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한국의 가장 커다란 과제는 평화로운 통일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크로싱라는 영화가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여기 오기 전 저희 교회엔 100여명의 탈북자가 교회에 방문해 따뜻한 시간을 갖기도 했다. 북한 문화, 노래가 남한 땅에 많이 들어왔다. ‘반갑습네다’를 북한 말투로 인사를 해 봅시다.

수도원을 떠나서 세속에서 일하게 된 청년이 수도원 원장에게 말했다고 한다. 세상에서 어떤 사람을 만나서 어떤 메시지를 전해야 합니까. 정말 알기를 원하는가. 내가 내는 숙제를 하면 말해주겠네. 이 수도원 앞에 작은 마을이 있는데 고통과 슬픔이 한번도 지나가지 않은 씨앗을 가져오게. 청년은 그 씨앗을 가져올 수 없었다. 그 만큼 인생에는 고통과 슬픔이 많다는 이야기다.

세상에 고통과 슬픔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문제는 어떻게 그것을 넘어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인생을 인생답게 살아갈 수 있을까하는 것이다.

오늘 본문 출애굽기 15장은 굉장한 찬양 소리와 기쁨으로 시작하고 있다.
‘1절 이 때에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이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니 일렀으되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이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니..
성경에 나타난 본격적인 찬양이 출 15장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노래하고 있다. 찬양하고 있다.

20절 아론의 누이 선지자 미리암이 손에 소고를 잡으매 모든 여인도 그를 따라 나오며 소고를 잡고 춤추니
미리암이 미리암을 따르는 많은 여인들과 함께 소고 잡고 춤을 춘다. 문제는 그 춤사위가 오래가지 못했다. 오래지 않아 탄식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소고 잡고 춤을 추던 손으로 가슴을 치면 고통스런 신음소리를 내고 있다.

23절 마라에 이르렀더니 그 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
24절 백성이 모세를 대하여 원망하여 가로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
백성들이 원망한다. 조금전까지 노래부르고 축제를 열고 있었는데 지금은 원망하고 있다.

22절 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매 그들이 나와서 수르 광야로 들어가서 거기서 사흘길을 행하였으나 물을 얻지 못하고
사흘 걸렸다. 사흘 만에 상황이 역전된 것이다. 사흘 전에 축제를 벌이고 있었는데. 왜 그랬나. 14장에 보면 홍해 바다가 갈라지는 사건이 있다. 애굽의 병거들이 홍해 바다에 다 수장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열린 바닷길을 건너 광야로 들어오는 놀라운 기적을 체험하게 된다. 하나님의 손길을 체험하고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경험한 것이다. 어떻게 노래하지 않을 수 있었겠나. 문제는 그 기적은 계속되지 않았다. 적어도 기적이 가시적으로 그들 눈앞에 보이지 않았다. 사막을 사흘 동안 걸었다. 사막에서 가장 필요한 것이 물이다. 사흘 동안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하고 걸었다. 드디어 우물을 발견했다. 마라라는 곳에서. 정신없이 마셨는데 마실 수가 없는 물이었다. 더러는 토해냈고 더러는 쓰러져 앓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들은 하나님을 원망하고 모세를 원망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인생이다. 기적이 계속되면 얼마나 좋겠는가. 축복이 계속되면 얼마나 좋겠는가. 잔치가 계속되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짤막한 축복과 기적 뒤에 훨씬 오랜 시간 사막길을 걸어야 한다. 때로는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을 체험하기도 하지만 더 많은 경우 기적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허우적거리며 오랫동안 사막을 걸어야 한다. 한 순간에 예배도 의미가 없어지고 기도도 감동으로 오지 않고 목사님의 설교도 들어오지 않고 이런 신앙의 캄캄한 어둠을 경험할 수 있다.

문제는 이 고통의 밤을 어떻게 지나가나. 그러기 위해서는 고통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고통을 당했을 때 당했다는 현실도 중요하지만 내가 왜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하는지 그 의미를 전혀 알 수가 없다. 그 의미만이라도 알 수 있다면 버틸 수 있을 것 같은데. 고통의 의미를 알지 못한 채 고통의 밤을 지나야 할 때 힘든 것이다.

이번 집회의 전체 주제를 ‘치유’라고 정했다. 그리고 사람의 변화. 치유 만으로 끝나지 않은 것은 치유만 받아서 어쩌겠다는 것인가. 치유를 넘어선 변화가 있을 때 삶의 진정한 의미와 보람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중요한 것은 고통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다. 이게 치유의 시작이 될 수 있다.

