에 적용시켜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겸손과 묵상 그리고 기도의 능력을 끄집어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헌신을 요구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보상은 지극히 클 것입니다. 인류에게 단 하나 희망이 있다면 바로 이것입니다.”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시 37편 4절)
* 이 글은 조덕영 박사의 ‘창조신학연구소’ 홈페이지(www.kictnet.net)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조덕영 박사는
환경화학 공학과 조직신학을 전공한 공학도이자 신학자다. 한국창조과학회 대표간사 겸 창조지 편집인으로 활동했고 지금은 여러 신학교에서 창조론을 강의하고 있는 창조론 전문가이기도 하다. 그가 소장으로 있는 ‘창조신학연구소’는 창조론과 관련된 방대한 자료들로 구성돼 목회자 및 학자들에게 지식의 보고 역할을 하고 있다. ‘기독교와 과학’ 등 20여 권의 역저서가 있으며, 다방면의 창조론 이슈들을 다루는 ‘창조론 오픈포럼’을 주도하고 있다.
2000년은 새로운 천년이 시작된 해이다. 그리고 2001년은 21세기가 시작되는 해였다. 그러면 지난 20세기 100년간 세계를 움직인 영웅들은 누구일까?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은 지난 20세기 세상을 빛낸 ‘20세기의 영웅 20걸’을 발표한 적이 있다. 그 20명 중에는 △인도에서 봉사한 테레사 수녀 △다이애나 전 영국 왕세자비 △‘안네 프랑크의 일기’를 쓴 유태인 소녀 안네 프랑크 △기독교 부흥 전도자 빌리 그레이엄 목사님 △장애를 딛고 선 교육가 헬렌 켈러 등이 뽑혔다. 영화배우로는 △이소룡(李小龍․홍콩) △마릴린 먼로(미), 운동선수로는 △권투선수 무하마드 알리(미) △축구 황제 펠레(브라질)도 선발되었다. △최초로 세계 최고의 산 에베레스트를 등정한 에드먼드 힐러리경도 뽑혔다. 그런데 그 20명 중에는 찰스 린드버그가 포함되어 있었다. 최초로 대서양을 무착륙 단독 비행한 공로였다.
역사상 처음으로 대서양 횡단의 단독 무착륙비행에 성공한 찰스 린드버그(Charles Augusts Lindbergh, 1902-1974)는 미국의 디트로이트에서 태어났다. 그는 미국 위스콘신 대학을 중퇴한 뒤 1924~1925년 텍사스 육군비행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1926년 세인트루이스~시카고 간의 우편항공비행기의 조종사가 되었다.
지금부터 80년 전 비행 기술은 한창 발전하고 있었지만 여러 가지 기술적, 과학적 한계도 여전히 있었다. 비행기는 아직 대서양을 넘어 미국과 유럽 사이를 비행하지 못하고 있었다. 미국과 유럽을 오고가려면 여전히 배를 타고 며칠씩 고생을 해야 했다. 그 때 한 사람이 나섰다.
“뉴욕과 파리를 무착륙 비행하는 최초의 사람에게 2만 5천 달러를 주겠다.”
현상금을 건 사람은 1919년 호텔을 경영하던 레이몬드 오티그라는 사람이었다. 지금도 상당히 큰 돈이지만 그 때는 정말 엄청난 액수였다. 누군가 비행기로 대서양을 건너기만 하면 부자가 되는 것이었다.
“제가 한번 해보겠습니다.” 첫 번째 도전자가 나타났다. 그는 1차 세계 대전 당시 적기(敵機)를 75대나 격추한 렌 퐁크였다.
“퐁크는 해낼 수 있을 거야!”
