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기독교 이단 사이비종교 척결운동을 위한 올바른 정신과 자세는 무엇인가?

한국 기독교역사는 복음이 처음 들어올 때부터 선교사들의 순교의 피가 흠뻑 젖은 피의 역사였습니다. 지금도 앞서간 신앙의 선배들의 순교자적 사명 따라 복음의 진리를 위해 희생하겠다는 결사적인 정신이 이어지고 있기 때문에 오늘날 한국교회의 역사는 세계 열방을 향하여 복음의 빚진 자로서의 사명을 향해 끊임없이 달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진리를 위해 숭고한 피를 흘렸던 순교자들의 피가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도 우리는 진리 수호에 대한 올바른 자세와 전략적인 지혜를 모아야 합니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빌 1:6절).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기독교 이단과 사이비종교를 척결하는 올바른 자세일까요?

어떻게 하는 것이 이단을 척결하는 바른 자세이며, 과연 무엇이 문제입니까? 아무런 기독교 이단 판단기준도 없이 사소하고 미미하며, 흠집용 신학사상 문제나 인간이 모든 것을 다 이해할 수 없는 개인의 신앙적 체험, 정치적인 감정, 그리고 선교현장의 문화적인 이해와 성경해석과 적용에 관한 차이점까지 모두 이단이라고 치부해 버린다면 사실 이단성이 없는 개인이나 교회, 기독교 기관이 세상 어디에 존재하겠는가? 라고 반문하고 싶습니다. 이단은 몸 안에 들어와서는 안 될 암세포요, 이물질(異物質)입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처럼 뉴욕에 초청되는 한국의 무수한 강사들을 너무나 쉽게 주관적으로 판단하고 정죄하며, 삐뚤어진 사고방식을 가지고 재판관의 위치에서 남을 무너뜨림으로 쾌감을 느끼려고 하는 병적인 작태를 교계의 분위기를 보아서라도 이젠 중단해야 할 시점에 온 것입니다. 실제로 깊이 알고 보면 이단 사이비를 척결하겠다는 장본인들의 학문적 소양과 신학적인 사고력이 어느 정도 기준에는 도달해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 매우 안타깝습니다. 그 증거로서 적어도 비교 종교학 강의나 무엇이 이단 사이비 집단인지? 에 대한 강의를 직접 할 수 있는 수준에 있지 않고,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강사를 데려와 세미나를 열거나 일부 언론사의 검증되지 못한 기사를 근거자료로 이단 판정을 결의하며, 불의하고 좌경화된 자칭 기독교 언론과 결탁하여 무가치한 싸구려 논쟁으로 교계를 매우 혼탁하게 만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뿐만 아니라 “세이총”이니 “진목연”이니 단체 이름만 다를 뿐 동일한 몇몇 인물들이 거짓과 권모술수, 날조된 비방과 공명심을 발휘하여 세속적 정치 연대를 도모하며, 결과적으로 반기독교적인 활동으로 전도의 문을 막고, 선교의 열정에 찬물을 끼얹으며, 오히려 이단 사이비 집단의 발 빠른 서식을 적극적으로 안전하게 방치해 주는 도우미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체계를 세우고, 전도의 문을 여는데 치명적인 문제가 없으며, 영혼 구원하는 일에 피해가 되지 않는다면, 함부로 주 안에서의 형제나 신앙가족에 대해 이단 정죄를 하거나 사역을 적극 지원하지 못할망정 방해를 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너무 자주 이단성을 거론하거나 일반적인 생각과 견해를 특별한 사건인양 문제를 제기한다면 진작 특별한 사건이 일어났을 때에는 그 사건에 대해서 믿는 자들조차 무관심하게 될 것이고, 무감각하게 반응할 것입니다. 시시 때때로 돌출하는 시한부 종말론자들 때문에 진작 가져야 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신앙이 우리에게서 점점 식어진 것처럼, 이단 대처 방안이 매우 중요하긴 하지만 너무나 그 대상이 일반화되고 보편성을 갖게 된다면 이단 사이비에 대한 관심과 경각심이 결국은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때로는 신학적 전문성이 없는 사람들이 전문적인 신학적 깊은 사고력과 지식이 없어서 잘못된 편견을 갖고 함부로 이단정죄에 열을 올리는 경우도 있고, 선교 현장(mission field)의 몰이해로 인하여 최전선에서 뛰고 있는 현장 선교사들을 실제로 힘들게 하고 고통스럽게 만드는 일들도 비일비재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나라 확장과 영혼 구원하는 일이 어떤 개인이나 어떤 교회에 국한되어 실효성을 거두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과 동역하는 유기적이고도 총체적인 합동작전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각각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먼저 전도대상이나 지역을 정해놓고 기도하는 사람,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불모지에서 최전선의 철의 장막을 뚫고, 어두움의 영들의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 가장 취약한 최전선 위험한 지역에 파견된 현지 선교사들, 말씀으로 복음의 씨를 뿌리는 사람, 양육하고 보양하는 사람, 보살피는 사람 등등 역할이 다양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땅 위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하나님 나라 확장사역은 총체적인 Networking으로 서로 존중하며, 상호 협력하는 가운데서 우리는 궁극적인 열매를 기대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최근에 활동하는 몇몇 이단 연구회나 이단 대책 위원회는 과연 그 조직이 그리스도의 교회와 성도들을 진리의 말씀으로 보호하고, 진리를 수호하는 연대적 책임을 다하고 있는지?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 확장을 위해 피를 흘리기까지 선한 싸움을 싸우고 있는지? 아니면 오히려 예수님의 가르침에 역행했던 바리새인들과 주후 1세기에 교회를 박해했던 사울과 같은 행위를 반복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 당시 유대인들도 예수님을 이단으로 척결하려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런 면에서 우후죽순처럼 다양하게 발생하고 있는 이단 사이비대책 위원들이나 이단 연구회에 몸담고 있는 분들은 이제라도 심각성을 가지고, 의미 있는 경고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이단 사이비를 척결하겠다고 호헌장담하며, 비겁하고 유치한 신학 논쟁과 이단 사냥꾼의 마녀사냥을 하고 있는 동안에 오히려 무서운 기독교 이단이요 사이비인 신천지 집단들이 뉴욕에만도 300명이 서식하고 있었으니 얼마나 한심한 일인지 모릅니다. 지금도 162St. & 45Ave.에 위치한 신천지 집단의 활동이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버젓이 맹활약하며 전통교회 교인들을 미혹하여 끌어가고 있습니다. N교회의 경우 교회 내부의 혼란을 틈타서 아예 집중적으로 그곳이 신천지 아지트가 되어가고 있는데도, 진작 싸워야 할 대상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엉뚱한 곳을 이단성 대상으로 지목하고 신선놀음을 하고 있으니, 이대로 나간다면 이단 사이비 포교활동에 간접적으로 일조하고 있는 좌경화된 기독교 이단 대책 단체들은 후일에 하나님으로부터 심판을 면치 못할 것이고, 이에 못지않게 기독교 언론으로서 공범에 가담하여 이를 지원한 사이비 기독교 인터넷 사이트도 뉴욕과 뉴저지 인근 교계의 불신임을 받아 자멸할 것임을 또한 미리 경고하는 바입니다.

