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분과 대화를 하면서 나누는 이야기가 어딘가 사실과 맞지 않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분명히 그 자리에 있어서 어떤 내용을 어떤 방식으로 하자고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지금 대화의 내용은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내용은 맞는데 방식이 달라진 것입니다.

둘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이분에게 그 이야기를 전해 주신 분이 잘못 전하였거나, 아니면 이야기를 전해들은 이분이 자기 방식대로 전해 들었든지 말입니다.

예를 들어 이런 이야기입니다. LA를 가는데 스스로 가는 A 방법으로 가려 하지만, 그것이 잘 안되면 남의 도움을 받는 B방법으로 가려 합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이 이야기를 들은 갑이라는 사람이 을이라는 사람에게 그가 B 방법으로 LA를 가려 하는데, 갑과 을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을이라는 사람이 어떻게 그는 매번 남의 도움으로 LA를 가려고 하느냐고 하는 것입니다. 즉 스스로 가려는 A 방법은 없어지고 그는 아주 염치없는 사람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요즘은 소통(Communication)의 지도력이 아주 중요하게 여겨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소통에는 몇 가지의 한계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하나는 표현의 한계입니다. 사람의 언어가 한계가 있기에 그 의미를 정확하게 전달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더욱 언어의 개념이 선명치 않은 우리나라의 말로서는 그 한계가 더욱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예로 ‘서너 개, 예닐곱 개’, ‘글쎄요’, ‘--한 것 같습니다.’, ‘--카더라.’ 등등

또 하나는 이해의 한계입니다. 어떤 사안을 바라보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달리 보이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입장에서 자기중심적으로 해석을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당사자의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해석을 하려 합니다. 해석을 할 때에도 자신의 감정 여하에 따라 긍정적일 수도 있고, 부정적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에 이해를 잘못하여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이렇게 극복하였으면 좋겠습니다.

우선은 나의 이해가 최선의 것은 아니라는 자세입니다. 내 자신이 잘못 이해할 수도 있다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내가 싸워서 이겨야 하는 대상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함께 협력하여 선을 이루며 살도록 나를 찾아온 협력자로 여기는 것입니다. 내 생각이 짧고 부족하여 함께 생각하고 함께 협력하도록 보냄을 받은 천사(?)처럼 여기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전도를 하려 내 보내실 때에 “둘씩”(눅10:1) 내 보내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또 하나는 부정적인 이야기로 전해 들었을 때에는 ‘무엇인가 오해가 있겠지?’하면서 좀 더 개방적인 자세를 취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함께 모여 일을 할 때에, 부정적인 방법으로 일을 하자고 의견을 모으는 일이 없지 않습니까? 또 우리가 어떤 이야기를 남에게 전할 때에 그 이야기 속에 내 자신의 사적인 의견을 첨가하지 않습니까? 그렇기에 이야기를 전해들을 때에는 액면 그대로 들으려 하지 말고, 좀 더 이해를 하려 하는 자세가 필요한 것입니다. 나 자신을 위해서도 그렇고 모두를 위해서도 그렇습니다. 내가 오해하여 스스로 괴로워하거나 불평하여 좋을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예수 공동체를 위하여 살고자 하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따를 것이니라.”(눅9: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