많은 사람들이 퐁크는 가능할 거라고 생각했다. 1926년 9월 뉴욕 근처의 루스벨트 비행장에서 퐁크가 탄 비행기가 이륙했다. 그러나 비행기는 떠오르지 못하였다. 그만 폭발해버린 것이다. 퐁크는 동승한 승무원과 함께 사망을 하고 말았다. 장거리 비행을 위해 연료를 너무 많이 실었던 것이 화근이었다. 비행기가 떠오르기엔 너무 무거웠던 것이다. 1927년 4월에는 미 공군의 리차드 비르드 소령이 도전에 나섰다. 그러나 비르드는 바다에 들어서기도 전에 착륙하고 말았다. 미국서 떠서 미국 본토에 잘못 착륙했던 것이다. 비르드 소령은 손목이 부러지고 말았다.
프랑스 쪽에서도 도전자가 나왔다. 1927년 5월 찰스 눈게서와 프랑코 콜리였다. 그들은 파리 쪽에서 이륙하였다. 사람들은 그들이 뉴욕에 도착하기를 기다렸지만 아무런 소식도 날라 오지 않았다. 대서양에서 그만 행방불명이 되어 버렸다. 여러 해 동안 무려 6명이 도전에 나섰다가 생명을 잃고 말았다. 대서양 횡단은 아직 무리일거라고 사람들은 생각했다. 바로 그때 또 한사람이 나타났다.
‘제가 한번 해보겠습니다.’
린드버그의 대서양 횡단 도전
바로 린드버그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름도 모르던 이 젊은이를 아무도 눈 여겨 보지 않았다. 하지만 린드버그는 달랐다. 한 회사의 도움으로 1927년 5월 19일 7시 52분 무전기와 낙하산도 없이 2750 파운드의 연료와 5개의 햄과 치킨을 넣은 샌드위치와 약간의 물만 가지고 대서양 횡단을 위하여 루즈벨트 비행장을 이륙하였다. 그의 비행에서 가장 큰 적은 졸음이었다. 홀로 하는 비행이었기 때문이다.
처음 비행 시작할 때 일기는 맑았다. 그러나 곧 바다에는 빙산(氷山)이 보이기 시작했다. 린드버그는 해변을 따라 비행 하고 있었다. 저녁이 되어 어둠이 찾아오자 안개는 진해졌다. 검은 구름이 둘러쌌으나 암흑을 뚫고 비행은 계속됐다. 달이 떠오르자 비행은 조금 쉬워졌다. 그는 계기를 사용하였지만 종종 항로를 이탈하기도 했다. 그러나 더 힘든 것을 따로 있었다. 바로 졸음이었다. 졸음을 참는 것은 쉽지 않았다. 손으로 눈을 비비면서 졸음과 계속 싸우며 비행을 계속했다. 졸릴 때마다 물 한 모금을 마셨다. 그리고 꾸벅꾸벅 졸다가 깨기를 반복했다. 비행한지 23시간이 지났을 때 드디어 수평선 너머로 해안선이 보이기 시작했다.
물 위를 날면서 새와 돌고래, 어선도 보았다. 어선에서 한 남자가 린드버그 비행기를 쳐다보았다. 린드버그는 어선 주위를 돌면서 아일랜드로 가는 길을 외쳐 물었다. 그러나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한 시간이 지나서 흐릿한 아일랜드의 해안선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영국을 통과하면서 해가 질 무렵에야 그는 런던과 파리 구간을 비행하기 시작했다. 비행을 시작한지 33시간 만에 드디어 파리의 등불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에펠탑을 한 바퀴 선회하고서 르 부르제 비행장 쪽을 향했다. 그는 비행장을 한 바퀴 선회하고 착륙을 시도했다.
드디어 비행은 끝났다. 성공한 것이다. 그는 3600 마일을 여행해 1927년 5월 20일 아침, 미국을 떠난 지 33시간 30분만인 21일 밤(파리 시간) 파리 근교의 비행장에 무사히 착륙했다. 연료는 아직 85 갤론이나 남아 있었다.