첫째로 고통은 하나님의 시험의 교실이다.

적어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있어서 고통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본문을 통해서 알아보자.
첫째로 고통은 하나님의 시험의 교실이다.

25절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지시하시니 그가 물에 던지매 물이 달아졌더라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새

영어 성경에는 test. 시험이 다 나쁜 것은 아니다. 나쁜 시험은 파괴적인 것. 내 인생이 망가지는 것. 이 배후에는 종종 사탄이 있다. 모든 시험이 사탄이 주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하나님이 주시는 것도 있다. 매우 교육적인 것이 있다. 시작은 사탄이 했는데 하나님이 생각하시길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유익이 될 때 허용하는 시험이 있을 수 있다. 욥 같은 경우다. 사탄이 시작했지만 이것을 허용하신 이유는 궁극적으로 욥을 유익하게 할 것이라고 생각하셨기 때문이다.

신약에는 바울이 있다. 바울은 육체의 가시로 인해 기도한 적이 있다. 사탄의 사자. 그것은 사탄이 시작한 것이다. 육체가 안고 있는 질병이었을 것이다. 어떤 학자는 안질이었을 것이라고 한다. 다메섹에서 강한 빛으로 인해서 안질에 걸렸다는 것이다. 어떤 학자는 간질이었을 것이라고 한다. 육체에 시험하는 것이 있는데 그게 안질 정도였을까라는 것이다. 정답은 모른다이다. 바울이 불치의 질병이 있어서 기도한다. 옮겨달라고. 그러나 하나님은 바로 옮기는 것으로 응답하지 않았다. 바울은 어떻게 푸나. 지금까지 받은 은혜가 너무 큰데 나를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이것을 두셨다는 것이다. 병이 당장 없어지지 않았지만 그 병이 바울의 사역을 그만두게 하지 못했다. 병에도 불구하고 주님 앞에 기도하고 능력을 체험하면서 복음의 사역을 능력 있게 감당했다. 내가 약할 때 강함되신다.

사탄이 시작했지만 하나님이 허용하셨다. 바울을 유익하게 하실 것으로 판단했기에.
학생 시절에 시험을 치른 적이 있다. 시험이 다가오기만 하면 너무 설레고 기다려졌다는 사람 있나요? 교육제도 안에서 시험이란 것은 영원히 사라져야 한다고 확신하나? 지금 여러분은 두 가지를 동의한 것. 아무도 시험을 즐거워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험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다.

시험치고 나면 내가 어떤 과목에서 뒤떨어져 있는지 발견한다. 그것을 공부하고 나면 성적이 보충된다. 업그레이드 된다. 그래서 시험이 필요한 것이다.

어떤 학생이 시험지 앞에 두고 저로 하여금 시험을 치루지 않게 하소서. 말도 안 된다. 이 시험을 잘 치르게 도와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한다.

인생은 온갖 종류의 시험을 경험한다. 돈, 관계. 사업 등등. 사도는 ‘너희가 여러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했다. 이 시험이 우리를 온전하게 하나님의 사람다운 사람으로 세울 것이기에. 시험이 오거든 기뻐하라. 명령형이다. 시험은 고통스런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나를 유익하게 할 것임을 믿고 기뻐하라는 것이다.

20대 초에 영어를 배우고 싶어서 선교사 따라다니다가 예수님을 믿게 됐다. 선교사님이 성경 외우라고 숙제도 내주고 했지만 나는 영어만 배우고 예수님은 절대 믿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 때는 성경이 이렇게 위험한 책인지 몰랐다. 내 인생을 바꿀 만큼 이렇게 위험한 책인지 몰랐다. 선교사님이 어느 날 한국말을 가르쳐달라고 해서 가르쳐주었다. 어느 날 질문을 해요. 한국 크리스천들은 밖에서 만나면 재밌게 인사도 하고 잘 지내는데 왜 교회만 들어가면 우느냐. 인상을 찌뿌리고 있느냐. 대답이 궁해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묵상하기 때문이죠. 그랬더니 선교사님이 “그러면 그 죽으신 주님이 다시 사신 것은 잃어버렸나요?” 그 대답이 잊혀지지가 않는다. 그 분이 우리와 함께 있다면 우리는 기뻐해야 할 인생인 것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물론 시험받으면 힘들죠. 통과하기도 힘들다. 이 시험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사람다운 사람으로 키울 수 있다면 유익이 될 것을 믿고 기뻐하길 바란다.

