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6월 시작한 원 호 목사의 로마서 강해가 87회를 연재하며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원 목사의 로마서 강해는 ‘신학적인 용어와 교리로 가득해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로마서를 누구나 이해하기 쉽게 풀어놓았다’는 평가를 받으며 연재 동안 독자들의 인기를 모았다.

로마서가 AD 56년경 로마에서 박해받으며 신앙생활하고 있는 그리스도인에게 바울이 띄운 서신이듯, 원 목사의 로마서 강해는 신학 정립을 위한 교리지침 보다는 개신교 신학이 현대의 그리스도인 생활현장에 실제적으로 적용될 수 있도록 노력한 면이 돋보였다.

연재를 마친 원 목사를 만났다. 그는 로마서 강해의 핵심은 교리적인 이해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성도의 교회 생활까지 바로 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원 목사는 로마서의 주제가 구원과 성화, 하나님의 절대주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통해 온 천하 만민이 구원받기 위함을 깨달아야 한다고 조언했다ⓒ김브라이언 기자

-로마서 강해를 마쳤습니다. 소감을 전해주십시오.

“부끄럽습니다. 강해를 통해 이민교회와 많은 성도들에게 신학적으로나 실질적으로 적용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시작했습니다. 주위의 많은 분들의 격려도 힘이 됐습니다. 부족하지만 무사히 끝나게 되어 감사합니다. 로마서 전체를 강해하며 뿌듯하고 보람된 시간이었습니다.”

-강해를 마쳤는데 로마서를 전반적으로 정리해주십시오.

“로마서는 5개의 S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즉 Sin(죄), Salvation(구원), Sanctification(성화), sovereign(하나님의 절대주권)과 Service(예배)입니다. 그러나 로마서의 중심주제가 ‘하나님의 의’라는 것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다시 말해 ‘왜 우리가 하나님의 의가 필요한 존재인가’에 대한 죄의 지적이 전반부에 등장하고, 구원 받아야 하는 필요성이 나왔다면 다음에는 ‘어떻게 하나님의 의를 소유하느냐’에 대한 구원에 대한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후 하나님의 의가 우리에게 주어지고 우리가 하나님의 의를 받아들였을 때 어떤 변화가 있는지 성화의 내용이 나옵니다.

이후에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관한 내용과 12장부터는 마지막까지는 하나님의 의가 우리에게 주어졌다면 우리의 삶 가운데, 교회 생활가운데 실천하며 섬기는 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또한 로마서가 우리에게 말하는 뼈대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의로움을 우리에게 주신다는 것입니다. 전가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 뼈대를 가지고 로마서를 읽다보면 핵심을 알게 됩니다.“

-바울이 로마서를 보냈던 시대와 지금을 비교한다면?

"로마서를 강해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것은 약 2천년이라는 시간적 공간을 극복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의 문화적, 환경적, 언어적 차이를 줄이려 성도들이 잘 이해하고 삶에서 적용할 수 있도록 정리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로마와 지금은 동일한 면이 아주 많습니다. 자기의 의로움에 빠져서 행위로 구원받고자 하는 교만한 마음은 그 당시와 지금이나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고 예수님 없이도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죄의 뿌리 역시 지금도 같은 상황입니다.

로마서 12장에는 섬김에 대해서 나옵니다. 당시 섬김에 대한 올바른 정의가 필요했을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섬김에 대해 혼동하고 있습니다. 자기만족으로 섬기려하고 자기의 주장을 관철시키면서 섬긴다고 하지만 그리스도가 원하는 섬김인지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건강한 몸은 통일성과 질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심장의 역할만이 중요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바울의 염려와도 같이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의 모습이 편향된 모습으로 가고 있습니다.

로마서 마지막 16장에는 바울이 이름을 거명하고 있습니다. 로마서의 마지막 도전은 ‘믿음의 신실한 사람으로 거기에 기록될만하게 살라는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해 봅니다.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분별하고 너희 몸을 거룩한 산 제자로 드리라는 바울의 당부를 깊이 알아야 합니다.

-로마서는 많은 신학적 교리를 담고 있는데 특별히 중점을 둔 부분은 어느 부분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로마서의 포커스를 구원론에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결국 교회론 이라고 생각합니다. 올바른 구원론은 올바른 교회관에 나타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교회가 어려운 것은 교회론이 혼탁해졌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1장에도 보면 이스라엘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올바른 신앙의 열매가 없을 때 오는 신앙의 도전이 나옵니다. 구원론은 지식으로 갖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생활로 나타나지 않는다면 사상누각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성도들의 삶에서 구원론은 교회론까지 확장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교회가 무엇인지에 대한 확실한 정의가 없기 때문에 구원에 대한 정체성도 흔들리는 것입니다. 최근에 일어나는 잘못된 종말론이나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반하는 신학의 적용들 역시 구원론과 교회론의 긴밀한 관계에 대한 잘못된 이해 때문에 문제가 생기고 있다고 봅니다.“

-교회론에 대해 좀 더 깊이 설명해주신다면?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 입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한 산제사를 드리라고 한 것은 구원과 성화, 하나님의 절대 주권의 신비에 대해 깨달은 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한 몸을 이룬 교회에 그것이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참된 교회론의 출발입니다. 교회는 물론 에클레시아라고 언어학적인 정의를 내리지만 구체적으로 나아가면 그리스도의 몸을 이룬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중심으로 몸을 이루는 것입니다.