현대판 미디어 스타의 원조
린드버그가 탄 비행기가 프랑스 땅에 도착하자 수천 명의 사람들이 린드버그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그들은 1시간 전부터 하늘을 쳐다보며 린드버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파리 시민 10만 명이 린드버그와 ‘세인트루이스 정신'이라고 이름을 단 비행기를 에워쌌다. 그들은 린드버그를 조종석에서 끌어내어 린드버그를 치켜 올리기 시작했다. 열광한 군중들은 린드버그를 1시간 동안 공중에 떠받들고 행진하기 시작했다.
대서양 양쪽 언론들은 당시 26살의 린드버그를 현대판 콜럼버스라고 불렀다. 횡단 성공 후에 미국 신문들은 그에게 <행운의 린디>, <고독한 독수리>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 린드버그는 1920년대의 <영웅 중의 영웅>, <미국의 꿈의 실현자>라고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다. 미국의 대통령 쿨리지는 그를 격려하는 연설을 하였고 해군 순양함을 보내 린드버그와 그의 비행기를 실어오도록 하였다.
뉴욕에서 열린 환영 퍼레이드에는 무려 4백만 명이 몰려들었다. 린드버그를 찬양하는 시 5,000여 편과 노래 250여 곡이 쏟아져 나왔다. 미국의 전기 작가 스코트 버그는 "린드버그야말로 최초의 현대적 미디어 스타"라고 했다. 오늘날로 말하면 유명 인사, 인기 스타, 인기 연예인의 원조였다. 꼭 사업을 해야 돈을 버는 것은 아니다. 유명 연예인들은 대단한 부자들이다. 그래서 오늘날 유명 연예인들은 움직이는 사업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린드버그는 그 원조였다. 린드버그는 그렇게 부자가 되었다.
린드버그의 모습은 오늘날 디지털시대 우리 사회 젊은이들의 우상으로 떠오른 안철수 박사와 여러 면에서 유사성을 발견하게 된다. 새로운 일에 대한 도전 정신, 미디어를 통한 스타 탄생, 자연스럽게 부자가 된 일, 과학 기술인으로서의 삶 등등이 그러하다. 물론 두 사람 사이에 서로 다른 부분이 한 군데 있기는 하다. 바로 믿음이다. 린드버그는 하나님을 믿는 겸손한 사람이었다. 유명 인사가 되었음에도 결코 자만하지 않고 늘 겸손으로 일관한 린드버그 삶의 중심에는 하나님이 있었다.
린드버그의 믿음
린드버그 대위가 비행기로 세계 일주를 하고 프랑스에 다시 왔을 때 많은 사람들이 그를 환영했다. 그 무리 중에는 담배회사 사장도 있었다. 그는 담배 한 대를 주면서 이렇게 린드버그에게 제안했다.
“린드버그, 당신이 담배 피우는 사진 한 장 만 찍는다면 5만 달러를 주겠소."
그 때 린드버그 대위는 이렇게 말했다.
“그럴 수 없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린드버그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렇다면 단지 담배를 입에만 물고 사진을 찍으면 됩니다. 그래도 5만 달러를 주겠소."
"나는 세례를 받은 사람입니다. 그런 행동을 할 수 없습니다."
린드버그는 이 제안도 거절했다. 이 기사가 다음날 프랑스 일간지에 크게 보도로 나갔다. 이 기사를 읽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감동을 받았다.
“린드버그를 위해 모금을 합시다.”
그 금액이 두 번 거절한 10만 달러였다. 그는 세계적 인사가 되었다. 그는 당시 비행기 안에 타고 있었을 때의 일을 이렇게 회고했다.