둘째, 고통은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이다

적어도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이 경험하는 고통은 어떤 고통도 치유될 수 있다고 가르친다. 내일은 아픈 분들을 위해 치유하는 시간도 가졌으면 좋겠다.

지금 마라라는 장소. 마실 수 없는 물이었다. 쓴 물.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다. 중보기도를 한 것이다.

25절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지시하시니 그가 물에 던지매 물이 달아졌더라

해답은 아주 가까운 곳에 있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나무를 던졌더니 단물이 되었다. 그 감격이 어땠을까. 그들이 항상 단물을 마셔왔다면 감격이 없었을 것이다. 고통이 있기 때문에 인생의 진정한 의미도 안다. 고통은 아무도 즐길 수 없지만 필요하다. 시험이 필요한 것처럼.

CS 루이스가 강연을 마치고 나오는데 누군가 질문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면 이렇게 설명할 수 없는 고통이 왜 이리 많습니까.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고통마저 없다면 그러지 않아도 교만한 인생 얼마나 교만하겠는가.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고통은 모든 사람의 귀를 열기 위한 하나님의 확성기야. 평소에 들리지 않던 것이 고통 때문에 들린다. 평소에 기도하지 않던 사람이 고통 때문에 기도한다.

하나님은 동시에 고통을 치료하시는 분이다. 쓴 물이 단 물로 바뀌는 것 이것도 일정의 환경의 치료다. 그 하나님이 우리 가정도, 남편도, 교회도, 민족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왜 고통이 축복인가. 치유될 수 있기에. 고통이 머지 않아 축복으로 바뀔 것을 믿으라.

이 고통 저 건너편에 하나님이 축복을 준비하고 계신다.

27절 그들이 엘림에 이르니 거기 물샘 열둘과 종려 칠십 주가 있는지라 거기서 그들이 그 물 곁에 장막을 치니라

마라에서 7마일만 내려오면 엘림이다. 아주 가까운 거리다. 엘림에 왔더니 물샘 열둘이 있었다. 사막에는 단 하나의 샘도 귀하다. 종려 나무가 70그루. 이 정도면 환상의 오아시스다. 조금 전 까지 마라의 땅에 엎드려 원망하고 있었는데 조금만 내려왔더니 환상의 오아시스가 기다리고 있다. 마라에서 원망하고 있다. 인생을 포기하겠다고 한다. 엘림은 보이지 않아도 우리를 위해 예비해 주신다. 믿으십니까? 보이지 않아서 원망하는 것이다. 조금만 참으세요. 조금만 가면 엘림이다.

오늘 우리가 경험하는 온갖 고통 인생의 모든 쓴 맛들 이 모든 것들이 우리를 유익하게 해 줄 것이다. 조금만 견디자. 가장 좋은 것이 아직 오지 않았다. 이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을 지나면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엘림을 예비하신다는 것을 믿으시길 바란다.

셋째, 고통은 하나님의 임재의 마당입니다.

25절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지시하시니 그가 물에 던지매 물이 달아졌더라 거기서 여호와께서

거기서 여호와께서. 거기서 하나님이 말씀하신다. 그 곳이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주시고 그런 놀라운 자리가 되었다. 거기서 하나님을 경험한다. 온 몸으로 경험. 야훼 라파. 우리를 치료하시는 하나님. 신학적 교시로 배운 것이 아니다. 인생의 아픔을 겪으면서 나를 찾아와 만져주시는 하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경험한다. 이 놀라운 하나님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고통이 없었다면 나 같은 사람이 결코 예수 믿지 않았을 것이다. 저는 사돈의 팔촌까지 찾아도 예수 믿는 사람 하나 없다. 대학입시에 떨어졌다. 집안은 풍비박산나고 아버지는 행방불명이 되었다. 내가 장남인데 동생이 6명이다. 그런 집안일수록 자식이 많은 경향이 있다. 저희 집안의 종교는 공식적으로는 불교였다. 고등학교 때 불교학생회장을 했다. 벼랑끝에 몰려서 조계사에 갔다. 실낱 같은 위로를 얻기 위해서 참선을 하러 간 것이다. 평안을 기대하면서 참선을 하는 데 가만히 부처님의 모습을 지켜보니 그 얼굴이 너무 편안하게 보였다. 그 부처가 대학입시에 떨어지고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이 젊은이의 피끓는 고통을 이해하실까. 갑자기 법당에서 낯선 분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십자가에서 몸부림치는 젊은 예수. 저 예수라면 이 날개꺽인 청년의 고통과 마음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예수를 한 번 믿어볼까. 난 법당에서 은혜받은 사람이다. 교회를 한 번 나가볼까. 교회당을 찾기 시작했다. 고통이 없었으면 예수를 못 믿었을 것이다. 고통이 한 걸음 한 걸음 나를 예수님 앞으로 이끌어 갔다.