로마서의 주제가 구원과 성화, 하나님의 절대주권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교회를 세우신 것은 교회를 통해 온 천하 만민이 구원받기 위함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로마서를 통해 우리에게 도전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성령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는 독특한 영적 유기체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시고 또한 이루신 것입니다.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이것을 기억하길 바랍니다.“

-로마서에서 말하는 구원과 성화를 간단히 정리해주신다면?

▲원 목사는 성도의 섬김을 말하며 자기만족으로 섬기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원하는 섬김인지 돌아봐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김브라이언 기자
“구원은 인간의 행위에 있지 않습니다. 절대로 인간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구원이 인간의 행위에 있다면 우리는 지옥과 천국을 수십 번도 왔다 갔다 할 것입니다. 구원이 자기 의에 있다면 구원에 대한 기쁨 보다는 두려움이 클 것입니다. 구약에서도 구원을 인간의 행위에 접목시키시지 않으셨습니다. 율법 역시 인간의 죄성을 깨닫게 합니다. 그리고 소망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성화에 대해서는 7장에 바울의 고백이 있습니다. 신학적으로 ‘이 고백이 구원 받기 전 또는 후 이다’ 라는 논쟁이 있습니다. 그러나 로마서의 서술 진행을 보면 바울 자신도 사도로 부름 받은 후에도 죄와의 싸움이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주께서 죄 값에서 나를 구했다는 확신을 가지고 나서 경험하는 것이 성화라고 생각합니다. 즉 우리의 삶 속에서 경험하는 과정이 모두 성화의 과정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주로 영접했을 때 무조건적으로 우리에게는 새로운 삶이 주어집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새로운 속성이 들어오는데 여전히 우리에게는 죄를 지으려는 경향성이 있습니다. 이미 죄 값은 치러졌습니다. 나는 죄에서 자유하게 됐습니다. 죄인이 아닙니다. 그런데 링컨의 노예해방으로 노예들이 자유롭게 되었어도 노예근성에서까지 자유롭게 된 것이 아닙니다. 죄에서 해방되었지만 죄로 부터 우리가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우리가 끊임없이 싸워야 합니다. 죄의 영향력과의 싸움입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성령 충만은 일회적인 것이 아닙니다. 성령 충만을 받으라! 헬라어 시제의 현재동사라는 것은 계속적인 반복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계속 성령 충만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나를 주관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말씀을 읽고 그 말씀이 나를 주관하는 것이 성령 충만의 삶이지 일시적인 감정의 충만이 아닙니다. 내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내 생각이 부딪힐 때 말씀이 나를 주관하는 것이 바로 성령 충만입니다. 성화에서의 핵심은 말씀에 순복하는 것입니다.”

-강해 가운데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많은 은혜를 받았다는 독자들이 있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언약을 맺습니다. 짐승들을 반으로 쪼개고 계약의 당사자 두 사람이 그 사이로 걸어가며 피의 언약을 합니다. 계약의 상황을 어길 때는 이 재물과 같이 죽임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강해에서도 언급했지만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언약을 봐도 그렇습니다. 짐승들이 쪼개져 있고 아브라함도 하나님과 언약을 맺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잠들어 있고 하나님의 횃불이 그 사이를 지나갑니다. 그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언약에 대한 이행 여부가 하나님께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축복입니다.

언약을 맺은 당사자는 하나님 입니다. 아브라함은 언약을 지키든 안지키든지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은혜인 것입니다. 구약을 보면 이스라엘은 계속 조건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끝까지 언약을 붙드셨습니다. 다윗의 언약을 지키셔서 솔로몬이후 많은 왕들이 타락했지만 다윗의 자손에서 예수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언약은 무조건적인 언약입니다. 바울은 그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새 언약의 축복을 주셨습니다. 지금은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의 때인 것입니다. 새 언약은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언약이며 분명 성취될 언약입니다. 우리를 성전을 삼으시고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은 구약 어디를 봐도 찾아볼 수 없는 축복입니다. 그것은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의 축복이며 영생을 위한 확실한 보증을 주신 것입니다. 역시 이런 신학적 정립을 가지고 있다면 종말론이나 신앙적인 오류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최근에 교회론이 혼탁해진 것은 기본적 교리에서 벗어났기 때문입니다. 번영신학이라는 미명아래 기복신앙으로 전락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누구인지 바로 알고, 왜 교회를 다니는지 또 어떻게 교회를 섬겨야 하는지 올바른 신앙의 모습을 회복해야 할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