5. 좌경화된 이단연구 대책기관의 인터콥에 대한 구체적인 문제점

1) 선교단체인 인터콥과 최바울 선교사를 이단(異端)이 아닌 “이단성(異端性)이 짙은 단체”라고 애를 쓰면서 음해 공작하는 이유를 충분히 이해는 합니다. 이단이라고 해서 떠들어대 봐야 신실하고 의식 있는 목회자들은 아무도 호응할 사람들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선적으로 최바울 선교사의 책 내용에서도 이단에 관한 한 확실한 증거가 없고, 최바울 선교사의 신앙인격이나 사역의 열매가 더 이상 상종하지 못할 정도로 추악하거나 교주 냄새가 전혀 나지를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한국교회와 신학자들 가운데 많은 분들이 최 바울 선교사를 잘 알고 있고, 오히려 정치적으로 음해 공작하는 무리들 보다는 적어도 훨씬 신앙인품이나 도덕성이 탁월하고, 선교의 열정이나 사역, 기본적인 신학사상이 매우 건전할 뿐만 아니라 젊은이들과 지성인들에게 다가가기에 적합한 지도자임이 점점 증명이 되고 있습니다. 인터콥과 최바울 선교사의 이단성은 현재도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이 거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신실성과 정직성 때문입니다.

