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성령이 교회의 사역에 얼마나 중요한 주체가 됨을 지난 한 세기의 오순절운동을 통해 보아왔다. 19/20C의 초로부터 일어나기 시작했던 오순절 운동은 정통교회로부터 이단적이며 사이비적인 것을 오랫동안 간주되어 오지 않았던가! 그러나 지난 세기의 하반기부터 오순절운동은 어느 한 교파의 운동으로 머물러 있지 않았다.

전 교파를 초월한 성령에 의한 카리스마운동으로 전개될 즈음에는 정통을 자랑하는 교파들까지도 편승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지금 소위 성령에 의한 제 3의 물결이라고 하는 새로운 능력전도와 은사운동은 세계교회에게 새로운 관심을 넘어서서 미래를 위한 대안으로까지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전도를 강조하는 새로운 카리스마운동이 지난 과거의 교회의 전통을 무시하거나 거부하는데서 출발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죽은 전통과 배타적 교조주의가 만들어 내놓은 율법적인 모든 파행들로부터 교회가 새롭게되어야 한다는 각성으로부터 출발하고 있다. 지난 몇 세기 동안 우리 개신교는 너무 이성적인 나머지 스콜라적이었다. 그래서 중세를 스콜라신학과 철학이 지배하던 시대였다면 후에 나타난 개신교시대는 후기 스콜라시대라고 말한다. 그 만큼 지난 몇 세기 동안 우리 교회들은 진정한 하나님의 임재를 오직 이성이라고 하는 통로를 통해 분석적으로만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항상 외피는 하나님의 말씀을 내세운 `지성에 호소하는 신앙'(Intellectum quaerens fidei) 이었다. 그러면서도 진정 그 속에는 하나님의 임재(Deus hic et nunc)가 없었으며, 성령님도 계시지 않았다.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교회는 더 이상 하나님의 임재와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영적 성숙에 대한 요구를 피해 갈 수 없다. 이미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모든 평신도들이 하나님의 임재를 어떤 방식으로든 느끼고 있고 그 느낌에 대한 열망은 교파간의 교조적인 테두리를 훨씬 뛰어 넘고 있다. 밑으로부터 올라오고 있는 영적 혁명은 모든 교조적 사제주의의 틀을 부셔버리고 있다. 이 새로운 물결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않는 교회는 스스로 자멸해 갈 것이다. 때문에 오히려 적극적으로 긍정적인 새 길을 교회는 모색해야 할 것이다. 바로 그 길이 새로운 영성운동의 접목이며 개발일 것이다.

새로운 영성계발을 위해 교회는 성령이 말씀을 통해(per verbum), 그리고 말씀을 가지고(cum verbo) 역사 하심을 믿어야 한다. 그러나 교회는 성령께서 오늘날에도 자신의 나타내심(panerosis) 즉, 은사를 부어주심을 믿어야 한다. 모든 능력과 은사들은 사도들의 전유물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오늘날 시대적 사명을 느끼는 모든 이들에게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할 수 있다.

성령의 음성을 듣는 것은 모든 영성의 전제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성령의 능력을 받거나 체험하는 일이 결코 십자가의 고난을 생각함이 없이 발생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할 것이다. 정통교회들은 오늘날까지 십자가의 영성을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섬겨왔다. 이 십자가 정신이 상실된 기적과 능력 행함이 얼마나 무섭고 왜곡된 것인지는 오랜 기독교 역사가 증명해 주고 있다. 그리고 성령의 음성을 듣는 교회가 복음전파를 행해야 할 것은 교회의 성장에 직접적으로 관련이 되어 있다. 오늘날 많은 주의 종들을 통해서 또한 평신도 사역자들을 통해 귀신들이 축사되고 능력을 통해 많은 이들이 구원을 받고 있음은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이를 통해 주님의 살아 계심과 임재가 직접적으로 증거 되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는 수많은 주님의 사역에 대해 감사해야 하며 또한 그 사역들을 통해 전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려야 한다. 진실과 순수함과 오직 겸손함에 기초한 진지함을 잃어버리지 않는다면 분명히 오늘날 성령에 의한 능력사역과 전도는 그 생명이 길 것이다.

21C 교회는 다양한 영성들을 자신의 몸 안으로 받아들이기 위한 균형을 잡는 일이 요청되고 있다. 교회들이 직면한 영적 전쟁은 밖에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의 눈앞에 펼쳐지는 보이는 세계보다는 오히려 내면에 감추어진 인간성의 모든 영역들이 진정으로 회복되어야 할 터이기 때문이다. 인가성의 내면적인 세계는 우리들의 복잡한 성격들과 그림자 그리고 과거들로 뒤 엉켜 있다. 그리고 내면의 성적 충동과 정욕은 이미 하나님의 자녀로 인침을 받은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의 정신세계를 어두움과 더러움으로 덮고 있다. 이것이 교회의 새로운 영성회복을 필요로 하는 영역이다. 즉, 내적치유의 사역은 오늘날 교회가 필요로 하는 또 다른 영성의 한 영역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영성회복이 교회의 성장에 중요한 부분임을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교회는 오늘날까지 모든 영적 개혁을 각 개인의 구령의 문제로 축소시켜 왔다. 그러나 새 시대의 교회의 사명은 루터가 말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위임'(mandata)들을 생각해야만 할 것이다. 각 개인이 지닌 가정에 대한 행복과 자신이 소속된 교회에 대한 충성, 그리고 자기 민족과 국가에 대한 사회적 책임과 헌신등은 우리가 새롭게 발전시켜 나가야 할 영성회복의 영역인 것이다. 만일 이런 것들을 도외시하고는 결코 진정한 교회 성장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