“저는 사람이 만든 기계들이 얼마나 부서지기 쉬운가를 깨닫았습니다. 그러므로 믿음 없이 비행기를 타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한 사람이 죽느냐 사느냐 하는 것은 모두 주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그 분이 만드신 피조물이기 때문이지요”
린드버그의 또 다른 모습
린드버그는 과학자이기도 했다. 자신의 과학자적인 소양과 능력을 사업으로 연결시켰다. 안철수 박사가 컴퓨터 바이러스 백신을 벤처 기업으로 연결한 것과 유사하다. 대서양을 횡단하여 유명해 진 이후 린드버그는 프랑스로 가서 생리학자 알렉산더 카렐과 협력하여<카렐-린드버그 펌프>라고 불리는 인공 심장을 만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1938년 카렐과 함께『장기 배양』이란 책을 발표하였다. 카렐은 노벨 생리학상을 수상한 뛰어난 의사였다.
그 후 미국으로 귀국한 린드버그는 1939년 미 육군성에 배속되었다. 하지만 1941년 미국의 제2차 세계대전 참전에 반대하다가 그만 해임을 당하였다. 그러나 미국이 전쟁에 참전하자 민간인의 자격으로 전쟁에 적극 협력하였다.
1954년 미 대통령 아이젠하워는 린드버그를 미국 예비역 공군 준장으로 임명한다. 말년에 그는 하와이에서 아내와 함께 조용히 지내며 가끔 젊은 시절의 비행을 떠올리곤 했다. 한번은 갑자기 자기가 탓 던 비행기가 보고 싶어졌다. 린드버그는 비행기를 미국 박물관 스미소니언협회에 기증했었다. 박물관을 방문한 린드버그는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젊은 시절 목숨을 걸고 자신과 비행을 함께한 바로 그 비행기의 좌석에 다시 앉아보았다. 린드버그는 큰 감회에 젖었다. 한참 뒤 그는 사다리를 타고 내려오며 말했다.
“내가 저 고물 비행기로 대서양을 건넜단 말입니까?”
그 말에 놀란 박물관장이 물었다.
“아니, 바로 저 비행기를 몰고 대서양을 건넌 장본인께서 무슨 말씀입니까?"
그 때 린드버그가 말했다.
"저 비행기 안에는 고도계며, 계기판이 없군요. 지금 생각하면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 비행기는 엔진과 날개 그리고 바퀴만 달린 날아가는 기계에 불과했던 것이다. 린드버그조차 불가능한 일이었다고 말한 것을 가능케 한 힘은 무엇이었을까? 린드버그가 몰고 대서양을 건넌 ‘세인트루이스의 정신’은 단순한 비행기가 아니었다. 린드버그의 젊음과 꿈, 도전 정신이 담긴 아주 특별한 비행기였다. 그리고 린드버그의 고백대로 성공 뒤에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었던 것이다. 린드버그는 훗날 다음과 같이 고백하였다.
“젊었을 때 나는 과학을 신봉하던 자였습니다. 하나님보다도 과학이 중요했지요. 그러나 곧 깨닫게 되었어요. 사람이 만든 것은 곧 없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적 진리는 없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신 창조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적 진리를 의지할 때 우리는 안심할 수 있습니다. 만일 영적 진리를 거부하면 인류는 곧 멸망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영적 진리를 이해해야 하지요. 그리고 우리의 삶에 적용시켜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겸손과 묵상 그리고 기도의 능력을 끄집어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헌신을 요구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보상은 지극히 클 것입니다. 인류에게 단 하나 희망이 있다면 바로 이것입니다.”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시 37편 4절)
* 이 글은 조덕영 박사의 ‘창조신학연구소’ 홈페이지(www.kictnet.net)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조덕영 박사는
환경화학 공학과 조직신학을 전공한 공학도이자 신학자다. 한국창조과학회 대표간사 겸 창조지 편집인으로 활동했고 지금은 여러 신학교에서 창조론을 강의하고 있는 창조론 전문가이기도 하다. 그가 소장으로 있는 ‘창조신학연구소’는 창조론과 관련된 방대한 자료들로 구성돼 목회자 및 학자들에게 지식의 보고 역할을 하고 있다. ‘기독교와 과학’ 등 20여 권의 역저서가 있으며, 다방면의 창조론 이슈들을 다루는 ‘창조론 오픈포럼’을 주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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