2) 그래서 시비를 걸고 넘어지는 것이 신학사상(神學思想)문제입니다. 그것은 이원론 사상이니, 세대주의니, 베뢰아 귀신론이니, IHOP의 신사도 운동 등등에서 조금이라도 닮은 불건전한 신학사상과 공통분모를 애써 찾아내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다윈(Charles Darwin)의 진화론을 주장하는 이론과도 같습니다. 만일 최바울 선교사에게서 위에 나열한 대로 각종 불건전한 이단성과 신학사상이 조금이라도 발견되어 모두 족집게처럼 찾아내는 일에 성공했다면, 그것은 이단을 만들기 위해 가능성 있는 이론에 최대한 집착한 것이지, 정확하게 이단의 뿌리를 알고 그 사실을 발견했다고 단정하기에는 서투른 작업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마치 “인간의 조상은 원숭이다.”라는 가설적인 전제 속에서 원숭이가 인간으로 진화한 과정을 상상의 날개를 펴고, 모든 원숭이로부터 인간과 비슷한 공통된 모습을 찾아내려는 노력과 같다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3) 위의 2)번에서 나열한 불건전한 신학사상은 일반 성도들도 대개는 신학적인 용어에 익숙해 있지 않을 뿐이지, 다 알고 있는 신학사상입니다. 그래서 일반 교인들도 극단적으로 육체나 물질은 악하고, 영이나 비 물질은 선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과 구원의 계획을 인간의 역사와 시간과 공간 속에 가두어 놓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마귀와 그의 졸개들(귀신)이 시도 때도 없이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찾아와 질병으로 사고로 폐망으로 생각과 지각을 혼미케 한다고 믿지 않습니다. 사단과 귀신들 보다 더 능하신 야훼 하나님이 절대 주권을 갖고 선한목자로서 우리를 매 순간 인도하고 있음을 확실히 믿고 있습니다.

4) 또한 오늘날에는 구약의 제사장이나 선지자, 야곱의 12아들(12지파), 신약에서의 예수님의 12제자들(사도들)과 같은 특정인물이 존재하고 있지 않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단지 제사장처럼 우리도 하나님을 섬기고, 봉사하며, 예배를 드리고, 복음을 전한다는 것이고, 예언자나 선지자의 정신을 가지고 사역을 한다는 것이며, 사도의 정신을 이어받아서 위임받은 그리스도의 복음사역을 영광스럽게 수행해 간다는 것으로 대부분의 성도들이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평신도들도 이 정도는 대부분 알고 있는 너무나 상식적인 것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것도 상대적으로 그 수준을 점검해 볼 필요성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견해도 들어보려고 하지 않고, 실제로 본인들도 그러한 용어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이단성 운운하는 것은 흠집을 내려는 목적에 불과하지 선한 의도가 전혀 없다는 것이 증거가 됩니다.

5) 세대주의(Dispensationalism)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와 다른 신학적 견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너무 쉽게 정죄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자기의 신학과 다르면 모두 '사탄의 종'이고 '적 그리스도'이고 '거짓 선지자'이고 '이단'이라고 합니다. 양식 있는 학자라면 그런 극단적이고 과격한 언사는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세대주의에 대해 그러한 식으로 매도를 해왔습니다. 그런 논리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달라스 신학교나 탈봇 신학교는 세대주의 신학교이기 때문에 모두 이단이나 사이비집단이며, 스윈돌(Charles Swindoll), 맥아더(John MacArthur, Jr.), 위어스비(Warren Wiersbe), 크리스웰(W.A. Criswell)등도 모두 이단이거나 사이비이고, 따라서 그런 사람들의 책을 출판하거나 읽는 일도 절대 없어야 할 것이다.

세대주의를 매도하거나 정죄하는 사람들의 세대주의 이해는 실제 세대주의자들의 견해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고, 어떤 경우에는 과연 그들이 세대주의가 무엇인지 제대로 이해하고서 그런 말을 하는지, 아니면 간접적으로 남에게 들은 지식에 근거해 그런 말을 하는지 의문이 갈 때도 많이 있습니다. 세대주의자들의 문제는 5%에 불과합니다.

계약신학자들도 세대주의자들에 대해서 마찬가지로 불평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계약신학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한 채 비판만 한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오류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 언제나 견해가 다른 신학을 바르게 이해하려고 먼저 시도한 뒤에, 그 신학이 갖는 장점과 문제점을 언급해야만 합니다. 세대주의와 계약신학과의 관계는 이단 대 정통신학의 관계가 아니라 정통신학 안의 신학적 차이임을 알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보수 신학계에서 상호대립 관계에 있는 두 신학 조류이기 때문에 상대방의 입장을 존중하면서 학문적 관점에서 논의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접근 방법이라고 생각됩니다.