종종 이웃들 가운데 고통당하는 분 있으면 위로한답시고 기도도 하시고 욥기도 좀 보세요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 보면 열 받는다. 자기는 욥기 다 읽어봤는지… 나도 목사지만 몇 번 읽어도 이해가 다 되지 않는다. 욥기의 핵심이 뭐라고 생각하나. 시험받고 많은 것을 잃어버린다. 이렇게 고생하던 욥이 믿음으로 잘 견디고 인내해서 마지막에 배로 축복을 받았다. 재산, 자식, 마누라, 갑절로 축복을 받았다. 그것이 욥기의 핵심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어느 날 마지막 장을 읽다가 핵심이 이거구나라는 감동이 왔다. 욥기 42장
5절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이 구절이 깊이 다가왔다. 귀로만 들었다가. 주님이 이런 분이라고 목사님이 하나님은 무소부재 전능하신 하나님… 신앙의 선배 통해 귀로만 들었는데 이 고통의 터널을 통과한 후에 욥이 이제는 주님을 보고 있어요. 주님을 만났다는 것이다. 그래서 고통이 필요한 것이다. 고통을 통해 하나님을 더욱 깊이 만나게 될 것이다.

고통은 하나님의 임재의 마당이다. 고통이 올 때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붙잡으세요. 고통을 이길 수 있을 것이다.

유대인 중에 엘리위젤이란 작가가 있다. 이 분이 독일 수용소에서 감금되어서 생활하다가 하루는 틴에이져 소년 하나가 도망갔다가 공개 교수형을 시키는 장면을 보게됐다. 밧줄을 목에 매고 천천히 죽이는 장면을 보면서 땅에 머리를 박고 절규했다고 한다. 하나님 어디 계세요? 저 아이를 보세요. 당신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 때 갑자기 그의 마음속으로 작은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나 저 소년과 함께 매달려 있지. 소년은 바둥거리며 그렇게 죽어갔다. 얼마 후 전쟁이 끝나고 생존자가 되어 감옥에서 나오게 됐다. 그 분이 블란서로 여행하게 됐는데 크리스천 작가를 한 명 만나서 그 이야기를 하게 됐다. 그 작가가 손을 잡으면서 난 그 목소리의 주인공을 알 것 같소. 당신과 같은 유대인으로 이 땅에 와서 십자가에 달린 나사렛 예수요. 그 이름은 예수 혹은 임마누엘이라 합니다. 그는 우리가 고통 당할 때 그 현장에 어김없이 찾아와서 고통을 함께 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예수를 믿는다고 해서 고통이 사라질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너희가 세상에서 환란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함께 있을 지어다라고 하셨다.

수년 전에 멜깁슨이 패션어브크라이스트라는 영화를 만들었다. 영화 시사회 석상에서 어떤 이가 질문했다. 이게 예수의 이야기입니까. 처음부터 끝까지 처절하게 고통 받는 이것은 잔인한 다큐멘터라리고. 그러자 멜깁슨은 “인간의 고통이 그렇게 잔인한 것이요. 그 고통을 가져온 죄가 그렇게 잔인한 것이요”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다른 이가 또 질문을 했다. “당신은 유대인이 예수를 죽였다는 반유대주의를 알리기 위해서 이 영화를 만든 것이요?” 그러자 멜깁슨은 “아닙니다. 유대인들이 죽인 것이 아닙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는 “그렇다면 누가 예수를 죽였다는 것입니까?” 이에 멜깁슨은 이렇게 대답했다. 제가 예수를 죽였습니다. 내 죄가 예수를 죽였습니다. 인간의 죄가 그 고통을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그 분은 다시 사셨습니다. 이게 복음입니다. 하나님은 치유자입니다. 그 분을 만나시길 바랍니다.”