이스라엘에 대해서도 세대주의자들은 너무 지나치게 친(親) 이스라엘 입장이고, 그 반대자들은 지나치게 반(反) 이스라엘 입장으로서 무관심 또는 냉소적입니다. 서로 간에 신학적인 차이로 인하여 양극 현상을 빚은 결과입니다. 그러나 두 신학 조류가 다 보수 신학계로서 각기 장점이 더 많지, 단점이 더 우세한 것은 아닙니다.

6) 사이비 이단분별 기준은 진리의 성경말씀이 표준이 되고, 이미 공회(公會)가 마련한 공식적인 기준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좌경화된 이단 대책기관들은 사이비 이단 분별 기준을 사이비 이단집단들과 불건전한 몇몇 신학사상에 표준을 두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확실한 이단적인 증거를 찾는 것이 아니라 비슷하거나 유사한 것 같아 보이면 모두 이단성이 있는 것으로 판정을 합니다. 왜냐하면 그 기준이 매우 희미하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원판(성경)으로 주물을 구워야지? 이미 나와 있는 물건(현실)을 가지고 복사를 하다보면 결국엔 엉뚱한 결론이 나옵니다. 원숭이를 묵상하다가 사람에게서 원숭이 닮은 것을 찾아내는 경우와 같습니다. 인터콥을 음해 공격하는 사람들에게 “당신들도 원숭이를 닮은 몇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라고 한다면 얼마나 황당하겠습니까?

7) 이단성이 짙은 비전문가들이 신학사상을 다루면 어렴풋이 알고 있는 그 짧은 편협한 신학의 잣대로 사람을 정죄하고, 매장시키고, 인격살해를 하기 쉽지만, 신학의 전문성을 지향하는 사람들은 점진적인 신학발전에 기여할 뿐만 아니라, 성경을 더욱 이해하기 쉽게 드러내고, 하나님 나라 확장과 복음 전파하는 사역을 음으로 양으로 원활하게 학문적으로 지원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바른신학은 바른 신앙관을 정립해 주고, 바른신앙은 바른 생활을 하도록 도와줍니다.

8) 신학(神學)이라는 학문은 그 자체만으로는 불완전합니다. 신학사상이란? 계시된 성경말씀의 범위 안에서 성 삼위 하나님에 대해 점진적으로 알아가는 과정의 학문입니다. 그러므로 신학은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을 섬기는 그의 백성들의 삶을 위해서 필요한 정리된 이론인 것입니다. 모든 이론과 학문이 그렇듯이 이론이 먼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건이 먼저이지요. 우리를 향하신 구원의 실제의 사건을 옛날에는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번에 걸쳐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말씀하셨으나, 이 마지막 날엔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히 1:1-2). 그러므로 구원의 실제의 사건을 기록한 것이 성경말씀입니다. 이것을 다시 후대에 사람이 이론으로 정리한 것이 신학이라는 학문입니다. 사소하고 미미한 신학사상의 차이점을 가지고, 상종 못할 이단성 운운하는 것은 너무나 학문적으로 옹졸한 작태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9) 신학사상과 이단사상은 엄연히 다릅니다. 신학 사상은 교단마다 조금씩 다를 수가 있습니다. 성경의 진리는 변함이 없지만, 신학사상은 해석과 적용의 문제이기 때문에 조금씩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혹 불건전한 신학사상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놓고 확대해서 이단이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인터콥과 최 바울 선교사의 신학사상이 그렇게 불건전하다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더욱이 인터콥 선교회를 이단성이 짙다고 문제 삼고 있는 부류의 사람들도 어떤 신학사상을 가지고 있는지? 그들의 신학적인 학문의 깊이와 내용과 신학적인 색깔을 검증해 볼 필요성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모두들 자신이 성장해온 신학적 배경에서 다른 사람을 비방하고 비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0) “이단이다” 또는 “이단이 아니다”가 아닌 “이단성이 짙다”라는 표현은 대부분 정치적인 발언일 뿐입니다. 언제나 자신에게 불리한 위기상황에서는 몸을 피신할 수 있어야 하니까 자신 없는 어중간(於中間)한 정치적인 발언을 하는 것입니다. 의미 있는 정치는 사람을 살리는 정치이지만,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정치는 사람을 인격적으로 살해하고야 말지요. 현재 인터콥과 최 바울 선교사를 음해하고 공격하는 집단은 사이비 이단 척결과 진리수호라는 명분 아래 한 개인의 인격을 살해하고, 이 세대에 가장 취약한 중동선교의 밝아오는 여명을 이단 정죄라는 죄악의 손바닥으로 가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 번도 중동 이슬람 지역을 위해 기도하지 않았거나, 그 지역의 땅도 밟아본 경험이 없다면, 그리고 그런 나라에 단기선교 차원에서라도 그 민족을 가슴에 품고, 선교의 현장을 다녀오지 않았다면, 함부로 사악한 입을 열어 전문선교사를 이단성이 있다고 매도할 자격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선교현장을 이해하지 못하면 신학사상도 콩 놔라 팥 놔라 논할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현장을 위해서 신학이 지원되어야 합니다.

11) 그렇다면 무엇인가? 단순히 이단성이 있다고 여론화시켜서 여기에 관련된 정치적 이득을 챙기겠다는 계산입니다. 이것은 마치 허리케인이나 토네이도와 같은 이상 기후변화로 오는 자연 재해를 인하여 길가의 모든 차량들이 파괴되기를 바라면서 자동차 산업에 더 많은 매출을 꾀해 보겠다는 성공심리와도 같은 것입니다. 많은 목회자들이 이단 정죄의 끊임없는 의도를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사실은 진리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뉴욕에서 정치적으로 자신들과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는 사람들을 곤욕스럽게 하려고 정치 놀음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이유는? 이번 기회에 사이비 이단대책이라는 대 명제를 가지고 업적을 올려 정치적인 세력을 구축하기 위한 발판으로 삼기 위한 것입니다. 이해하기 쉽게 설명한다면, 이단 만드는 공장 공사판 하나 수주하여 평생 권좌를 누리고, 정치적인 입지를 든든히 하려고 하는데 있습니다.

12) 중국 본토의 내륙지역 교회들은 영국의 웟치만 니의 심취주의 사상 때문에 신앙의 본질이 훼손되어 심각할 정도로 이러한 사상이 확산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물론이고 세계 모든 교회들이 그들을 이단이라고 적대시하며 상종을 거부하지는 않습니다. 신학사상에 관계된 문제라면 우리 뉴욕교계에도 얼마든지 잘못된 사상들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학사상에 관계된 문제를 모두 이단이라고 한다면 이단이 주변에 너무나 많아집니다. 예를 든다면 “영성”(靈性)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도 매우 불건전하기 때문에 이단이고, “사도행전의 재현”이라고 해도 이단이고, 일본에서 사역하는 선교사들의 축사(逐邪) 행위도 모두 “귀신론”에 저촉되기 때문에 다 이단이라고 해야 됩니다. 뿐만 아니라 “솔로몬의 일천번제”를 “일천 마리의 제물”로 해석하지 않고, “일천 번의 제물”로 해석하여 “일천 번의 헌금제도”를 도입하고, 헌금을 제도적으로 강요하는 교회들도 모두 이단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이단 정죄에 열을 올리고 있는 장본인들도 불건전한 신학사상에서 아무도 자유롭지 못할 것입니다.

13) 교회와 선교는 불가분리의 관계인데, 만일 지역교회에서 인터콥 선교헌신자로 작정을 했든지, 또는 지역교회에서 이로 인하여 담임목사에게 물의를 일으켜 미성숙함을 보였든지, 아니면 교회에서 뛰쳐나와 인터콥으로 들어갔다고 가정합시다. 그래서 지역교회가 손해를 입었다면, 그 이유 하나만으로 인터콥과 최 바울 선교사가 교회와의 관계에서 이단으로 정죄될 수가 있습니까? 그렇다면, 교인 수평이동을 받는 모든 크고 작은 교회들은 다 이단으로 분류되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수평이동 때문에 교인들을 대거 흡수한 교회들을 향하여 이단이라고 정죄하지는 않습니다. 교회가 선교의 원동력(Motivation)이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할망정 선교기관에 의뢰하여 선교 훈련을 받게 하고, 선교 헌신자로 선교지에 단기선교를 한번 다녀오게 하며, 지속적으로 인터콥과 관계를 맺고 선교 비전을 키워나가는 것이 어떻게 이단으로 분리되는 조건이 되는지? 정신이 나간 사람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그런 발상을 할 수 있겠습니까?

14) 우리는 종종 이런 오류를 범하기 쉽습니다.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서 너무 영적으로 해석을 하려고 하는 문제입니다. 성경(The Bible)은 그저 고전(古典)에 불과할 뿐, 현실적으로 역사에 아무런 메시지도 적용되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또한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구속사적(救贖史的)인 안목이 없이 너무 자의적으로 눈에 보이는 것에만 초점을 두고 해석하려는 오류입니다. 다시 말하면 고대역사 가운데 분명히 인간의 언어로 기록된 성경을 인문과학적인 측면에서 정직하게 연구하려고 하지 않고, 뜬구름을 잡듯이 영해(靈解)하려고 하거나, 현실과 거리가 먼 시공간을 초월한 영적인 세계는 모두 배제하려고 하는 모순된 생각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통전적으로 해석하고 적용해야지 일부분을 가지고 전체인양 해석하는 자세는 오히려 이단성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요소가 다분히 있음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15) “백 투 예루살렘”(Back to Jerusalem)에 관한 용어 사용이 과연 이단성이 있는가? 이러한 용어는 성경신학적(聖經神學的)인 용어이며, 선교신학적(宣敎神學的)인 용어입니다. 그래서 중동지역의 이슬람 전문선교단체인 인터콥의 선교사 650명뿐만 아니라 모든 대부분의 중동지역 선교사들과 여기에 관련된 국내외를 망라한 선교신학자들, 그리고 중동선교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는 많은 목회자들도 “10/40 Window”라는 선교용어와 함께 오늘날 매우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광범위한 선교용어가 되었습니다. 어떤 무식한 신학자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자!”(Back to Jerusalem)라는 구호에 대해서 이단성이 있는 용어이므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고 있는지 한심할 따름입니다.

16) “백 투 예루살렘”이라는 표현은 의미상 단순한 표현은 아닙니다. 여러 가지 함축된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용어입니다. 이러한 용어는 종말론적(Eschatological)인 용어이기도 하고, 선교현장(mission field)의 용어이기도 하며, 유대인들도 결국엔 구원받는다는 언약적 개념에서의 선교 전략적인 용어이기도 합니다. “예루살렘 귀환” “예루살렘에서의 역사의 종결 지점” “유대인들을 위한 복음의 회복(되돌림)” “예루살렘을 향한 역방향(逆方向) 선교” “선교의 종착지점” “복음의 시작 지점과 땅 끝” “복음의 서진(西進)”과 같은 모든 세대를 망라하여 사용되는 다양성 있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용어의 개념이 시온니즘(Zionism)처럼 “사람이 예루살렘으로 가야한다”(예루살렘 귀환)는 것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복음이 마지막 그곳까지 전해진다.” 라는 개념으로 이해를 하고 있습니다. 유대민족을 고토로 귀환시키는 일인 “알리야”라는 본래의 뜻도 “사람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간다.”(귀환)라는 의미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심”으로 그들의 운명(구원)이 바꾸어지는 것을 의미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열심으로 복음이 그곳에도 전해진다는 말입니다.

17) “지금이 예루살렘 시대이다.”라고 외치는 분들도 있지만, 이것도 단순히 세대주의 차원에서 시대를 구분한 것이 아니라, 종말론적인 차원에서 이스라엘에 대해 관심을 갖고, 그동안 무관심하고 편견을 가졌던 유대인들에게도 우리 이방인으로서 열심히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자는 그런 취지가 아니겠습니까? 여기서 “유대인”이라고 함은 히브리 민족의 야웨 하나님 신앙을 전수해온 정통파 유대인 랍비(Rabbi)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안에 있는 모든 분파를 초월한 그 땅의 민족으로 이해를 한다면 오해의 소지가 없을 것입니다. 물론 정통파 유대인 Rabbi들이 먼저 예수를 믿게 되면 더욱 폭발적인 복음화가 이루어질 것이고, 이들이 예수님을 영접하여 변화되면, 아랍권(이슬람)에도 복음이 신속히 확산될 것이 틀림이 없습니다.

18) 그리고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예언서의 내용이지만,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는 이미 이루어진 부분도 있고, 아직 미래의 사건으로 남아있는 성취되지 않은 종말론적인 부분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미 역사적으로 성취되어 졌지만 또한 점진적으로 성취될 이중적인 언약의 내용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예언된 내용들 가운데 시공간을 초월하여 과거에 이미 일어난 성취된 사건이면서도 또한 아직 장래에 될 종말론적인 약속도 남아있다는 예언의 내용인데, 이러한 특징적인 예언서가 곧 에스겔서입니다.

(다음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